시간과 자유의지. 제목이 조금 다르지만, "시간과 자유의지에 대한 고찰' 이라는 책이 있다. 'Essai sur les Donnees Immediates de la Conscience'. (전공어는 독어였던 관계로 앞에 저렇게 붙이면 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맞을거다.). 베르그송이 쓴 책이다. 내가 이 자리에서 책을 보고 있는 이유중 하나가 된 책.
고등학교 겨울방학 가운데의 어느즈음엔가 며칠동안 저 책에 빠져서 허우적거린 적이 있다. 당시 수학선생님께서 자습시간에 문제지 내버리고 베르그송과 살고 있는 나를 보고 뭐라고 뭐라고 했었다. 혼낸거 같긴 한데 구체적인 내용은 생각이 안난다. 수학 선생님 얼굴 한 번 쳐다보고 계속 책을 볼 정도로 베르그송씨의 이야기에 빠져버렸기 때문에. 그 해 방학은 즐거웠다. 베르그송씨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으니까.
학교의 날씨는 참 비선형적이다. 햇볕 쨍쨍하던 날이 30분 후에 비가 죽죽 내리는 날로 바뀌기도 하고, 비가 엄청나게 쏟아져서 우산을 챙기고 있느라면 창을 두들기던 비는 알아서 삐져서 그냥 돌아간다. 그에 비해서 학교 자체는 조용하다. 방학이라 그런 것도 있고, 사람이 워낙 없어 그런 것도 있다. 그냥, 창을 꾸물거리며 올라가는 담쟁이 덩쿨을 보고 있으면 그 때 베르그송씨의 주장들이 생각난다. 내가 있는 이 곳 -시공간과 전사회적으로 정의된- 은 어떤 곳일까. 지성이 감지하는 시간과 내가 살아가는 시간의 변위차가 너무나 커서, 어지러워 결론을 낼 수 없다.
나 개인에 있어서의 시간의 인식은 무엇을 더 많이 따르고 있는걸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직관' 은 의미 그대로의 직관일까. 워낙 베르그송씨 자신이 일반론이라고 생각하며 쓴 글이라 '적용한다'는 말이 이상하지만, 가끔 지금처럼 아주 늦은 밤 젖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아래서 클래식 라디오를 틀어놓을 때면 그 의문이 상념에 가까운 모습으로 너무나 선명하게 떠오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끝없는 연결고리로서의 철학
아니 철학은 어쩌면 인류 그 자체의 다른 차원에의 그림자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차원인 이상 전이과정에서 정보의 손실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그 실루엣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그런 그림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