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년이 된 이야기이지만 예전에 다니던 고등학교는 서울 외곽에 있었다. 주변에는 화훼단지가 있었고, 덕분에 남녀공학이었던 고등학교의 학생들은 꽃을 선물로 사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꽃은 굉장히 신기하다. 선물로 살 수 있는 것 중에서 정말 가치가 없다. 먹을 수도 없고, 다른 일에 사용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그걸 오래 보관해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자라왔는데, 3년을 그 곳에서 보내게 되니 사람을 만날 때 가장 쉽게 손에 들고 있는 것이 꽃다발이 되었다. (솔로분들 참고하시라. 연애 그거 센스만 좀 있으면 할 수 있다. 제일 중요한 건 필이 꽃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지만.)

주말에도 등교해야 하는 힘든 학교 생활이었지만, 반대로 뒤집으면 학교에 가 있으면 뭘 하든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심심하면 자주가는 꽃집에 들어 앉아 노닥거리다가 왔다. 할 일 없으면 꽃 이름, 나무 이름을 물어보기도 했다. 꽃집 구경은 천호대교나 올림픽대교 건너기와 비 맟고 서있기를 포함한 고등학교 시절의 3대 취미중 하나였다. 우습지만, 나무나 꽃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그냥 그 안에 있으면 편하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화훼단지에서 일하시던 여러 아저씨 아줌마 분들 중에 거친 분 한 번 뵌 적이 없었다.

1999년 4월이 지났지만 세계는 망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화훼단지는 그럴 기미가 보였다. 사람이 금전적으로 빡빡해지면 가장 먼저 줄이는 것이 꽃이나 나무같은 '감정에 중요한 것들' 이라는 것을 그 때 깨달았다. 아직도 꽃집 주인분들의 그 표정을 잊을 수 없다. 평생 그늘이 생기지 않을 것 같던 사람들의 얼굴이었는데. IMF와 함께 온 구제금융의 그늘은 우리 가족의 얼굴만이 아니라 그 분들의 얼굴에도 드리워졌다. 아직도 기억난다. 쓴 웃음과 함께,

"아무도 꽃을 안사네."

하시던 꽃집 아저씨.

당시 화이트헤드와 함께 드러커에 굉장한 관심이 있었고, 그러기에 그 분 표정에 드리워진 그늘이 그리 쉽게 걷히지는 않을 것임을 알았다. 1999년, 영어과 백 명 중에 유일하게 '이메일' 아이디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메일이 무엇인지, 인터넷이 무엇인지 설명시켜 드릴 재간이 없었다. 그리고 당시의 난 "아저씨 이제 시대가 변하고 도태 되실 거에요" 같은 이야기를 돌려서 쉽게 말씀드리거나 함께 대안을 찾아 볼 정도로 자라지 못하였다.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고, 그리고 서울을 떠났다.

작년에 모교를 방문했었다. 찾아간 그곳에는 여전히 화훼단지가 있었고, 수많은 꽃집들이 있었다. 자주 가던 곳은 이름이 바뀌었다. 아마 사람도 바뀌었을 것이다. IT의 변화는 모든 사람을 안고 가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 놓인 장벽의 높이는 이미 세번째 물결을 넘어 네번째 물결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는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높다.

오늘 본 뉴스에는 영화산업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갈수록 사람들이 문화에 사용하는 돈이 줄어들고 있다고 하였다. '나는' 사람들이 꽃을 많이 사기를 원한다. 꽃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꽃다발은 사람의 감정이다. 사회에 얼마나 감성이 넘쳐나고 있을까. 인터넷은 훌렁훌렁 벗은 여자들을 꽃에 비유한다. 아이들은 그걸 보고 자란다. 성인들은 잃어가는 여유와 모자라는 돈 속에서, 다음 세상에서 가장 가치가 낮아질 '땅'을 사려고 허덕인다. 갑갑하다. 사회에 감정이 없다.

꽃을 사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 우습지만 함께 생각하던 것들이 어느정도 현실로 내려와서 자리가 잡히면 제일 처음 찾아가고 싶은 곳은 인생의 마지막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 고등학교 주변의 화훼단지이다. "아저씨, 혹시 블로그로 꽃 한 번 팔아보지 않으실래요?" 더 많은 사람을 안고 가고 싶다. 그래야 한다. 감정이 없는 사회에 감성이 되살아나도록. 진정한 연결은, 연결되지 않고 있던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고2의 가을날 주말 오후에 그 화원의 부부 분들이 나무를 심었듯이, 나도 나무를 심는다. 언젠가는 IT 위에서 따뜻함과 감성이 피어나길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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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8 00:33 2006/11/08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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