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나이 많은 사람이 대접을 받았다. 세상이 돌아가는 속도가 사람의 적응속도를 따라잡아버린 지금에는 나이 많으면 직장에서 짤리고, 젊은 세대들로부터 외면받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노인이 공경받았던 것에 대해선 꽤 여러가지 설들이 있다. 농경국가라 오랜 기간동안 하늘의 움직임을 보아서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교육이 연장자의 지위를 보장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가장 간단하게 압축된 대답은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 이다.
경험이 그렇게 중요한 요소인가 생각해 보면, 예전의 경험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현대 시대에 노인이 공경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게 보인다. 그렇지만 노인이 원래 공경받았던 이유는, experience때문이 아니다. 문명 이전의 시대에는 분명히 중요했겠지만, 적어도 동양권에서의 노인공경은 경험 때문이 아니라 시간이 가져다주는 통찰력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인간은 오래 살아도 100년을 넘기기 힘들다. 도가에서 말하는 선인이나, 유가에서 말하는 현자는 '깨치는데' 많은 시간이 들고, 나이가 든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그러한 사람이 되기가 힘들 수 밖에 없다. 왜 공자가 50살이 되어서야 知天命을 이야기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을 '아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이치나 원리가 고정되어 있다면 그 문제는 상당히 간단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그래서 세상을 '아는' 것은 불가능의 영역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세상을 완벽하게 '아는'동시에 그 세상은 다른 모습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세상을 '아는'대신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세상의 모습이 아니라 그 변화의 양태를 아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들 수 밖에 없다. 변화의 방향을 알고, 그 변화의 방향 안에 들어있을 어떤 원리를 알게 되기 위해서는 그 변화를 보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선인이 되길 원하는 자들에겐 지금의 세상은 통찰을 주기에 적당하지 않다. 그렇지만 반대로 이야기하면 세상의 속도가 빨라진 지금, 세상에 대한 통찰을 얻는데 전과 같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에게 주어졌던 시간이 15년 정도 뿐이지만, 이 시간을 네 배로 늘려서 생각해 보면 통찰 비슷한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던 중에 알게 된 것은, 세상의 속도는 분명히 빨라졌지만 그 안에 있는 어떤 원리의 속도는 전혀 빨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상을 구성하는 것인 문화와 기술이지만, 그 안에 있는 무엇은 인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결국 내가 가진 세상에 관한 통찰은 불완전한 것이 될 수밖에 없고,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는 두고 살아 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