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서 두시간동안 잠을 못자고 구르다가 결국 일어났다.
침대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어째서인지를 생각하였다.
한 달 새에 아끼던 후배가 둘이나 세상을 떠났다. 생각이 많아졌다. 그러니까,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대답이 옅어졌다. 사람은 다른 것들을 먹어서 똥으로 바꾸는 비료 제조기일까. 언제 어떻게 그 기능을 멈출지를 자신할 수 없는데, 스스로 가지고 있던 살아가는 이유가 그렇게 합당한 것이던가.
허무해지고 귀찮아졌다. 공부도 사랑도 삶도.
아주 진지하게 절에 들어가는 것을 생각하였다. -또는 학교에서 한달 10만원대 주는 돈갖고 꿀꿀이죽 먹으면서 살지 말고 죽기전에 맛있는거나 많이 먹게 아예 직장전선으로 뛰어나가 돈을 벌어 잘먹고 잘살든지 말이다- 어쩌면 가장 비세속적인 것과 가장 세속적인 것은 통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절에 들어가는 것을 먼저 생각하였던 이유는 역시 두부를 좋아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토록 자연에 대하여 천재적이었던 녀석과 자신에게 성실하던 녀석들은- 없다. 세상은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어중이떠중이들로만 채워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중이떠중이중에 한마리로 살아가게 되는 내가 퍽이나 허무하였다.
-그생각 뿐이라면 사실 별달리 잠을 이루지 못할것도 없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고 있다.
선행자들에게 빚이 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것은 곧 지금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시간을 어떻게 불사를 것인가를 혁이의 죽음 후에 생각하였다. 꼬박 이 년간을 한결같이 써온 '생의 재료'라는 대화명은 예전 누군가의 장례식장에서 정한 것이다. 어차피 불완전한 삶이다. 그걸 인정하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이겨왔다.
그렇지만 현익이의 일은 생의 허무와 산자가 지고 가는 부채 사이의 균형을 깨버렸다. 나중에야 제자리로 돌아오겠지만, 일단은 그 충격으로 계속 진동중이다. 처음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사람들을 바라보면 시선을 바로할 수 없다. 내 눈속의 허무를 읽히기 싫기 때문이다. '어차피 죽을 것들.' 무엇에 그렇게 집착하는가. 두부. 두부두부두부.
맛있는 두부가 좋다.
두부를 좋아해서 절로 들어가야겠다니 허무함과는 관계없이 살아있음을 진하게 느낄 수 밖에 없잖은가.
우습다. 살아있는 사람은 계속 살아간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으면 흔들리는 천칭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속의 무엇인가는 계속 바뀌어 가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