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곱시 정각이다. 방이다. 물리학과 학술제가 끝났다.
회식에 속아서 학술부에 편입된지 일 년 만에 학술부 행사를 처음 해봤다. 걱정했던 만큼일까. 학술제의 내용은 많이 맘에 들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 무리한 것을 기대했던 것인지도.
시소같은 생활리듬 사이에 갑자기 들어온 행사가 꽤 많이 힘들었다. 한 주 내내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났는지 생각을 할 수 없는 그런 생활 끝에, 학술제에 이은 뒤풀이는 무리였다. 머리에 동시에 여러 가지를 얹어놓고 돌리는 것이 문제가 된다.
잠이 부족해서 아픈 머릿속인데, 한 쪽에서는 월요일 발표해야 할 Carbon nanotube의 growth model이 cylinder shell 형태로 가정했을 경우 안정상태 값을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생각. 한 쪽에서는 nachos의 scheduler의 aging의 방식을 time-slicing으로 할것인지 scheduler dependent로 할 것인지 생각. 한 쪽에서는 화요일에 발표할 Faraday effect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어떻게 쉽게 정리할 것인지 생각. 놀고는 있는데 피곤해서 머리는 아프고, 생각은 이것저것 round robin으로 돌아가니 표정이 밝을 리가 없다.
마음에 돌을 얹은 것 같았다. 놀 때는 확실히 논다-,이게 안 되었다. 길지 않지만 나름대로의 내 인생에, 처음으로 내 의지가 아닌 내가 선택한 길에 얽매인 느낌을 받았다. 일종의 처리기계같은 느낌. 물리학과와 컴퓨터 공학과 복수 전공을 한 사람이 없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말도 안되는 3학년 2학기를 버텨 내기가 힘들어서겠지.
무얼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정확히 표현하면, 기억을 구태여 해야만 할 일이 없었다.) 잘 기억나는 것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낮에 식사하며 이야기하던 후쿠야마와 헌딩턴의 역사관에 대한 생각이 났었다. 정말 관계없는 생각이다.
그렇게 다른 것들은 다 의미 없었지만, 그래도 하나 진하게 남은 것이 있다.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호연이 형의 배려로 화학동과 풍동, 가속기의 밤을 오랜만에 지날 수가 있었다. '언제나 후회하지 않도록 살아가자' 한 쪽에서 잊혀질 뻔 했던 생활의 방식이 생각나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망원경을 꺼내놓고 별을 보았다.
여유를 잃어가게 되는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학술제의 다른 것은 모두 잊어버려도, 아마 그렇게 별을 보았던 기억은 잊혀지지는 않을 것이다. 예전을 생각하면 너무나 놀랍지만, 이번 학기에 내 의지로 망원경을 처음 꺼낸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구름은 많았지만 오랜만의 가속기 전망대에서의 밤하늘은 무척 아름다웠다.
딛고 있는 곳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은 너무나도 쉽다. 서울에서도 그랬었고, 포항에서도 또 그러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그러한 감정을 잃어버리지 않게 해 준 오늘 새벽에 감사한다.
이젠 좀 자야겠다.
자고 일어나면, 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되든 다 해낼 수 있지 않을까.
능력은 의지를 따라 흐른다.
오래간만에 지치지 않은 채로도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