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보트와 돈

빚어내기/생각하기 | 2006/09/25 15:45 | inureyes

어렸을 때, 텔레비전에서는 메칸더 브이가 메두사를 물리치고 철인 28호가 효율 좋은 태양전지를 내장하고 무공해로 악당들을 물리치던 시절, 코흘리개 아이들을 유혹하는 '백과사전' 이란 것이 있었다. 지금은 생소하지만 당시에는 이름도 정겨운 "다이나믹 콩콩 코믹스" 라는 정체불명의 출판사에서 주로 찍혀나오던 콘사이스 크기의 책들이다. '나는 한 주제만 잡고 끝까지 판다!" 를 모토로 삼고 전체 줄거리와 등장 인물 소개부터 시작하여 스토리 다이제스트까지 담고 있었다.

이런 책들이다. 사진은 작년 여름 인사동의 '토토의 오래된 물건'에서 찍었음.


나라고 어린 시절이 없었던 것이 아니어서, 부산 외갓집에 가면 외할아버지를 졸라 한 두 권을 사곤 했다. 으레 이런 책들에 꼭 들어 있는 장이 있었는데, 별 의미도 없는 (아마도 공간을 괴상한 도안으로 채우기 좋아하는 누군가가 그린 것이 분명한) 메카닉의 내부 구조도였다. 메칸더 브이 백과사전을 사서 보고 있으려면 그 페이지를 계속 볼 수 밖에 없다. 그런 것을 보고 있는 아이들의 머릿 속에는 현대 과학기술의 진보를 한 단계 뛰어넘는 세상이 현실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머릿속에서의 생각의 흐름은 이랬다. 설계도가 있으면 그걸 보고 만들면 된다 -> 메칸더 브이의 설계도는 이 책에 있다. (서점에서도 판다) -> 그렇다면 설계도대로 만들면 된다 -> 그런데 메칸더 브이는 어디에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의 힘은 무서운 것이어서, 사탕 하나 빨면서 좋다고 실실거리는 아이에게도 길거리에 떨어진 백원의 힘은 무시 못할 정도로 강력했다. 그래서 그랬었을까. "아, 돈이 없어서 메칸더 브이를 못 만드는 거구나." 생각해 버렸다. 물론 '2차원 설계도로 3차원 구조물을 못 만드니까' 라거나, '부품마다 내부 구조를 모르잖아' 등의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아이들 앞에서 기술은 장밋빛 미래로 가득찬 과학'교양' 서적들과, 실제로 밟아 봤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달 탐사 이야기들과 함께 불가능한 것이 없는 전지전능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시절, 여러 친구들끼리 다툰 적이 있었다. "후레쉬맨에 나오는 로보트들은 진짜 있느냐?" 하는 주제였다. 줄기차게 "미국에서 개발해서 해군에서 쓰고 있다" 고 우긴 친구가 이겼다. 여러명이 그 논리에 달려들었지만 이길 수가 없었다. 그 친구의 절대적인 방패 하나. "그 로보트들이 진짜 없으면 어떻게 후레쉬맨을 찍냐? 그거 다 미국에서 빌려와서 찍은거야." 그래. 미국은 잘 사는 나라니까 우리와 다르게 이런 것 쯤은 그냥 만들어서 가지고 있을지도?

*

나중에 진짜 외계인이 쳐들어 오든지 나쁜 악당이 나오면 그 때 돈을 모아서 로보트들을 만들면 되겠구나 하는 마음에 안도의 한숨마저 쉬었던 어린 시절이었다. 전지전능의 가면보다 돈의 힘이 더 무섭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어찌보면 더 무서운 아이의 세계. 잘도 그런 시절을 지나서 훌륭하게 컸구나. 자신이 참으로 기특하도다. (상으로 맛있는 저녁을 먹어야 겠다)

의도야 어찌 되었든 이런 책들은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 21세기 기계공학과 전자공학의 역군들을 양산해 내는 일을 하였고, 반도체는 어느새 우리 나라를 짊어지고 가는 거대 산업이 되었다. 혹자는 말한다. 1995년에 일본에서 에반게리온 그린 이유가 일본의 2010년의 차기 성장 동력으로 생명공학을 점찍었기 때문이 아니냐고.

정말 그런게 아닐까?

세상은 참 복잡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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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5 15:45 2006/09/25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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