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레인 김은 캘리포니아-버클리 종합대학에서 아시아-미국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녀는 아시아계 미국인 작가와 예술가들에 대한 몇 권의 책을 집필하거나 발행하였으며, 아시아 여성에 대한 TV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가하였다. 다음의 내용은 원래 ‘로드니 킹 읽기/ 도시 폭동 읽기’ 라는 수필 모음집의 한 챕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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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에 대한 한국인의 경험 - 일레인 김
일레인 김(Elaine H. Kim)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교수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교수
나의 이야기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미국 남부 매릴랜드에서 미국인과는 다른 인종으로 태어나서 자란 나는 지금까지 평생을 미국에서 살아왔다. 아버지는 1926년에 유학생으로 미국에 오시기 전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도쿄에 있는 와세다대학을 졸업하셨다. 외할머니는 1903년에서 1905년 사이에 하와이로 이주해 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셨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한국전쟁, 그리고 한반도의 정치적 격변을 지켜보면서 분노와 걱정 섞인 이야기를 내게 끊임없이 들려 준 분들이다. 자라 오면서 나는 미국인들에게 달갑지 않은 침입자처럼 취급받으며 "언제 너의 나라로 돌아갈 거냐?"고 질문을 받곤 했지만, 부모님은 내게 늘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미국 민권법이 1964년에 고용에서의 인종 차별을 금지하기 1년 전인 1963년 펜실베니아대학을 졸업했다. 나는 영문학을 전공해서 모두 A학점을 받았지만 일본이나 폴리네시아계 사람이 하는 식당 웨이트레스나 보험 회사에서 최소한의 임금을 받는 타자수로 일하는 것말고는 일자리가 없었다. 물론 경영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자리는 나보다 학점이나 시험 점수가 낮고 지명도도 떨어지는 대학을 나온 백인 남성들에게 돌아갔다. 나는 잠시 타자수로 일하다가 콜롬비아 대학원에 영문학을 더 공부하러 들어갔지만, 머지않아 그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비공식적인 조언을 들었다. 결국 아버지의 도움으로 1966년부터 1967년까지 서울에 머물면서 이화여대 영문과 강사로 일하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경험은 충격적이었다. 나는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성차별을 목격하고 경험하게 되었다. 1960년대는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미국에 가서 살려는 꿈을 갖고 있거나 그들이 생각하는 미국인들처럼 살고 싶어하면서 '미국 열병'을 앓던 시절이었다. 동남아시아에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굳게 믿은 젊은이로서 내가 수많은 젊은 남성들이 베트남에 가서 싸우기를 열망하는 것을 보고 굴욕감을 느끼던 그때, 존슨 대통령 내외가 서울을 방문했다. 방문 몇 달 전부터 박정희와 존슨의 사진이 담배갑과 버스의 포스터에 찍혀 배포되었다. 수업은 취소되고, 상점은 문을 닫고, 버스는 멈춰 섰는데, 존슨 대통령의 리무진이 지나가는 거리로는 깃발과 꽃이 나부꼈다. 미국에서는 그렇게도 비판받는 대통령이 한국에서는 승리한 왕처럼 대우받았다. 나는 미국에 대한 맹목적인 짝사랑에 빠진 한국인들한테서 커다란 수치심을 느꼈다.
미국에 살 때 나는 외국인으로 취급받았지만, 한국에서는 내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유색 인종과 미국인으로 동시에 살아가는 것이 가능함을 비로소 깨달은 것은 1960년대 말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주도한 민권 운동에서였다. 그러나 그 이전에 아시아계 미국인 혹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개념은 생소하기만 했다. 1967년 말 미국으로 돌아간 나는 빈곤 프로그램의 교사로 일하면서 저소득층 청소년과 성인들의 고등학교 교육을 도왔다. 그 뒤 UC 버클리(Berkeley) 영문학 대학원에 다녔는데, 미국에서 태어나 영어를 모국어로 말하는 아시아인들을 많이 만난 것은 그곳에서 처음이었다. 버클리에서 나는 아시안 미국인학(Asian American Studies) 프로그램을 개설하는 데 참여하여 지금까지 30년 넘게 이 일을 하고 있다.
한국계 미국인 및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와 경험에 대해 이해하고 있던 나에게 1992년 LA의 '폭동'은 차가운 비수처럼 내 가슴을 찔러 왔다. 이 무렵 내가 『뉴스위크』에 썼던 글과 관련해 인종 차별주의자들로부터 받은 증오의 편지들은 내가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따스한 품 안에 들어갈 때 이미 버렸다고 믿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렸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한국인 이주민 상인들에게 분노했다고 전하는 미국의 대중 매체들을 접하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던 나는 이 혼란으로부터의 피난처를 한국의 반일(反日) 민족주의에서 찾았다. 이러한 심정에서 나는 「고국은 한(恨)이 있는 곳」을 썼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한국계 미국인들이 다른 유색인 미국인들을 향해 다리를 놓는 것이다.
고국은 한(恨)이 있는 곳
Home Is Where the Han Is: A korean American Perspective on the Los Angeles Upheavals
한과 정신적 손상
LA 동란(upheavals)으로 총 7억 7천만 달러로 추정되는 물질적 손실 중 절반 가량이 그 지역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별로 얘기하고 싶어하는 것 같지 않았다. LA 거주 한국 교포들은 어렵게 어렵게 자리 잡은 완충 지대에서 폭력이 발생함으로써 졸지에 생계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나의 관심은 물질적인 손해가 아니다. 그것은 양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정신적인 손상에 관한 것이다.
