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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야기.
이야기는 소녀가 열네 살이 되던 때에 시작되지. 햇빛이 쨍쨍 내려쬐는 길 한가운데에서 뒤에 커다란 산을 두고 걸어오고 있네. 옷이 하도 이곳저곳을 찢어놓아서 꼭 몇 년 전에 유행하던 일부러 찢은 옷 같지만 그것 빼고는 그렇게 이상한 점을 찾을 수는 없어. 햇볕이 정말 너무나 더운 곳.
마치 동화 같지만 동화일까. 첫 번째 이야기와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같은 사람이면서도 다른 사람이지. 결국 이렇게 주인공과 함께 걸어가면서 볼 수밖에 없는 여행은 주인공이 보는 것 이상을 벗어나기 힘들거든. 같은 사람이지만 같은 사람이 아니니까 역시 그를 따라가는 우리도 같은 이야기를 보는 것인지 다른 이야기를 보는 것인지.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세상은 커다란 정팔면체잖아. 그래서 모서리부분의 아주 큰 산맥이나 바다가 갈라지는 폭포를 지나면 기후가 확 달라진대요. 당연하겠지만 한 면마다 받는 햇빛의 양이 다르니까. 물론 태양 두 개가 번갈아가면서 땅 위를 돌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후까지 일정할 수는 없지. 조금만 천문학을 공부하면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넘어가자.
그래서 주위 나무들도 다 다르고 풀들도 공기도 다 다르지. 고원에서 느낄 수 있는 시원함 대신 포항 여름의 후덥지근함이 더 어울리는 곳이구나. (대신 과일들도 다 크다! 꽃도 엄청 크고.) 소녀는 배가 고파서 과일을 땄지. 그래도 먹지는 않았어 처음 보는 과일이고 아직 먹어도 죽지 않는지 알지 못하니까.
천천히 주위를 구경하면서 소녀는 길을 따라 걸었지. 어느 정도 걸으니 비포장도로이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잘 닦인 도로의 옆으로 나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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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길이 나와서 소녀는 그 길에 올라갔어. 땅을 다지는 차가 지나간 것처럼 도로는 단단하게 눌려 있었지. 오랜만에 약간 편안한 길에 올라가서일까, 발이 더 편해진 것을 느끼면서 소녀는 길을 따라서 계속 걸었대요. 얼마를 그렇게 갔을까 길이 닿은 곳은 열대 나무들 사이로 나 있는 작은 번화가였어.
소녀는 아주 다른 풍경을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그 거리로 들어갔지. 주위에 있는 집들은 특별히 단단하게 지어진 집들이 아니라 주위에 많이 있는 그런 재료들을 써서 만들어진 집들이었어. 주위 보기가 신기했지만 소녀는 자신도 약간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야자수 잎으로 만들어진 문을 들어 올리고 한 집에 들어갔어. 그 집은 옷집이었지.
그 번화가에서 단 하나뿐인 옷집이었어. 그런 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보통 자신의 일에 프라이드를 아주 강하게 가지지. 이곳도 다르지 않아서 자칭 디자이너가 ‘fashion shop’을 하는 곳이었지. 물론 소녀는 전혀 알지 못했지. 가게 주인 빼고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거든. 가게에 들어온 소녀를 보자 가게 주인 (그러니까 자칭 디자이너지) 이 화들짝 놀랐어.
그거 알아? 요새는 예술 작품이라고 부르는 것 들 중에서 정말 예술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예전의 예술 작품은 누구나 보고 예술이라고 인정할 수 있었지. 마음속에서 무언가 함께 공감하는 그런 것이 있어야 하니까. 그런데 요새는 그렇지가 않잖아. 현대사상이 끼친 나쁜 영향중의 하나에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냐면 그래서 이 가게 주인 디자이너는 이렇게 생각을 하고 만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
‘아니 이럴 수가! 이렇게 앞서는 패션을 한 손님이 오다니 정말 획기적이군요! 엘레강스하면서도 내이츄어한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고 게다가 이 비대칭의 라인하며! 아니 이 색상배치는 그 유명한 현대화가인 목스의 그 색! 아 정말! 나이브한 면을 가볍게 감추면서 그 부분을 인텔리전트한 모습으로 바꾸는 이 배치…….’
