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바쁘다. 시험기간이라 바쁘기도 하지만 그보다 모두들 들어갈 연구실을 정하느라 이리저리 교수님들과 면담을 다닌다고 바쁘다. 올해부터는 연구실 배정을 한 학기가 지난 후에 하도록 바뀌었다. 들어갈 랩을 정해보느라, 경쟁율로 눈치보느라 다들 정신없다. 할 연구를 일찍 정해버려 그 복잡한 과정들을 구경만 하는 입장이라 실감은 크게 나지 않는다.
연구실을 결정하는 요소는 다양하다. 보통은 자신이 하고 싶은 분야의 연구실을 결정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입장에서 말해보자면 일반적인 경우는 그렇지 않다. 하고 싶은 분야가 있어도 교수님이 학생을 받아주지 않는 경우도 있고, 가고 싶은 연구실의 교수님이 안식년이라 부득이하게 다른 연구실을 찾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대개의 경우는 특별한 분야에 대한 선호보다는 우선 '갈 수 있는' 연구실을 고르게 된다.
'갈 수 있는'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좋아하는 길을 자신이 걸어갈 길로 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도 하나의 혜택이다. 석사 신입생들 중에는 군필자들이 많다. 적게는 스물 일곱, 많게는 서른살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선택의 폭은 그리 넓지 않다. 일반적으로 군대를 필한 사람은 박사과정을 가지 않기 때문이다.
본인이 박사 과정을 가고 싶은지 그렇지 않는지는 다른 문제이다. 하고 싶은 공부가 있어도 가족들이나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공부를 더 하는 것을 막는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가족의 입장에서는 서른이 넘어서도 일정한 수입이 없이 공부만 할 자식이 한심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장래를 약속한 사람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다들 직장이 있고, 자신이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 상대가 학교에서 청년기의 끝을 보내고 있다면 썩 좋아할 리는 없다.
문제는 시간이다. 공부에는 나이가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현실은 다르다. 어느정도 나이를 먹으면 사람을 얽어맨 수많은 줄들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제 위치로 찾아가라고' 서서히 잡아당긴다. 2년 전 학사 중에 병역특례를 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 기회를 버렸다. 당시 군대를 다녀온 선배의 조언이 큰 이유가 되었었다. '군대를 다녀오면 선택의 기회가 넓어진다는 말이 있다. 그렇지만 군역을 마친 후에 넓어진 선택의 기회만큼 박사과정까지 공부를 계속 하는 선택의 기회는 줄어든다.' 당시에 그 이야기를 들은 후 그대로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의 느낌도 컸지만 지금 조교실에서 보고 듣는 느낌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들에게 석사를 넘어 박사까지 공부를 한다는 것은 실패한 인생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서른 중반에 박사를 마친다면 그 후에 다른 선택의 길은 없다. 만약 박사를 마칠 때 까지 눈에 띄는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면 그 후의 인생은 괴롭다. 수입이 좋은 것도 아니다. 꿈이 있다면 늙은 박사의 길을 걸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가족, 친척, 배우자의 시선을 견디기는 어렵다.
그래서 나이가 많은 군필 석사 동기들은 석사까지만 하고 나갈 수 있는 연구실을 찾는다. 하지만 교수들은 당연히 박사까지 학교에 남아있을 학생을 원한다. 한 번에 한 연구실이 받을 수 있는 학생 수가 정해져 있는 이상 교수들은 신중하게 학생을 고르려고 한다. 남은 석사과정 일 년 반동안 연구실에서 기기를 다루거나 이론을 공부하고 막상 본격적인 연구를 해 볼 때가 되면 졸업해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서 틈이 생긴다. 간판이 필요한 석사들과 연구 인력이 필요한 교수들의 수요공급 곡선은 아무리 생각해도 접점을 찾기 힘들 정도로 차이가 난다. 외국이나 다른 대학의 경우 석사과정이 없어지는 추세이다. 박사를 빨리 받게 해주기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사실 자연계열 대학원의 중간 이탈자가 너무 늘어나다보니 그를 막아보기 위한 방안이다.
우리 학교에서도 통합과정이 대세이지만 물리학과는 아직까지 석사로 신입생을 선발하고 있다. 아마도 올 해가 지나면 물리학과도 통합과정으로 선발하는 식으로 변할 것이다. 신입생의 반 정도가 석사만을 마치고 대학원을 졸업할 생각이고, 이번 학기 말 연구실 배정 때 모두가 그 현실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외국의 대학들처럼, 졸업을 약간 앞당겨 준다는 미끼로 학생들을 조금이라도 오래 잡아두려고 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결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평생을 들여 결정내린 길도 걷기 힘든 것이 인생이다. 조교실에서 석사동기들의 고민을 보며 내가 선택한 길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나의 꿈은 인생을 얹어놓아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다져져 있는가.
젊은 것이 좋은거다. 내 젊음에 감사하며 이 길을 걷고 있다. 젊음은 무엇으로도 자랄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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