한국 교포들이 그 정신적 손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지, 이른바 '한'을 품지 않고도 '미국인이 될 수 있도록' 어떤 노력들을 기울일 것인지 하는 것이 이 글에서 탐구하려는 바이다. '한'이란 쌓이고 쌓인 억압의 경험에서 생겨나는 슬픔과 분노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은 흔히 '한'이라는 말을 쓰지만 이 단어가 묘사하는 상황은 상당히 심각하다. 사람이 '한'으로 죽는다는 것은 곧 화병으로 죽는다는 것이요, 이 화병은 불행으로 인한 좌절과 분노에서 생기는 것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그리고 앵글로색슨 족이 지배적인 지역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및 중남미계 미국인이 대부분인 지역의 경계선상에 살고 있다는, 다시 말해 미국 사회 인종 담론의 틈바구니에 놓여 있다는 중간적인 입장 때문에, 한국인 교포들은 이 LA 사건을 '반란'(uprising)이라 부르지도 '폭동'(riot)이라 부르지도 못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어정쩡함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3·1, 6·25, 4·19와 같은 한국 역사의 예에 따라 이것을 '4·29'라 부르기도 한다.
나는 일 년에 여남은 차례밖에 LA 한인타운에 가지 못하지만, 그곳은 나에게는 중요한 곳이었다. 한인타운이 생겨나기 전 15∼16년 동안 나는 LA 차이나타운 언저리를 배회하곤 했다. 물론 이러한 습관이 순전히 허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LA에 한인타운이 있음을 안 것은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곳의 '흑인·한인연맹'(Black Korean Alliance)에서 일하던 절친한 친구와 나는 한인타운을 일종의 '고향'(home)으로 여겼다. 이 '고향'은 물론 이상화되고 가상적인 것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정신적인 닻이자 잠재적 피난처였다. "당신은 누구이며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가? 당신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지 않고도 내가 속해 있을 수 있는 미국 안의 유일한 장소였다.
그러나 로드니 킹(Rodney King) 평결(흑인 청년 로드니 킹을 검문중에 무자비하게 폭행한 백인 청년 네 명에게 무죄를 선고한 판결―옮긴이)이 있은 후 수많은 한국 교포들은 공포 속에서 한인타운이 파괴되고 사우스 센트럴 로스엔젤레스의 한국 가게들이 계획적으로 습격받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불길에 휩싸인 건물들, 근심 가득한 한국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이제 고향이란 없을 것이며, 내가 늘 우려했듯이 우리 민족은 이 세상 어디에 있든 한을 품고 살게 되리라는 끔직한 생각을 했다. 외부의 침입, 식민지화, 전쟁, 민족 분단 등으로 수세기에 걸쳐 고통을 받아 온 운명(팔자)은 우리의 짐 가방과 함께 미국에 몰래 따라 들어온 것이다.
한·흑 갈등
1960년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이끈 민권 운동을 통해 사회 의식이 형성되었던 나는 이 모질고 험악한 1990년대에 들어와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우리의 집단적인 꿈이 붕괴되어 한낱 순진하고 쓸모 없는 것으로 내던져지는 것을 느꼈다. '미국인'의 의미를 재정의한 사람은 1960년대의 용감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과 남성 들이었다. 이들은, 나와 같은 사람은 태어난 곳에서 영원히 외국인으로 대우받으며 살거나 아니면 잘 맞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은 영국계 미국인됨에 자신의 정체성을 맡겨 버리는 것 같은 잘못된 선택을 거부해야 한다고 했다. 이들 덕분에 나는 인종주의가 제도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왜 세계사 교과서에 한국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한국 사람들 외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지배적인 문화에 의해 어떻게 쓸려 나갔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받은 미국의 교육은 멕시코계 미국 여성이나 중남미계 미국인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고, 내가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원주민 미국인에 대해 배운 것 대부분은 그들의 억압을 정당화하고 억압하는 자를 옹호하기 위해 왜곡된 것이었다.
나는 4·29 발발 후 몇 주 동안 지역 사회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도자들이 한국계 미국인 상인들을 일러 자기들의 경제적 발전을 방해하는 이방인 침략자라고 하는 말을 듣고 귀를 의심해야 했다. 와트(Watt) 폭동 이후 어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유대인에게서 총수입액의 두 배를 주고 산 주류점을 한국계 미국인들이 다시 다섯 배 되는 가격으로 사들였다는 것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정치 후보자들이 돌린 반한국인(anti-Korean) 전단을 보았더니, 주로 새로 이민 온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중고품 교환 시장 내 매장 재건립을 반대하는 사우스 센트럴 주민들의 청원도 들어 있었다. 한국인 상점을 약탈하면서 이건 당연하다는 쾌감을 느꼈다는, 4·29 때 아시아계 미국인보다 중남미계 사람들이 더 많이 체포된 것은 인종 차별 때문이었다고 주장하는 중남미계들에게 나는 실망하였다. 또 중국계 미국인이 우리와 구별되고 싶다고 한 것을 읽고는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샌프란시스코 일간지에서 아시아계 미국인 문제를 취재한 중국계 미국인 기자에 따르면, 한국인과 달리 중국계나 일본계 미국인 상점의 주인들은 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고 한다. 어떤 중국계 미국인은 "갑자기 내가 아시아인이라는 것이 두렵다. 무엇보다 한국인으로 오인될까봐 겁난다"고 하였다.2) 우연히 유럽계 미국인들이 이러한 갈등을 마치 투견이나 권투 시합 구경하듯이 얘기하는 것을 듣고는 화가 치밀었다. 이런 얘기들을 들으면서 나는 중국 영화 「홍등」을 떠올렸다. 이 영화에서 남편의 얼굴은 등장하지 않는다. 네 명이나 되는 부인들이 서로 싸우지 않도록 인자하게 타이르는 남편의 부드러운 목소리만 들릴 뿐이다. 부인들로 하여금 경쟁을 부추기는 구조가 굳게 자리 잡혀 있는 탓에 남편은 손을 더럽히거나 언성을 높일 필요 없이 친절하고 상냥할 수 있었다.
전쟁터의 유산
한국계 미국인들은 백인과 흑인, 그리고 미국과 한국 정부의 의도 사이에서 짓눌리고 있다. 정부 통제하에 있는 한국의 신문들은 4·29를 정치 부패와 경제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불안을 한편에서 어느 정도 비껴 가면서 한국의 권위주의 정권을 떠받치는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기회로 삼았다. 이 신문들은 LA에서 야만적인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죄없는 한국인들을 공격한 것처럼 묘사한 글을 한국계 미국인의 이름을 도용하여 싣기까지 했다.
