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후

빚어내기/살아가기 | 2003/07/27 23:02 | inureyes

한 달 놀았다. 아무런 생각이 없다. 머릿속에서 쓰레기 치우느라 삽자루가 빠지도록 놀았다. 양자역학도 아키텍처도 싹싹 쓸어냈다. 텅 비어서 시원하다.

정말 원없이 쉬었다. 2학년 말에 쉰다쉰다 하다가 열흘 조금 더되게 놀았던 것 빼면 초등학교에 옷자락이 물들기 시작한 이후에 제일 오래 그냥 있었다. 수학능력시험 끝나고서는 나름대로 논다고 바빴지만 이번엔 논다고 바쁘고 하는 그런것도 없었다.

마지막 방학이다.
16년동안이나 똑같은 때에 항상 있어왔던 시간이 이제 없어진다. 9학기니 한 번 방학은 더 있겠지만, 졸업논문 정리해야 할테니까 자유롭게 무엇을 해 볼 시간은 없을 것이다. 방학 전에 많은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해보자 이런 것들도 해보자 이렇게도 살아보자...

첫 날에 계획서를 날려버렸다. 계획서를 읽다보니 허무했다. 하나 남은 것이 계획없이 사는 것인데 왜 또 이렇게 목표를 세우고 다가가고 뿌듯해하는 공장인생을 지내려고 했을까. 탑에 다가가면 탑이 무엇이든 간에 무조건 올라가게 된다. 가방속에 넣기 좋았던 Trina씨의 책이 생각났다.

양자역학. 컴퓨터 아키텍처. 비선형동역학. 양자컴퓨터. 천문학. 구조주의. 하이에크. 친일파와 현대한국정치. 통칭하여 '쓰레기'. 매달려 있다가 정작 그 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것을 볼 기회는 잃어버리게 되는 것들.

싹싹 비워내기. 뒹굴뒹굴 구르기. 헌에게 티비 받은 것 놓고 내친김에 플레이스테이션 하나 사서 새벽마다 공포게임 하기. 에어컨 틀어놓은 곳에서 만화책 쌓아놓고 보기. 도서관 구석에 앉아서 아무 책이나 보다가 책베고 자기.

어느새 28일이나 흘렀다.
아아 아침에 머리를 쳤더니 땡~ 하고 에밀레종 소리가 났다. 확실히 비웠나보다. 이제 뭘 차근차근 채워넣을까. 채워넣어야 한다는 생각도 별로 없다. 알아서 또 차면 또 비우고 또 그러면 또 그러고. 일단 뭘 해야 하더라.

편지함 열어보니 어머니께서 보낸 편지 하나. 일단 천상병씨 시집부터 읽어야겠다. 흐음 문장으로 보는 작품세계라 이런 것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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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7 23:02 2003/07/27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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