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니가 포항에 왔다가 돌아갔다. 이번 학기 들어 처음으로 '놀았다'. 매취순 마시고 이야기하고 둘이서 노래방가고 피씨방가고. 그래서 수요일 오전 수업은 모두 못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놀고 오후 느지막히 일어나 정신을 차리고 그제서야 할 일이 없다는 걸 알았다. 씨니가 온다고 이야기해서 잠 안자 가면서 한꺼번에 휘몰아 해버렸던 것이다. 이번 주에 남은 숙제가 없다. ready queue가 비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제서야 지금이 11월인줄 알았고, 가을의 마지막이 내 뒤를 잡아 끄는 것을 느꼈고, 내 얼굴에 가득찬 것이 노이로제임을 알았다.
이런건 좀 빨리 알아도 되는데......
아마 몇주 전 하드디스크가 날아가고, 8년치 일기가 날아가고, 쓰던 책이 날아가고, 앨범과 E-Mail이 날아가면서 시작되었었나보다. 과거를 놓아두고 가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과거는 놓아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든 지금의 내가 있다는 건 당시의 내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인데.
그 후로 내가 얼마나 많이 망가져 있었는지, 그걸 돌아볼 잠시의 여유가 부족했었나 보다. 그래서 그렇게들 걱정해 주던 걸, 정작 본인만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니 미안할 뿐이다.
걱정 안해도 된다고 말했었지만 아니었나.
이렇게 생긴 잠시의 여유동안, 회복은 힘들겠지만 조금씩 가다듬어 가야겠다. 이메일들에 답장 천천히 쓰고, 내버려뒀던 노트북도 조금씩 정리하고...
생각해 보면, 이메일과 답장들을 이렇게 여유롭게 쓰는것은 얼마만일까. 분명히 바쁜것과 여유로운 것은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는데. 아무래도 작년 2학기처럼 꽤 많이 안 좋은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은 이 여유 안에서 편안하다.
폐허 위라도 조금은 더 마음을 담아 살아가기. 조금 더 망각의 영역에 자신을 허여하기.
그런거다. c'est la v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