분명한 것은 한국계 미국인들이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광범위한 전쟁에 정치적 볼모로 이용되어 왔다는 것과 한인타운이 그 전쟁터가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다른 민족은 없다는 듯이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만 묻는 질문에 화가 나기도 하고, 4·29 당시 한국계 미국인의 견해가 아니라 중국인과 일본인의 견해를 보도한 언론에 분노하기도 했던 우리는 특별히 주목을 받지 못하는 우리의 특수한 상황에 민감해져 있었다. 많은 미국인들에게 한국은 중국과 일본을 잇는 통로나 다리 혹은 아시아의 주요 갈등이 만나는 교차로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인되기
한국인들이 겪은 전쟁, 식민지화, 민족 분단, 초강대국에 의한 경제적·문화적 지배가 빚어 낸 결과 중 하나는, 법에 따라 인권이 보호되는 곳이라 믿은 LA 같은 데로 그들이 이주해 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미국의 영향이 강한 정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일리노이 출신의 가난한 소년이 대통령이 된 이야기를 알고 있었고, 미국의 헌법과 권리장전이 폭력과 부정으로부터 일반인을 보호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한국어로 더빙된 「건스모크」, 「나이트 라이더」, 「맥가이버」를 보며 자랐던 그들은 LA 국제공항에 내리는 순간 맞부딪치는 검은 사람, 갈색 사람, 붉은 사람, 노란 사람 등 다양한 모습의 미국인을 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미국에 공평한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들은 이제부터 미국의 인종적 위계 질서를 배워야 했다.
그들 유색인 이주자들은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내거나 그것을 가시화할 수 없으며, 자기들이 만들지도 않은 불평등과 인종적 위계 질서를 지탱하기 위해 이용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새로 온 이주자 대부분은 그들이 직면할 의사 소통의 장벽을 과소 평가했다. 존 버거(John Berger)와 조안 모어(Joan Mohr)의 『제7의 인간』(A Seventh Man)에 묘사된 독일의 터키인 노동자들처럼, 그들이 의사 소통을 위해 기울인 노고는 그저 몸짓들의 다발일 뿐이었고, 그들이 구사하려 애쓴 영어는 도리어 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하루 14시간, 일주일에 6일 내지 7일간 일을 하느라 영어를 구사하는 미국인을 접할 수 없었고, 영어를 공부할 시간도 거의 없었다. 영어에 불편함을 느꼈던 탓에 외국인과 편안히 대화를 나누기가 어려웠고, 결국 무뚝뚝하고 무례하다며 미움을 샀다. 영어로 예배를 보는 교회에 나가지 않고, 은행 거래도 하지 않았으며, 영어가 필요한 다른 사업에 뛰어들지도 않았다. 대체로 이주민이 운영하는 소규모 점포들은 그 지역 사람을 고용하기보다는 무보수 가족 노동력을 이용하였다. 유럽 중심적인 미국의 문화적 관행 때문에 그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중남미계 사람들의 좋은 점이 무엇인지 거의 혹은 전혀 알지 못했다. 마찬가지 이유로 이들도 한국계 미국인의 좋은 점에 대해 알지 못했다. 동시에 사우스 센트럴과 한인타운에 있는 가게 주인들은 그들이 종종 노동자로 착취하거나 열심히 일하기를 싫어하는 바보라며 혐오하고 멸시한 가난한 타인종 주민들과 대조가 되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주도한 민권 운동 덕분에 직접적인 혜택을 받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이 운동은 그들의 이민을 가능하게 한 1965년의 이민법 개혁에 길을 닦아 놓은 것이었다.
미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점은 미국의 문화적인 영향과 남한 정부의 공식적인 반공 교육으로 형성된 것이어서, 그들이 속해 있는 지역 사회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들은 비(非)백인 이주민과 미국 내 유색 인종에 대한 수치스런 억압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없었으며, 개인적으로 능력이 부족하거나 게으르지 않는 한 성공할 수 있는 실력주의 사회인 '기회의 땅'에 왔다고 여겼다. 자신의 재능과 열심히 일한 대가가 제대로 평가, 보상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고향을 떠나오면서 그들은 열심히 일하면 사회적·경제적 이동을 뜻하는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4.29
1992년 4월 29일과 30일에 한국계 미국인들이 경험한 것은 1990년대에 '미국인이 된다'는 것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세례였다. 사우스 센트럴과 한인타운에 있는 한국계 미국인들이 911에 전화를 했을 때 아무도 와 주지 않았다. 가게와 집이 약탈당하고 불에 타 들어가던 공포스런 사흘 동안 그들은 완전히 홀로 남겨져 있었다. 폭력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해 준다고 믿었던 민주주의 체제에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을까? 정부가 보호해 주리라 믿었던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러나 이틀 동안 도움을 기다리다 손에 무기를 쥔 사람들은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간단한 것이었다. 그들이 배워야 했던 것은 한국에서처럼 미국에서도 '보호'란 주로 잘살고 힘있는 사람들을 위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부촌인 웨스트우드와 한인타운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확실한 것은 한인타운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민주주의와 평등에 대해 받은 교육이 사태를 흐리지만 않았다면, 잘사는 사람과 힘있는 사람만이 특권을 가졌다는 그 친숙한 개념을 한국 이주민들이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여기에서 자기들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 못한 채 초조해 하는 대신, 한국에서 가져온 것이 무엇이든 그것에 더 의존했어야 했다. 한인타운이 전쟁터가 된 것은 대륙과 바다를 건너 그들을 따라온 비극적 유산의 연장처럼 보인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그 사태가 가난하고 특권이 박탈된 자와 보이지 않는 부자간의 전쟁이었다는 점이다. 이 부자들은 전쟁의 완충 지대에서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겹겹이 쌓인 인간 방패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한국계 미국인들 앞에 놓인 유산은 바다와 대륙을 건너 옮겨진 것이 아니라, 미국에 당도하자마자 떠안게 되는 유산일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미국인이 되기 위한 입문식이다. 이 입문식은 한국계 미국인들로 하여금 인종적 폭력과 불평등, 분할 지배, 잘사는 사람들을 위한 특권과 가난한 사람에 대한 억압이라는 5세기에 걸친 이 나라의 유산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이 유산 속에서 한국계 미국인들은 최일선의 자리를 할당받았다. 무언가를 규정 짓고 표현할 권력을 지닌 이들에 의해 침묵당한 탓에, 그들에게는 오직 이러한 역할을 수락하겠다고 복창하는 일만이 허용되어 있을 뿐이다.