등등하고 소녀를 빙빙 돌면서 말하는 거야. 뭐 그럴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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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야 좋지. 자신이 예쁘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기분이 나쁠 리가 없잖아. 사실 계속 옷 이야기만 해서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을 뻔 했지만 그 안에서 “어울려!”, “굉장해!” 이런 말을 들으니까. 옷 디자인도 사실 자신이 한 것이잖아?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었지.
조금 있다 그 사이비 디자이너가 정신을 차리더니 소녀에게 이렇게 말했어.
“음 저희 가게에는 손님의 센스에 따라올 옷이 없군요. 그래도 영광입니다. (소녀 약간 당황.) 선물로 좀 뒤떨어진 패션감각이지만 옷을 몇 벌 드리고 싶은데요, 받아주세요.”
해서 소녀는 옷을 선물 받게 되었지.
전에 입던 옷은 덤으로 얻은 가방에 넣어 한 손에 들고 소녀는 주인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거리로 나왔어. 그런데 재질이라고 해야 하나, 열대지방이라서 나무줄기를 꼬아 만든 것인지, 나뭇잎사귀에서 섬유를 뽑아 짠 것인지, 색이 전부 고동색 아니면 초록색이지. 그러고 보면 소녀의 패션이 좀 앞서나가는 것이기는 하네. 이곳에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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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로 나가서 배가 고픈 소녀는 식사할 곳을 찾았어. 옷도 이제 보통이니까. (사실 소녀의 생각일 뿐이지. 그 옷가게 주인 나름대로 제일 좋은 옷을 주었으니까.) 사람들 사이를 마음대로 지나치면서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니 먹자골목이 있지. 소녀는 쪼르르 달려갔어.
트라벨라를 떠난 뒤로 이상한 곳들만 다닌다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매일 딱딱한 빵이나 먹고 말이야. 다람쥐 먹는 과일 먹고 사슴 마시는 물을 마시고 이러면서 다녔으니까- 소녀는 너무나 반가워서 그만 잊어버린 거야. 소녀 뭐가 없게?
돈이 없지==;
일단 음식점에 들어가서 막 이것저것 먹기는 했어. 가게에서도 일단은 옷이 좋으니까 그냥 먹는 대로 놓아둔 거지. 맛있는 것은 하나씩 다 골라 먹고 그리고 의자에 앉아서 먹는 도중 조금 쉬고 있는데 갑자기 돈이 없다는 것이 생각나 버린 거야. 혹시 전의 마을처럼 모두 다정한 대로 살아야 하니까 봐주지는 않을까? 하면서 소녀는 조금씩 겁 반 조바심 반을 내며 창밖으로 비치는 거리를 내다보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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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도 이제 다 먹었으니까 나가야겠지? 그런데 주춤주춤 눈치만 보고 있지 바깥으로 어떻게 나가야 될 지 난감하니까. 가만히 앉아서 밖만 보고 있는 소녀가 이상한지 음식점 요리사가 요리하다 말고 소녀한테 오네.
“저 요리가 맛이 없습니까?”
공손하게도 물어본다. 하지만 소녀 엄청 당황해버렸지. 주섬주섬 말을 하는데 더듬더듬.
“저 그건 아닌데요.”
그런데 요리사 눈이 왜 저렇게 번쩍거릴까?
“네 그런데요?”
소녀가 어찌할 줄을 몰라 하지. 이어서 요리사가 “맛이 없습니까?” 하고 또 물어보니 소녀는 “ 아뇨. 요리는 제가 지금까지 먹어본 요리 중에서 제일 맛있었어요.” 하고 머뭇거렸지.
요리사 눈 봐라. 엄청 반짝거린다.
“그거 정말입니까?” 이런 눈으로 바라보니까 소녀는 더 무서웠어. 요리사 눈은 째려보는 단계를 넘어서서 =_=+까지 붙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