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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어내기/생각하기 | 2002/08/22 02:53 | inureyes
여행중. 안면도다. 숙소가 없어서 PC방에서 밤을 새는 중. 며칠 컴퓨터를 안만지나 싶더니만 바로 이렇다.

컴퓨터 앞에 있다고 특별히 할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라, 여러 사람들 홈페이지도 돌아다니기도 하고, 그냥 잠시 꺼놓고 음악을 듣기도 하는데. 이래서야 내일 등산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안면도에서 무슨 등산이나고? 내일은 여기 없을테니까.-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짐을 싸서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저것 챙길 것도 많지만, 그나마 컴퓨터가 짐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예전같으면 '집에 가서 짐을 싸서 학교로 간다' 이 과정은 하루 이상의 시간을 수반하는 작업일테지만, 지금이야 가서 옷챙기고 노트북챙기고 정도이다.

노트북이 내 컴퓨터가 된지 7개월하고 4일정도 지났다. 이번 여행때도 들고 오려다가, 스페이서를 학교에서 안들고 와서 그냥 집에 두고 왔는데, 생각보다 많이 걷기 때문에 놓고 오기를 잘했다. 이 노트북이 여행 오기 직전까지 얼마나 속을 썩였는지.

노트북의 기종은 compaq presario 1712ap다. 그리고 2001년 11월 생산분. 노트북에 관심있는 사람은 알지만 이 기간에 생산된 저 1700번대 기종이 문제가 좀 있다. LCD모니터가 연못이다. 적당한 설명이 기억나지 않는데, 모니터를 탁 치면 잔잔하게 물결이 친다. 놓고 쓰면 별 상관이 없는데, 서울을 자주 왕복하느라 차 안에서 글을 쓰거나 프로그래밍을 하거나 할 때면 엄청나게 거슬린다. 퐁당 퐁당 돌을 던져라 누나 몰래 돌을 던져라♪

여름방학이 되었으니 노트북을 들고 날라와서 삼성동에 있는 서비스센터로 갔다. 이 문제가 꽤 유명하게 문제가 된 것이라 보자마자 액정을 통째로 바꿔주었다. (천문대에서 애들보다가 쭉 그어진 기스도 상판과 같이 사라졌다) 바꾸고 나서 불량화소 테스트.

보통 브라운관 모니터는 전자총이 모니터 뒤에서 색을 쑝쑝 쏘아서 화면에 그림을 그린다. 그렇지만 LCD 모니터는 화면의 점 하나하나가 전부 네가지 색을 가지고 있는 작은 다이오드 전구다. 그래서 그 다이오드 중에 고장난 것을 불량화소라고 한다. 잘 생기지 않을 것 같지만, 모니터화면이 가로1024개 세로 768개이니 다이오드 수는 대강 78만개정도다. 그러니 보통 다섯개 미만은 불량이 아닌걸로 친다.

하지만 불행히도 교체한 액정은 가운데 부근에 빨간색 불량화소가 하나 있었다. 바꿔달라고 했는데 이번엔 액정불량. 또 바꿨다. 역시 불량화소가 있는데, 기사아저씨가 안쓰러워 보여서 그냥 쓰겠다고 가지고 왔다.

그런데 가지고 온 후에 좀 쓰다 보니 왼쪽 화면이 형광등처럼 깜빡깜빡 거리면서 잘 안나오는 것이다. 물결도 그대로이고. 또 들고가서 교체. 이번엔 됐겠지 했는데 집에 와서 보니 불량화소 네개에 이번엔 파도가 친다. 결국 다음날 또 갔다. 다시 교체했더니 불량화소 있고, 또 해달라고 해서 교체한 액정에 와서야 불량화소 없고 떨림 없고.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지쳐서 들고오기도 힘들었다. 몇번째인지. compaq 서비스 센터에 있는 모든 종류의 서비스 커피를 다 마셔봤다.

이 노트북이 나에게는 첫번째 노트북이다. 첫번째 컴퓨터는 온갖 컴퓨터부품들의 패치워크였던 286. 두번째는 조립386. 세번째는 조립 펜티엄166MHz. 네번째는 조립 애슬론 550MHz. 예전의 컴퓨터들은 모두 내 손에서 태어난 컴퓨터였다. 고장이나면 낑낑대며 고치고, 쓰다가 성능이 부족하다 싶으면 며칠동안 고민하다 몇달동안 돈을 모아 부품을 새로 사다가 달고.

그렇지만 노트북에 와서는 나의 힘은 닿지 않는다. 검정색 플라스틱과 알루미늄판 아래에 있을 주기판과 하드디스크는 더이상 나의 손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사실 노트북이 더 편할 것임을 알면서도 지난 겨울까지 계속 데스크탑을 고집해 온 것은 그 이유였다. 확장성 없음. 그리고 '내가 좋아할 수 없음'.

나에게 맞지 않으면 주위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더 편하다. 자신이 변하는 것은 일단 자신이 느끼기에 힘드니까. 하지만 노트북을 쓰면서, 정해진 성능 정해진 환경을 보며 내가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 너무나 이상했다. 예전처럼 컴퓨터에 이름을 붙이기도 머쓱했다.

키보드가 달리고, 마우스가 달리고, 램이 달리고, port replicator가 달리고, 스피커가 달리고... 그렇지만 본체는 그대로다.

변하지 않는 존재. 일방적인 한쪽만의 맞춤은 몰이해를 낳는다. 어느 순간에 가면 그걸 견뎌낼 수 없게 된다. 언제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변하지 않을 저 컴퓨터를 언젠가는 '내 컴퓨터'라고 부르게 될까?

하루종일 메고 다녀 빠알갛게 부은 오른쪽 어깨를 보면서 픽 웃음이 나왔다. 저 노트북이 정말 변하지 않는 노트북이야? 하지만 절대 다른 노트북이 저 노트북이 될 수는 없다. 내 흔적이 가득 담긴 하드디스크와, 보이지는 않지만 묻어있을 손때와, AS센터를 몇 번씩 다니며 흘렸을 땀이 저 노트북에 더해진 지금에는.

어쩌면 변한다는 것은 꼭 양쪽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쪽이 다른 쪽에 맞게 변하는 사이,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으면서도 다른쪽 또한 변하게 되니까. 그리고 타인의 눈에 사실 변한 것은 없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그 둘사이에는 무언가가 변한다. 아직까지 그런식의 맞춤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어느새 '내 컴퓨터' 가 되어버린 노트북.

조금후면 떠오를 아침해를 바라보기 위해 바닷가에 서서 바다가 아닌 뒤를 돌아보게 되겠지. 당장 떠오르라고 해도 떠오르는 것도 아니고, 서해에다 대고 해야 떠라 하고 말할 수 없는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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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22 02:53 2002/08/22 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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