한국계 미국인의 침묵
1980년, 한국의 광주에서는 개헌과 자유 선거를 외치던 수백 명의 민간 시위대가 미국이 지원하는 한국의 정예 낙하산 부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나는 언론이 보도한 비디오를 복사해서 어떤 신호나 단서를 찾아보려고 여러 번 틀어 봤기 때문에, 가슴 찢어질 듯한 이 비극적인 사건이 미국의 언론에서 어떻게 그려졌는지 분명히 기억한다. 짧은 시간 동안 미국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외치며 뜻모를 문자들 투성이의 하얀 머리띠를 두른, 외계인같이 생긴 사나운 아시아 군중의 이미지가 화면상에 깜박거리며 새겨졌다. 한국인들은 다른 행성에 사는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보이게 되어 있었다. 배경에 깔려 나오는 목소리는 단순히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고 할 뿐 그러한 저항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어떤 한국인에게도 카메라 앞에서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 다음 뉴스는 민주화를 외치는 폴란드의 시위에 관한 것이었다. 남성이나 여성에게 소감을 물어 볼 때마다 카메라는 각 사람의 얼굴에 착 달라붙어 한 사람씩 화면을 채워 나갔다. 폴란드 사람들의 말은 번역되어 더빙된 목소리나 자막으로 처리되어 나왔다. 전국 조직인 폴란드 자유노조 지도자 바웬사에게는 자주 발언 기회가 주어졌으며, 그는 미국인이면 누구나 동일시하고 싶을 영웅적인 존재로 부각되었다. 뉴욕에서부터 시카고,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 이르기까지 폴란드계 미국인들은 거리 인터뷰에서 자신들이 바르샤바에 보내는 통조림 햄과 담요 이야기를 했다.
이것을 통해 나는 매체 연출, 인종, 권력 정치학에 대한 교훈을 얻었다. 우리의 이데올로기적 장치에 의해 미국인들은 우리의 동료(여기서는 폴란드의 반정부주의자와 반공주의적인 한국 정부)편을 들고 우리의 적들(공산주의 소비에트연방과 한국 정부에 저항하는 시위대)에게 반대하도록 부추겨졌다. 게다가 시각 매체들의 인종 차별주의는 우리를 무섭고 이질적인 아시아로부터 떼어 놓으면서 우리를 유럽인 및 백인들과 동일시하도록 하였다.
1992년 3월, 지역 사회가 후원하는 남북 통일 관련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북한 대표 두 명이 베이 에어리어(Bay Area)를 방문했을 때 한국 교포 사회에서는 800여 명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는 더할 나위 없는 뉴스거리였다. 북한에서 온 사람이 캘리포니아에 24시간 이상 머문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은 몇 달 동안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등 한국어 매체들에서 다루어졌다. 캘리포니아에서 한국 말을 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상업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 공영 방송국 그리고 베이 에어리어의 모든 신문사에 이에 관한 보도 자료를 보냈음에도 주류 언론과 방송사 가운데 이 사실을 다룬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그러나 한국 상점에 대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불매 운동이 있거나 한국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간의 갈등이 표면에 떠오르면 주요 보도 매체들이 수십 개의 마이크를 지역 사회 지도자들 앞에 갖다 대었고, 그들은 무슨 대통령의 공보 담당 비서관이라도 되는 양 얼굴을 내밀고 공식 발표를 해댔다. 민족간 갈등에 대한 매혹은, 모든 인간은 '선천적으로' 인종 차별적이라는 잘못된 인식 위에 서 있는 백인 인종 차별주의를 너그러이 봐 주거나 과소 평가하고자 하는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계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이러한 백인들의 욕망에 스스로를 내맡기고 파괴적인 인종주의를 떠받치는 사회 위계 질서로부터 관심을 돌린다.
미국 언론이 한국계 미국인에 대한 악의를 증폭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첫째, 대중 매체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한국계 미국인 지역 사회 내의 보도 가치 있는 다른 사건과는 대조적으로 이들간의 화합 노력보다는 긴장 관계에 스포트라이트를 맞추었으며, 둘째로는 이번처럼 옥상에서 총을 휘두르거나 자칫하면 군중을 향하여 총격을 가할지도 모를 불가해한 이방인이라는 인종주의적 상투형에 한국계 미국인을 활용하였다. 뉴스 프로그램과 토크쇼에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한국계 미국인간의 긴장 문제를 다루면서 흑인과 백인만 나와서 얘기하도록 했으며, 출연자들은 이러한 긴장을 폭동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했다. 나는 어떤 유럽계 미국인이 무례하고 착취적인 한국계 상인들이 평화로운 인종 관계를 망쳐 놨다고 욕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기에 한국계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물려받은 인종 차별주의로부터, 그리고 미국 생활 조직 안에 이미 잘 짜여져 있는 경제적 부정의와 빈곤으로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는 데 이용된 것이다. 이것은 할린스(L. Harlins)를 살해한 한국인 상점 주인과 빈센트 친(Vincent Chin)을 죽인 백인 남자들, 그리고 로드니 킹을 구타한 백인 경찰관들은 석방시키고 레너드 펠리티어(Leonard Pelitier)는 옥중에서 계속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도록 한 사법 제도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내가 알기로 어떤 상업 혹은 공영 언론도 한·흑 합동 예배나 합동 뮤지컬 공연과 시 낭독회, 한국계 상인들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역 사회와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에 기부한 사실, 시민권 획득을 위한 한국인 이주민 강좌에서 자원 봉사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생님,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 자료에 대한 한국어 번역 등 두 민족간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한국인 이주민들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여념이 없어 미국 생활의 어떤 부분에서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정치적인 입지를 세우지도 못했다. 그들이 LA에서 폭력의 표적이 되었을 때 언론은 이미 틀이 짜여진 인종 관계에 대한 주류 담론, 즉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중남미계인 들이 가난한 것은 그들 자신의 탓이라고 비난하는 것과 한국계 미국인들이 이곳에 살 '진정한' 권리가 없는 로봇이나 다름없는 이방인이므로 그들에게는 어떤 일도 닥칠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때말고는 그들의 의견을 거의 취재하지 않았다.
