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컴퓨터를 만지게 되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벼랑 끝에 있는 기억을 끌어내보면, 컴퓨터에 반미쳐 있던 친척 형의 집에서 애플머신으로 틀어주는 게임을 하던 것과, 어머니 친구분의 집에서 당시에는 개념도 없었던 프롬프트를 보면서 키보드로 abcd를 치면서 똑같이 나오는 것에 신기해하던 것 정도이다.
초등학교에서 보낸 다섯번째 해에, 친구의 집에 xt라는 것이 생겼다. 나와 친구들의 눈에는 그저 "마루에서 텔레비전을 연결시켜서 할 필요가 없는 오락기"에 불과했다. 디스켓을 집어넣고, 디스켓에 쓰여있던 '암호'를 치면 게임이 실행되는, 그런 오락기였다. 그러다 어느 잡지에서 바블보블이라고, 공룡들이 나와서 비누방울을 부는 게임이 pc로 나왔다고 했다. 그걸 해보자고 친구들과 함께 컴퓨터 학원에 등록했다.
단지 다섯달만을 다녔지만, 그 때의 경험은 컴퓨터가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넘어서 그 후에 가지게 된 질문들의 모티브가 되어주었다. 그 때는 컴퓨터 있는 것이 약간 이상한집이었다. 컴퓨터가 없어서 대부분의 내용을 집에서 머릿속으로 코딩을 해야했다. 베이직. 도스. 어셈블리. 컴퓨터 학원의 선생님은 반 미쳐있던 나를 정해진 진도와 관계없이 내버려두셨다. 그리고 반비례하는 성적때문에 컴퓨터 학원 생활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간은 길다. 수많은 기억들이 있지만, 컴퓨터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는 없다. 그건 '나와 샤프와의 상관관계'를 말하는 것과 비슷하니까.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또 뭉실하게 그려지던 생각.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그 생각이 어린 나이에 잡아 내기에는 꽤 무거운 주제였음을 기억한다. 레비의 'the artficial life'에서, 생명은 또다른 정의를 가진다. 수많은 면에서 현대생물학이 가지는 생명의 정의는 반례들에 직면하고 있다. 어쩌면 생명은 그렇게 복잡한 정의가 필요한 것이 아닐것이다. 내 앞에 놓인 컴퓨터 안에서도, 한정된 메모리 공간을 생태계삼아 일정한 법칙에 의해서 프로그램들이 생존하고 있다. Conway's Lifegame simulation, 또는 러브록의 가이아를 설명하기 위해 제안되었던 데이지효과.
예전 월드와이드 웹의 전 시절에, TV 뉴스에서 컴퓨터를 쓰는 사람들은 왜 컴퓨터를 좋아하느냐에 대한 질문을 했다. 대답하는 사람은 컴퓨터에서 알 수 없는 애착을 느끼기도 하고, 자신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좋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했다. 컴퓨터 안에서 인간은 일종의 자연이고, 조건이다. 프로그램의 도태는 인간의 好吾에 따라 이루어진다. 어떤 의미에서의 선택자, 절대자의 자리에 있는 것. 그래서 오늘도 프로그램은 진화한다. 더 넓은 메모리, 더 넓은 생존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우리의 창조주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물리학을 하는 이유, 철학을 하는 이유, 그리고 아직까지도 컴퓨터를 '쓰는'것 보다는 컴퓨터를 '좋아하는' 이유중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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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래머
Tracked from ego+ing 2009/06/18 15:45나는 프로그래머들을 참 좋아한다. 이것은 동경이면서 존경이다. 내가 이들을 동경하는 이유는 이 사람들이 세계를 창조하는 직업인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하드웨어는 자연이고, 소프트웨어는 사회다. 이들은 그 사회의 건설인이면서, 입안자다. 또 내가 이들은 존경하는 이유는 이들이 이룩한 성취 때문이다. 이들이 건설한 사회는 처음엔 현실을 모방했지만, 이제는 미수에 그친 죽은 사회학자들의 '유지'를 실현하고 있다. 이를테면 오픈소스는 사회주의와 닮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