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과 반추

빚어내기/생각하기 | 2006/03/16 02:14 | inureyes
서영과 홍주

이제 독립된 인격으로서 자라기 시작할 동생들에게.


나이가 들면 과거를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진다. 어떤 사람들에게 과거는 매력적이다. 현실은 과거에 비해 고달프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과거가 행복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시간의 힘이 가져다주는 미화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를 되돌아보고, 행복해하고, 그 때에 비하여 불행해 보이는 현재를 원망한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보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낀다. 기억의 거름망으로도 어쩔 수 없는 기억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현재가 썩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예전에 비해서는 훨씬 낫다고 여기는 경우들도 이러한 경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 중간 어딘가에서 과거를 추억하기도 하며 부정하기도 하며 살아간다. 두 경우 중 어느 쪽이 바람직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전자의 경우 기억은 행복하지만, 현실은 쓰라리다. 후자의 경우, 현실은 행복하지만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현실을 방해한다. 그래도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이기에, 사람들은 자기합리화를 의식무의식간에 시도한다.

기억에 대한 자기 합리화에 관하여 좋고 나쁨을 따질 수는 없다. 자기 합리화는 살아가기 위한 한 방편이며, 의식적인 경우보다는 무의식적인 경우가 월등히 많다. 사람은 자기합리화를 통하여 과거를 수정하고 어느 정도는 史實이 아닌 과거 속에서 살아간다. 행복하게(경우에 따라서는 더 불행하게) 미화된 과거는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현실의 원동력이 되며, 현실에 실망하는 사람에게는 달콤한 마약이 된다.

그러나 실존적 존재로 살고 싶다면 기억의 반추는 조심스러운 과정이어야 한다. 많은 사람에게 과거가 현재보다 나았다는 사고는 미래의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시간을 후회하기 위하여 쓰인다. 후회가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성찰의 재료로 쓰인다면 의미가 있지만, 성찰의 재료가 되지 못한다면 - 단지 과거의 자신은 지금보다 나았다는 식의 자위행위가 될 뿐이다.

과거가 현재보다 불행했다는 사고는 현재의 자신에게 정당성과 자신감을 부여한다. 그러나 과거를 사실보다 더 불행하게 재가공하는 것은 행복한 현재는 만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행복한 인생을 만들 수 있는 사고는 아니다. 자기만족을 위하여 지난 시간을 학대하는 과정은 건강하지 않은 자신감과 정체 없는 영웅을 머릿속에 하나 만들 뿐이다.

가장 좋은 것은 지나간 시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위의 문제점들은 모두 과거를 현재의 눈으로 해석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된다. 현재의 자신은 과거의 자신과는 거의 다른 사람이다. 그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 진정한 과거로의 반추가 시작된다. 현재의 자신은 절대 과거의 자신이 될 수 없으며, 나는 한 점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잇는 선 사이에서 존재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깨달을 때에서야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진정한 관조가 가능해진다.

과거의 자신에게 무엇을 더할 필요도, 덜어낼 필요도 없다. 당시의 자신은 어떠했으며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현재의 자신이 되었는지를 알면 충분하다. 그러는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기록은 큰 도움이 된다.

시간을 담고 있으나 미화뿐만이 아닌 고민을 담고 있는, 한없이 주관적이지만 그 안에서 객관성을 읽어낼 수 있는 기록들이 있다. 과거에는 희미해지는 과거를 사진 찍듯 남겨놓는 일을 일기장이 해 주었다. 현대는 미디어의 시대이다. 혹자는 싸이월드나 디지털 카메라가 그러한 일을 해 주고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자신 있게 아니라고 말하겠다. 생 떽쥐베리가 말한, 그가 비행사였고, 작가가 되고, 이제는 역사가 되어버린 지금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한 마디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일기장이든, 블로그이든 무엇에 현재의 흔적을 남기고 있을 때 잊으면 안 되는 점이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아닌 것을 남겨라. 지금의 네가 아닌 미래의 자신이 그 기록을 돌아보고 살아왔다는 사실에 행복해 할 수 있도록.


2006년 3월 밤의 고속도로 위에서

신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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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6 02:14 2006/03/16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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