『뉴스위크』지 경험
이런 상황에서 『뉴스위크』지의 '나의 차례'(My Turn)를 담당하는 편집장이 1천 단어 정도의 개인적인 에세이를 부탁해 왔을 때 나는 여기에 꼭 응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한국인과 한국계 미국인에 관한 미국인의 엄청난 무지를 생각하면 나에게 주어진 하루 반이라는 시간은 글을 쓰기에 충분치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주장하는 맥락에 맞추어 내 말이 앞뒤 설명 없이 한 두 문장으로 짧게 인용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망설인 끝에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언론이 미국 내 인종 폭력의 뿌리에 대한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려는 목적에서 한국계 미국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이의 긴장을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글을 썼다. 인종 폭력의 뿌리는 빈곤과 경찰 폭력으로 얼룩진 지역 사회 내 한국계 상점주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멀리 LA, 새크라멘토, 워싱톤 D.C.의 회사와 정부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계 미국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자신들의 경험과 시각을 왜곡시키는 대중 매체와 교육 제도 때문에 서로를 잘 알지 못한다고 했다. 내 아버지가 인종 차별 때문에 결국 미국인이 될 수 없었다는 것, 반면에 미국에서 태어난 나는 내 자신을 미국인이라고 생각했으며 아메리칸 드림의 가능성을 믿었다는 것을 설명하려고도 했다.
담당 편집장은 자기 생각대로 내 글을 수정하고 싶어했다. 그는 직접 도입부와 마무리 문장을 써서 팩스로 보내 왔는데, 그것은 한국계 상인들을 서부 개척 시대의 카우보이에 견주면서 한국계와 아프리카계 미국인간의 증오를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었다. 내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그는 내 문체가 불명확하다며 경험이 풍부한 저널리스트로서 나를 돕겠다고 했다. 자신감이 흔들리긴 했지만 나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내가 방어적이고 지나치게 민감하다고 비난했지만, 내가 글을 싣지 않겠다고 버티자 마지못해 내 글을 받아들였다.
일종의 탈맥락화를 저지하고 침묵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뻐하기도 전에 나는 항의 편지를 받기 시작했다. 내가 캘리포니아대학 교수라는 것이 알려진 이후에는 편지가 내게 직접 배달되었지만, 대부분은 큰 뭉치로 『뉴스위크』지 앞으로 왔다. 플로리다로부터 위싱턴 주 그리고 메사추세츠, 아리조나에 이르기까지 온갖 지역에서 수백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나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적개심 가득한 편지들을 읽어야 했다. 어떤 사람은 『뉴스위크』지의 내 글이 실린 부분을 찢어서 내 사진 위에 빨간 잉크로 음란한 욕을 잔뜩 써 보내 오기도 했다. 사우스 캘리포니아의 어떤 사람은 "훌륭한 의사한테 가 보시지. 당신은 생각하고 판단하고 환경에 적응하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으니까"라고 비아냥거렸다.
편지를 보낸 사람 중 동유럽 이민자의 후손이라고 밝힌 상당수 사람들은, 『뉴스위크』지가 쓸모 없고 배은망덕하고 푸념과 불평으로 가득한 비(非)미국인 가짜 교수의 과대망상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위선적이고 인종 차별적이며 유치한 견해를 실은 것에 분노가 치밀고 짜증 나며 불쾌하다고 썼다.
유색 미국인, 특히 한국계 미국인과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그 엄청난 무지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글에서 내가 미국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도 미국에서 60년 이상 살아왔다고 했지만, 그들에게 나는 미국에 대해 칭찬과 감사의 말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외국인으로 여겨졌다. 편지에서 사람들은 한국계 미국인이란 고국으로 '돌아가야' 할 이방인이라면서, '한국계 미국인의 정체성'을 버리고 '미국인의 정체성'을 가지려 들지 않는다고 비난하였는데, 이는 그 두 가지 사이에 끼여 힘들어 하는 한국계 미국인들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미국인들이 한국으로 이민을 가는가? 만약 당신이 환상에서 깨어난다면 한국이 거기 있을 것이다. 왜 당신은 한국을 떠났는가? 사요나라."
"당신은 너무나 많은 자유와 기회를 제공한 미국에 대해 복수심을 품고 있는 것 같다.…… 당신 아이들이 한국의 역사를 배울 수 있는 한국으로 돌아가라."
"인종 차별적인 미국 사회에 관한 당신의 푸념 속에는 당신의 극심한 열등감이 숨어 있다. 미국에 그렇게 만족하지 못한다면 왜 떠나지 않는가? 당신의 진정한 충성심과 의식을 펼칠 수 있는 사랑하는 한국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데 말이다."
"당신은 스스로를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부르지만 당신은 미국에서 평생을 살았다.…… 당신은 이 나라의 인종 차별에 대해 쓰고 있지만 당신의 글로 보아 당신 또한 엄청난 인종 차별주의자이다.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한국으로 돌아가라."
"내 양아버지와 사촌들은 당신 아버지가 묻힌 나라에서 우리 국가의 이상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러니 당신의 푸념에 공감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아라."
편지를 쓴 많은 사람들은 내 가족이 아시아의 '최하층 사람들'이며, 내가 미국의 정의와 혜택 덕분에 대학 교수가 되었다고 했다. 그들은 내가 아시아의 가난에서 벗어나 꿈도 못 꾸었을 미국의 풍요 속에서 자라도록 해 준 데 감사하지 않는다며 분노했다.
