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 이야기

빚어내기/생각하기 | 2004/12/21 04:28 | inureyes
처음 컴퓨터를 다룰 때부터 동시대 최저사양의 컴퓨터를 사용해 왔기 때문에 의외로 컴퓨터를 쓸 때 성능은 잘 안 따지는 편이다. 하지만 꽤 따지는 것들이 있다. 컴퓨터 본체보다는 몸에 닿는 기기들이다. 모니터나 마우스, 키보드등은 본체가 어떻건간에 관계없이 좋아야 한다. 인터페이스들은 일단 건강에 직결된 것들이니 좋은 것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모니터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그래서 당시에는 글래머 모니터 중에서 도트피치가 가장 작은 편이었던 모디스 모니터를 사용했었다. 지금은 샤프의 액정을 사용하는 노트북을 사용중이다. 마우스 이야기도 한 적이 있다. 비교적 무난했던 마이크로소프트 인텔리 옵티컬 익스플로러를 사용하다가 이제는 로지텍의 MX510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의외로 키보드에 관해서 이야기한 적은 없다.

처음 사용했던 키보드가 구형 286에 딸려온 IBM의 기계식 키보드였다. 당시만해도 그 키보드가 나중에 역사에 길이남을 1980년대의 그 키보드가 될 줄 몰랐다. 칠 때마다 투투툭하는 소리가 좋았다. 하나 안 좋은 점이라면 게임을 할 때 두 명이 키보드에 들러붙어 마구 누르면 소음이 너무 심해서 키보드에서 벼락소리가 나는 점이었을까.

하지만 그 키보드의 규격은 PS/2가 아니었다. 그래서 386이 되면서 키보드를 바꾸었어야 했다. 그 이후로는 꽤 오랫동안 멤브레인 키보드였다. 중고등학생 신분에 키보드를 바꿀 돈을 마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키보드쯤이야?'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좋은 키보드는 싸지 않다. 처음에 사용하던 IBM 키보드 정도를 구입하려면 15만원 이상은 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대학 입학 후 노트북을 쓰게 되었다. 노트북의 키감을 아무리해도 좋아할 수 없어서 싸구려라도 USB 키보드를 하나 물려쓰게 되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속에서 잠자고 있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당시만해도 코딩을 많이 했고, 손은 죽도록 아파오는데 키보드는 무슨 두부같았다. 그리하여 인터넷에서 다양한 후보를 물색해놓고 키보드를 고르다가 홧김에 오만원을 들여 키보드를 질렀었다. 세진 무선 키보드.

2주만에 승일이한테 3만원에 팔았다. 무선은 편하긴 했는데, 송수신방식이 IR 방식이라 삼파장 형광램프 아래에서는 잘 작동하지 않았다. 키감도 내가 원하는 그 기계식의 키감이 아니었다. 아론 기계식 키보드도 괜찮은 선택이 될 수 있었지만 기계식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기숙사에서 기계식을 사용하면 룸메이트가 잠을 못자니까.

그 후엔 그냥 노트북의 키보드를 사용하였다. 그러다 인상이가 방에서 쓰던 삼성 USB 키보드를 넘겨주었다. 기숙사자치회 사무실에 올려놓은 컴퓨터에 연결해서 1년간 사용하다가 도로 들고 내려와서 노트북에 물려 사용하였다.

그런데 키보드가 너무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다보니 삐그덕거리는 것였다. 처음엔 어느정도 참을만 했는데 나중에는 입력 자체만 스트레스 받는 것이 아니라 USB에서 인식도 되다말다 했다. 이젠 정말 키보드를 제대로 된 것을 쓰고 싶었다.

그리하여 선택된 것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HHK lite 2이다. HHK pro 는 35만원 정도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으니 구입하기 벅찼다. HHK lite 2는 대충 10만원보다 약간 미만을 형성하고 있다. 이 키보드의 특징이라면 키가 60여개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전부 기능키와의 조합이다. 노트북에 익숙했는데도 처음에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지금은 잘 적응해서 쓴다. 다른 키보드에서는 ctrl키를 누르려다가 capslock키를 누르는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

애플의 iPod가 잘 팔리는 것은 그것이 좋은 성능의 음악 재생기이기 때문이 아니다. iPod는 별다른 부가기능이 없다. 그렇지만 하나의 강점이 있다. '편하다.' 인터페이스의 편리함으로 iPod는 세계 하드디스크 음악재생기 시장을 평정했다.

인터페이스의 중요성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건물을 새로 짓지 않고 리모델링을 하는 것 만으로도 건물의 가치는 상승한다. 핸드폰의 펌웨어나 칩은 똑같아도 디자인이 다르면 가격이 오른다. 대통령이 보톡스 주사를 맞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인터페이스는 '관계' 에 영향을 준다.

편리하고 편안한 인터페이스일수록 선호하는 것은 당연하다. 관계가 중시되는 상황일수록 인터페이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인터페이스는 관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상의 본질이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관계(담론이라고 불러도 좋다)' 에 있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20세기 초 이후 관계는 그로 인하여 연결되는 대상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확대해 가고 있다.

그 후 나타나는 문제는 관계의 중요성이 강조된 나머지 타자와의 관계만을 본질로 치환하는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에 의하여 정의되기 때문에 그것이 본속성의 전부라고 말할 수도 있다. 타자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위의 이야기가 맞다. 하지만 내 생각에 적어도 자신과 타자의 관계에 있어서는 관계의 속성과 본질의 속성은 어느정도 분리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원인이 현상을 낳는다. 현상만을 알 수 있는 경우라면 현상이 전부이지만, 원인을 알 수 있는 경우라면 현상만이 전부라고 판단할 필요가 없다.

인터페이스는 맹신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인터페이스는 중요하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인터페이스는 관계를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가장 대중적인 수단이다. 하지만 인터페이스는 대상의 본질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뿐더러 관계를 정의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대상들과 그 사이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 쓰이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인터페이스는 '관계'에 영향력을 크게 미친다는 이유 하나때문에 '관계'로 인식되어오고 있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어렵지만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간단하다. 잘생긴 사람이라고 인간성이 좋은 것도 아니고, 못생긴 사람이라고 인간성이 나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 그러니까 얼굴이나 말빨만 가지고 대상을 판단하지는 말아라. 다르게 말하면 잘생긴 외모가 그 속까지 괜찮은 사람임을 이야기 해 주는 것은 아니다- 정도. 수학이든 철학이든 그 안의 논리체계는 오묘해서 당연한 것을 증명하려고 하면 힘든 법이다.

좋은 키보드는 쉽게 글을 쓰거나 프로그래밍을 하도록 도와주지만, 좋은 글이나 좋은 프로그래밍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마우스도, 타블렛도, 모니터도 단지 인터페이스일 뿐이다. 더 좋은 인터페이스는 조금더 편하고 쉽게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겠지만 좋은 인터페이스를 산다고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트라디바디를 아마추어에게 갖다주면 명바이올린 연주가 나오는가? SG의 그래픽스엔진을 픽사에 가져다주면 '인크레더블' 이 나오지만 오락만 하는 아이에게 가져다주면 윈도우 깔고 '크레이지아케이드'만 할 것이다.

자신이 그 인터페이스를 얼마나 잘 이용할 수 있는가. 또는 인터페이스의 기능이 자신의 능력을 키워준다고 맹신하는 것은 아닌가?

여러 도구를 살 때 꼭 명심해야 할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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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K lit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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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1 04:28 2004/12/21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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