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시대

빚어내기/생각하기 | 2003/07/30 03:24 | inureyes
20세기의 역사에 대한 통사를 몇 권 읽었다. 저자에 따라 관점이 다르다.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쓰는 다른 글 정리 끝나면 나름대로 20세기에 대한 간단한 통사를 좀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나중의 일이고,

역사에서 흥미로운 사실중 하나는 어느 순간에 과학이 다른 학문들과의 균형을 깨고 전면으로 나오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과학과 균형을 이루는 예술과 종교와 철학이 어느 수준에서 발전의 속도를 늦춘것에 비해 과학은 어느 지점에서부터 현실에 구현되면서 실제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다. 정확하게 나눌 수는 없지만 과학이 현실과 만나는 접점을 중심으로 과학을 둘로 나눌 수 있을 듯 하다. 편의상 설명과학과 구현과학으로 이름을 붙여보겠다.

문명 초창기의 과학은 다른 세가지 학문들과 구분되지 않았다. 설명과학으로 이름을 붙여본 과학은 주로 현상세계를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주된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능은 예술, 종교, 철학이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면 과학은 자신의 설명에 대한 물질적인 근거를 가끔이나마 댈 수 있었다는 정도였다. 그렇지만 정확히 구분 지을수 없는 어느 시기에, (지역에 따라, 문명권에 따라 그 시기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과학은 현실을 설명하는 단계를 뛰어넘어 현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과학 이론을 구현하여 기존에 없었던 현실을 재창조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는 지역에 따라 군주제 또는 중상주의등과 결합하여 학문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구현과학은 다른 세 분야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예술은 새로운 도구로의 과학을 받아들였고, 전에는 같은 권력을 공유하던 종교는 과학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철학은 기존의 추상세계의 일부들이 실제세계에 구현되는 것을 보며 격동기에 접어들었다.

여기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구현과학은 자체로서의 한계에 가로막히게 된다. 어느 정도 이하에서 용인되던 '이해'에 관한 무지는 그 한계에 다다르면 더이상 발전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족쇄가 되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 이후1) 구현과학은 설명과학의 발전을 바탕으로 삼아 발전하게 되었다2). 그리고 과학은 압도적으로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현재까지 오고 있다.

최근의 과학 맹신적인 일련의 모습들을 보면서 몇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과학이 전지전능의 어떠한 대상으로 취급받는 현대이다. 하지만 과연 과학이 그 긴 역사 중 맞는 이야기를 한 적이 얼마나 될까? 화학자들은 플로지스톤이 모든 원소에 들어있어서 불을 일으킨다고 믿었다. 생물학자들은 지구의 나이가 5000살 미만이며, 초파리는 공기의 원소들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다고 믿었다. 물리학자들은 모든 물질이 동일한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가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이런 이야기가 천 년 전의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최근의 한계였고 그 시대의 진실이었다.

지금의 가설들은 모두 진실일까. 원자구조를 설명하는 VSPR 이론은 70년대에 수정되었다. 지구의 나이는 아직도 고무줄인 상태이고, 좋은 망원경이 나올 때 마다 우주의 나이는 늘어간다. DNA조작으로 우수한 인간을 찍어낼 지도 모른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우리는 유전자 파피루스의 로제타석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쿼크와 렙톤에 이어 초끈을 이야기하지만 관측된 결과는 없고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설명과학은 언제나 한계와 등을 맞대고 있다. 구현과학의 결과에 힘입어 설명과학이 발전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결국 그 끝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종교가 이야기하는 끝과 별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어느새 거대화된 과학과 현대의 연금술사들은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를 위해서 미증유의 영역을 밟는다. 갈수록 과학은 종교를 대신하고 있으며, 그 속성마저도 비슷해지고 있다. 그 힘을 쥔 권력자는 인간이고, 어느순간 인간 자신과는 분리된 과학은 그러한 권력자에게 자신을 다룰 수 있는 능력에 대한 검증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끓는 예술혼도, 신실한 신앙도, 끝없이 생각하는 자기도전도 필요없이 과학은 이제는 출처조차 알 수 없는 힘으로 권력에 예속되며 또한 권력 자체가 되어있다.

세계의 역사에서 가장 비슷한 시기를 찾으라면 서양의 중세시대 정도를 찾을 수 있다. 그당시와 모든 면에서 다른 듯 하지만 또한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모습으로의 암흑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중세시대 이전부터, 국가라는 개념이 생기고 동물로서의 삶을 끝낸 이후부터 우리는 암흑시대를 계속 연명해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보다 과장된 설명과학에 주어져있는 권위와 그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치명적인 '발전'안에서 조금씩 균형을 더 잃어가는 모습이 위태해 보인다.



1)19세기중반에서 20세기초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만 정확한 시기를 확실하게 구분짓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으로는 핵물리학이 원자탄을 만들어 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2)이 개념은 언뜻 이론과학과 실험과학의 차이로 보일 수가 있다. 이론과학과 실험과학이 두가지 모두 현실을 설명하고 조사하기 위한 방법인 것에 반해, 설명과학과 구현과학은 과학의 근본 방향의 차이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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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30 03:24 2003/07/30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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