"당신 부모가 미국으로 오지 않았다면 당신은 어떻게 되었을까? 버클리대학 교수가 아메리칸 드림이 공허한 것이라고 말하다니 참 어이가 없다. 창피한 줄 알아라. 창피한 줄 알아!"
"당신 가족은 아버지 장례를 치르기 위해 시신을 한국으로 보낼 만큼 미국에서 많은 돈을 벌었다. 또 당신은 교수로서 캘리포니아 납세자들이 낸 돈으로 소득을 보장받는다. 인종 차별에 불평하기보다 미국에 대해 좀더 부드럽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동시에 어떤 사람들은 내가 '자유와 기회'를 기대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 망상 속에서 진실을 찾고 있다니 놀랍다. 그 누구도 당신이나 당신 부모에게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다."
항의 편지들은 한국계 미국인들이 미국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그리고 미국인의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었다. 한 캘리포니아 여성은 자기 조부모가 아일랜드에서 이민을 왔지만, 그녀 자신은 아일랜드계 미국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같은 편이 아니면 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미주리의 한 여성은 인종과 민족을 구분하지 않고 '비민족적'이라는 것과 '비인종적'이라는 것을 혼돈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미국인'이라는 말을 '백인'이라는 의미로 쓰고 있는 듯했다. '흑인'이면서 '미국인'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면서도 그녀 자신은 '백인 미국인'이라고 했다.
"나는 백인 미국인이다. 나는 미국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흑인, 백인, 한국인, 중국인, 멕시코인, 독일인, 프랑스인 또는 영국인이나 다른 나라 사람이면서 동시에 미국인이 될 수는 없다. 물론 학교에서 가르치는 문화는 순전히 미국 문화이다. 우리는 미국에 살고 있고, 만일 당신이 다른 문화를 배우려고 한다면 그곳으로 떠날 자유가 있다. '한국계 미국인'이 될 수는 없으며, 그것은 아직 '미국인'이 될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내 말뜻을 알겠는가?"
학교에서 이민 집단과 유색 인종에 대해 좀더 가르쳐야 한다는 제안 때문인지 비서구의 미개 상태로부터 서구의 문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들이 많이 왔다.
"당신은 한국을 배제하는 현재 학교 교과 과정에 만족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그것은 한국과 아시아가 서구 문화를 형성하는 데 별로 영향을 주지 못했고, 또 불행히도 한국 고유의 문화가 없기 때문 아닌가?"
"누가 한국에 대해 관심이나 있는가?…… 그리고 흑인 문화가 미국과 세계, 인류에 대해 지속적인 공헌을 한 바가 있는가? 나는 이미 23년 전에 인간을 달에 데려가고, 심장 개복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를 훈련시키기 위해 의대를 설립하고, 또 베토벤에서 비틀즈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영원히 감동시킬 수 있는 음악 언어를 만들어 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명백히 백인들이 만들어 낸 지배적인 문화는 '멕시코계 미국인, 아프리카 흑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한국인 등이 다른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한 바가 없기 때문에 옆으로 제껴 버린 것이다.'"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형은 교수형이다. 당신 같은 사람들은 그런 부당함을 피해서 여기까지 왔다. 그러면서 이제 불만의 불길을 부채질하고 폭동 속에서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그래! 우리 모두 동양의 문화를 더 공부하자! 제대로 된 시각으로 문제를 보자."
"당신 같은 광신적인 다문화주의자들은 지배 문화가 인구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유럽인들을 통해 형성된 국가에서 이 땅에 살아보지도 않았던 여러 종족들의 문화를 가르치라고 한다. 당신에게 심히 유감스럽다. 당신과 당신 무리는 백인 미국인들이 인종 차별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함께 잘 지내고 싶지만, 우리의 문화와 유산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다."
"당신의 생각은 다른 인종과 관계하는 것이 완전히 무익함을 증명한다. 다른 인종들은 원래 함께 살 수 없게 되어 있다. 우리는 다른 인종과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종에 따라 미국을 나누면 이 땅이 살 만한 곳이 되겠지."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을 제일 화나게 한 것은 유색인들이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특권을 바라고, 배은망덕하게도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백인에게 반대하며 흑인 편을 드는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감히 '인종 차별을 외치는 사람' 편에 서서 지금까지 나를 살려 준 사람의 손을 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구제할 수 없는 무능력자'의 마지막 수단이라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인종간 평화는 소수 집단이 '내가 먼저'라는 장벽을 더 이상 만들지 않고, 특권을 바라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나 아시아계 미국인이 아닌 '미국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만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스나 스웨덴 이민자들, 심지어 중국인조차 혜택받아 보지 못한 우대 조치를 당신은 바라고 있다. 자신이나 다른 미국인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았다. 밀입국해 들어와서 자기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면 모두 가지려 드는 멕시코인들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들은 흑인이나 다른 유색인의 만족할 줄 모르는 요구에 곧 분노를 표하게 될 것이다."
"아프리카 출신의 로스엔젤레스 시민과 아시아계 사람들은 똑같은 차별을 받지 않았다. 아시아계 사람들은 성공을 쌓으려 하고 아프리카계 흑인들은 특별 우대나 받아 먹으려 한다."
인종 차별주의자들이 대개 그렇지만, 이런 집단 혐오적인 편지를 쓴 사람들은 한국·미국·한국계 미국인·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자신의 인식틀 내에서 자기 자신에 관련된 문제만 생각한다. 그들은 미국인 정체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위협받고 있으며, 미국의 인종 차별 때문에 그들 개인이 비난받고 있다고 느꼈다. 워드 프로세스를 능숙하게 조작하는 한 남성은 글 사이에 그의 생각을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이 쓴 글의 행간을 읽어 보지요.
'그 뿌리는…… 로스엔젤레스, 새크라멘토, 워싱톤 D.C.에 있는 회사와 정부에서 찾아야 한다.'
모든 백인 미국인과 미국 제도가 인종 차별에 대한 책임이 있다.
