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의견은 본인에게 있어서는 항상 최우선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90년대에 들어와서 대중문화를 지배하는 키워드중에 세기말현상의 하나로써 나타나는 것이 있었다. 선과 악에 대한 조건약한 이중긍정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일반화와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치면서 문화를 지배했던 개념이 어긋난 변증법에 의해 깨어지게 되면서 일반문화에까지 전파된 것들중 하나이다.
저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수많은 분야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실제로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다른 분야의 연구등을 공유하면서 여러가지 관점이 생겨나고 있다. 이 현상은 사회에 와서는 개인에 대한 '이해'의 범주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야기하고 싶은 것은 부작용이다. 고사성어에 '역지사지' 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요지의 말이다. 그러한 뜻을 담고 있기 때문에 최근에 널리 쓰이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현대의 세풍과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은 일견 옳다. 하지만 약간만 생각해보면 옳은 것이 아니다. 유행처럼 번지는 관점이지만 관점의 저변에 위험한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에 명제 자체로서 궤변이다.
처음에 이런 말을 하며 시작했다. '자신의 의견은 본인에게 있어서는 항상 최우선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말은 요구사항인 동시에 인간의 생존요건의 일부이기도 하다. 존재론의 기본구조에 바탕을 둔 말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사건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이해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다. 자신의 사고에서 나온 판단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론적 관점에서는 잘해야 감정적인 이해만을 이끌어 낼 수 있을뿐, 정확하게는 이해가 아닌 인정만을 이끌어 낼 수밖에 없다.
광고카피에 떠서 유명해진 말이 있다. "너와 나는 달라." 사회를 구성하는 객체들은 확실히 다르다. 이차원적 사회관의 구성 안에서 다원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이해'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순전히 자신의 관점에서가 아니면 안된다는 사실이다. 상대의 관점으로 억지로 보려고 애쓰는 현대의 모습에서는 결코 인정의 범위를 넘어설 수 없다. '인정'을 '이해'라고 생각하라고 강요당하는 모습, 작게 보면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모습이고, 크게 보면 지금 사회전체가 직면한 아이러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