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전날

빚어내기/살아가기 | 2004/12/28 02:14 | inureyes
24일은 크리스마스 전날이었다.

졸업정산을 끝냈다. 학부생과 학원생 사이의 어정쩡한 상태가 아니라 정말 졸업생이 되었다. 학생증이 말소되는 것을 보며 '앞으로 며칠동안은 책을 빌리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학생증에 새겨진 명함 사진이 참 마음에 안들었었는데 벌써 시간이 되어 바꿀수 있게 되었구나' 하였다.

*


수용이 계절학기 관계로 방을 옮기는 것을 도와주었다. 은진이와 시내에 나가기로 한 선약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대부분 학기를 마친 상황이라 수용이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기 힘들어보였다. 결국 졸업정산을 마친 후 이삿짐 옮기는 것을 도와주었다.

시내에 나가며 은진이와 이야기를 하였다. 은진이는 보통때라면 당연히 도와주겠지만 오늘같은 날, 그것도 약속도 미리 해 놓고 그러지는 않을거라고 하였다. 졸업정산에 걸린 시간을 합쳐 세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미안할 수 밖에 없었다. 눈처럼 쏟아지는 미안함속에서 같은 일이 또 일어난다면 어떻게 할 지를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그 상상 안에서 나는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연애할 자격이나 있는건지.
미안하다미안하다미안하다

*


시내는 붐볐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 해의 마지막에서 만난 휴일을 즐기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때아닌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반짝이는 전등들은 그 뒤에 굳어버린 사람들의 표정을 비추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는 어느새 따뜻함을 약간은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그것이 사회의 변화인지, 나의 변화인지는 아직 모른다.

길에는 수많은 사람들과 차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꿈틀꿈틀대며 배로 수레를 미는 다리 또는 팔을 고무로 덮은 사람들이 있었다.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나 배로 수레를 미는 사람이나 분명히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는 정말 높이만큼이나 컸다. 차바퀴들은 너무나 컸고, 그 사람들은 너무나 낮았다.

길을 걷다가 두 분이 같이 배를 바닥에 대고 수레를 미는 남녀분들을 보았다. 한 분은 팔과 다리가, 한 분은 다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분들은 아마도 부부였다. 다른때라면 동정을 사기 위하여 분명히 따로 다니며 돈통을 앞에 놓고 도움을 구했겠지만 오늘만은 그 두 분은 손을 꼭 잡고 웃으면서 그렇게 세상을 뒤로뒤로 함께 밀고 있었다.

그 사람들의 돈통에 돈을 넣기가 너무나 죄송했다. 돈을 넣는다면 그 분들은 분명 감사하게 생각하겠지만, 지금의 행복속에 보탬이 될거라며 돈을 끼워넣는다는 생각을 하는 내가 더럽게 생각되었다. 별말없이 스쳐 지나와 그 기분을 어떻게 지워보고자 구세군 냄비에 돈을 넣었다. 하지만 냄비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퇴계선생은

"이 거리에 진정한 행복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고서 묻고 있었다.

행복에는 경중이 없다. 하지만 같은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역치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자연재해와 가난이 지배하는 방글라데시의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었던 조사결과가 떠올랐다. 어느새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역치를 돈으로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여 약간은 우울했다.

다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지만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역치는 눈에 보이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자연의 무서움을 보는 사람들이 살아있는 인간에게 겸허하다. 살아있는 현재의 행복을 알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은 지금에 있다. 단지 그것을 어떻게해서 깨닫느냐의 문제이다. 하지만 사회는 사람을 그렇게 놓아두려고 하지 않는다. 사랑이 사라지는 크리스마스에는 코카콜라 판촉용으로 개발되었던 빨간색 노인 캐릭터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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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8 02:14 2004/12/28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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