'아직까지 나는 약속이 사실이라고 믿고 싶다.'
나는 자유와 정의라는 미국의 이상이 그저 농담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당신이 내게 주고자 한다면 나는 이 생각을 기꺼이 양보할 것이다.
김씨, 당신이 무식하고 불안정하고 감정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권리요! 다만 설교는 그만. 그리고 제발, 제발 우는 소리 좀 그만하시오.
―아이들이 편견을 가지지 않도록 가르치는 자랑스런 백인 미국인으로부터"
『뉴스위크』지 경험2
나의 에세이는 매우 개인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분노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특히 내가 영어 단어를 사용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화를 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징후", "제로 섬 게임", 당나라 시기의 한·중 관계를 가리키는 "종주 관계" 같은 고급 단어를 사용한 것에 불만을 표시했다. 그 남자는 "미국에서 많아야 열 명 정도만이 이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당신은 자아 도취에 빠져 있다"라고 썼다. 아시아계 미국인이 그런 영어 단어를 사용해서 그렇게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그가 조지 윌(George Will)이나 제인 브라이언트 퀸(Jane Bryant Quinn)에 대해서도 그런 코멘트를 했는지 궁금했다.
의심할 바 없이 나는 미국 유산의 일부, 즉 그것이 국외 추방·억류·살인을 뜻할지라도 어떤 목소리는 침묵시키고 어떤 모습은 지워 버리는 미국의 유산을 보게 된 것이다. 한인타운 사건이나 편지 쓴 사람들이 보여준 무지와 혐오에 대해서, 마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로드니 킹 구타 사건에 놀라지 않았듯이, 놀라지 말았어야 했다. 4·29를 우리의 일상 생활이 아닌 특별한 사건과 뉴스로 다루었기 때문에 나는 우리가 유색인으로서 두 개의 미국, 즉 우리가 가진 꿈의 미국과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인종 차별적인 미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던 것이다. 우리 중 누가 꿈의 미국, 우리의 문화와 차이가 보장되는 다문화 민주주의라는 약속에 매달리지 않겠는가?
4·29 이후 미국이 가진 유산의 다른 면을 보여준 편지들 덕분에 나는 꿈의 미국을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었다. 편지를 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인종 차별과 싸우는 노르웨이계 미국인,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항의 편지는 『뉴스위크』지로 온 반면, 공감을 나타내는 편지,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로부터 온 편지는 나한테 직접 배달되었다. 한국계 미국인들도 자기 표현 방법을 찾아서 기뻤다는 내용의 편지를 많이 보내 왔다. 중국계 미국인과 일본계 미국인은 자신도 이와 비슷한 느낌과 경험을 가진 적이 있다고 했다. 모든 인종 사이의 평화와 이해를 열렬히 바라는 여성의 편지도 있었다. 내슈빌 출신의 한 미국인은 미국 형사 재판에서 아프리카인, 아시아인 그리고 미국 원주민에 대한 인종 차별의 사례를 자세히 써서 보냈다. 아프리카계인과 한인 사이의 폭넓은 이해를 원하는 판사와 교수, 그리고 업무중 쉬는 시간에 연필로 노트에 자기 생각을 휘갈겨 쓴 시인과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편지를 보낸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도 지지와 공감을 나타냈다. 한 남성은 삼촌이 LA에 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한국 여자와 결혼해서 산다고 밝혔는데, 그는 미국에 사는 흑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부당함에 부딪쳤을 때 어떻게 느끼는지 안다고 했다. 맞춤법과 문법이 서툰 것에 미안해 하면서 그는 편지 끝에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자료들을 부탁하였다. 가장 감동적인 것은 한 죄수가 보내 온 편지였다. 그는 어떤 신체적 상해도 입히지 않았지만 단지 무장 강도였다는 이유 하나로 35∼70년형을 선고받아 현재 12년 동안 복역중인 사람이었다.
"나는 이 감옥에서 지금까지 12년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여기에 온 이후 난 흑인뿐 아니라 모든 유색인의 투쟁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나는 '당신네'들을 제일 먼저 돕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피부 색깔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진정으로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우리와 같은 유색인 편에 서서 지원하고 투쟁합니다. 그러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가 누구든 흑인이 아닌 사람은 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미칠 것 같은 감옥에서 보낸 몇 년과 그 동안의 공부는 이 모든 것을 변화시켰습니다.…… 문제는 한국인에 대한 흑인의 대립 혹은 흑인에 대한 한국인의 대립이 아닙니다. 우리의 투쟁은 진정 같은 것입니다. LA 폭동 때 일어난 일은 정말 내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당신은 내 누이이며 당신 민족은 곧 나의 민족입니다. 문화가 약간 다르고 믿는 신이 다르긴 하지만…… 민족을 차별하는 백인의 미국은 우리가 다르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같다고 봅니다. 누구나 백인이 아니면 틀려 먹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이 내 누이이며 당신네들의 투쟁이 곧 내 민족의 투쟁임을 알려 주기 위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계 미국인들의 저항과 회복을 위해 필요한 기반이며, 이 기반 위에서 우리는 한을 품지 않고도 미국인이 될 수 있다. 대부분 지지 편지를 써 보낸 사람들이 유색인이었듯이 인종에 따라 편지의 내용이 달라지고 인종간 차이의 깊이가 놀랍기는 하지만, 나는 로드니 킹이 4·29 다음날 "우리는 잠시 동안 여기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모두 잘해 봅시다"라고 한 말에서 미국인, 특히 많은 유색 미국인들의 바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디즈니식 선전 문구로 바뀌어 정치적 의미가 퇴색해 버린 LA 길거리 광고판의 "우리 모두 어울려 지낼 수 없을까?"라는 말만이 아니라 로드니 킹이 말한 모든 내용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감옥에서 편지를 보낸 흑인 남자처럼 로드니 킹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을 테지만 곧 그런 바람을 수정해야만 했다. '유색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가장 나중에 이야기해야 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는' 마음은 있지만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잘해 보자"라며 노력하는 유색인이 가장 실질적이고 진보적인 의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민족 의식을 통한 공동체 한국계 미국인에게 한국인과 미국인의 유산이 만나는 곳은 "당신 나라로 돌아가라"는 경고이다. 내가 받은 편지 중에는 시카고에 사는 한국계 미국인으로부터 온 것이 한 통 있었다. 그는 한국어 신문에 번역된 내 글을 읽었다면서, "당신이 아무리 미국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당신의 민족은 한국이며, 당신은 한국인의 겉모습을 가지고 있다.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가 온 것이다"라고 하였다.
폐허가 된 상점의 주인들은 한국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얘기들 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가게를 팔아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한국에서 주택이나 가게를 구하려면 목돈이 필요할 텐데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자본이 없다. 또 불경기에 경기 침체, 게다가 심각한 경쟁으로 상황이 악화되어 있어 일자리조차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1926년 시카고에 와서 처음에는 법 때문에 그리고 나중에는 당신이 원치 않아 결국 미국 시민이 되지 못했던 내 아버지는 63년간 내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살았다. 아버지는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리라 믿으며 계속 기대에 차 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결국 1988년 오클랜드에서 돌아가셨다. 소망에 따라 오직 그 유골만 한국으로 되돌아갔다.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꿈이 다른 사람의 증오와 무시를 참게 만들고 고생스런 삶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의 안정이 유지되는 것 아닌가? 인종 차별로 인해 미국인의 정체성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민족을 통해서 공동체를 이루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LA에 사는 한국계 미국인은 자신들이 버려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위기시마다 저항의 원천이 되었던 민족 의식에 기대는 도리밖에 없었다. 한국계 미국인들은 서로 소통하고 돕기 위해 한국어 신문과 라디오에 의지하였으며, 생계 수단을 보호하기 위해 총을 들고 함께 모였다. 4·29가 일어난 지 사흘째 되던 날 3만 명이 넘는 한국계 미국인들이 평화 행진을 위해 LA 시내에 모였다. 이것은 아마도 아시아계 미국인 역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신속하게 조직된 집회였을 것이다. 상복 색깔인 흰 옷을 입은 악사들이 슬픔과 분노 속에서 전통 한국 악기인 북을 두들기면서 한인들의 결속을 축하하였으며,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그 북소리에 한 마음이 되어 갔다. 약탈자로 오인되어 거리에서 총에 맞아 죽은 에드워드 리의 어머니는 자신의 한을 나누고 이해하는 한국계 미국인 사회의 동정 어린 격려로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문화 민족주의는 한국계 미국인들에게 해가 된다고 비판해 왔다. 그 이유는 민족주의가 한국 여성을 억압하고 사고의 경직성과 통일성을 강요하며 자기 비판을 억제하고 자살에 이르기까지 하는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4·29는 나의 사고에 전환을 가져왔다. 혼자 남겨진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만약 한국계 미국인들이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권고를 거절하면서 미국에서 희생자나 정치적 볼모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면 우리가 선택할 무기는 무엇인가?
암울한 일제 식민 통치 시기에 일본은 한국의 모든 경제적 생존 수단과 토지를 약탈하고, 더 나아가 한국이라는 국가 자체를 없애 버리기 위해 그 역사를 바꾸고 그 언어를 금지시켰으며, 일본 천황을 경배케 하고, 심지어 창씨 개명까지 강요하였다. 이러한 문화 말살 정책으로 인해 오히려 한국인들은 오늘날까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의 존엄을 열렬히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민족주의가 한국인과 한국계 미국인에게 왜 중요한 피난처가 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주의가 위험한 무기일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한국계 미국인의 정체성을 포기하라는 반본질주의자들의 요구에 나는 아직 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프랑스인과 독일인이 유럽인이라는 공통된 정체성을 갖기는 쉬울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와 독일이 그들의 특권을 행사하는 동안 억압받고 통합을 요구받는 민족들이라면 어떻겠는가? 나는 유럽 국가들 사이의 역사적·정치적·경제적 불균형 때문에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비롯되었다는 논쟁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많은 백인 미국인들이 유색인들을 전적으로 인종의 틀 속에 넣고 보면서도 자신들은 어떤 인종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에 주목해 왔다. 같은 식으로, 많은 남성들은 자신은 '인간'이고 여성은 하나의 '성별'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의 지배 문화는 황인-백인 또는 흑인-백인의 관계는 인종이라는 렌즈로 보지 못하게 하면서, 범죄나 사소한 문제, 한국계와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이의 모든 관계는 인종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게 만든다. 한국계 미국인이 민족 의식을 포기하는 것보다 영국계 미국인이 문화 민족주의를 버리는 것이 훨씬 더 쉬울 것이며, 그래야 한국계 미국인 또는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인종 차별주의에서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민족주의가 우리에게 어떤 소용이 있는가? 우리는 종속을 거부하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한국인의 민족 의식으로부터 끌어 낼 수 있다. 이것이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의 시작이다. 이로써 우리는 서로간에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우리를 전멸시키려 덤벼드는 세력에 맞서 힘을 합칠 수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만약 새로운 방식으로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한을 품은 채 죽지 않고서 미국인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의 운명이 역사에서 승리한 자의 개선 행진 앞에 굴복해 엎드려 있는 타인의 운명과 어떻게 엉켜져 있는지 이해하려고 하는 한편, 한국인의 민족 의식이라는, 우리가 자주 찾는 그 풍부한 광맥을 파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1980년대를 통해 많은 젊은 한국인 민족주의자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중남미 국가의 민족들이 공유하고 있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유산에 대해 연구해 왔다. 이러한 작업에 관심을 가지면서 민족주의와 페미니즘이 어떻게 세력화의 무기로서 각각이 가진 한계와 취약점을 극복할 수 있을지 주목해야 한다. 한국인의 민족 의식이 우리에게 그러한 세력화의 무기가 될 수 있다면, 생존과 회복의 문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세계주의 속의 민족주의를 새로이 창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의 한이 풀어질 것이며, 자유롭게 다른 가능성의 꿈을 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