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은 무한 복제가 가능하다. 아날로그의 예술 작품을 디지털로 옮기면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정보가 손실된다. 워낙 넓은 분야에 걸쳐저서 논의되던 문제이기 때문에 구태여 적을 필요는 없겠지만,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CD와 LP의 음질차' 에 대한 논쟁이다. 다비드상의 3D 이미지를 완벽하게 떠 낸다고 해도 그 데이터가 미켈란젤로의 예술성을 모두 반영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고 있다. 아예 디지털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예술 작품이 늘어나고 있다. 디지타이저로 그린 그림, 컴퓨터로 작성된 원고, 3D 작업으로 만들어지고 기계로 깎아내는 조형물들처럼, 기존 예술 작품의 단순한 재현이나 복사가 아닌 창조 시점부터 디지털화되는 예술의 시대가 열린다. 이러한 방향성이 현대에 와서 처음인 것은 아니다. 직지심체요철을 찍고 구텐베르그 성경이 나올때부터 활자로 대표되는 문학은 이미 자가 복제를 통하여 읽혀지고 싶은 욕망을 전면에 내세웠다. 판화가 등장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조각상이나 주물의 경우엔 현대가 되기 전에 방법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21세기가 되었다. 자동차는 날아다니지 않고 우주에는 아직 하나의 식민지도 없지만 인류의 생활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디지털화가 있고, 디지털화의 저변에는 몇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불멸성에 대한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 모든것은 기록되고 변하지 않는다. 예술 또한 그 욕망을 피해갈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이 다섯개의 복사본을 만들때부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화재로 소실될 때 부터 '완전한 보존'에 대한 욕망은 도서관과 박물관, 미술관을 타고 유유히 흐른다. 그리고 마침내 21세기의 기술은 아예 도구를 디지털화 해 버렸다. 이제는 모든 것의 완전한 고정과 무한복제가 가능해졌다.
사학자의 입장이 되어 상상해 본다. 미래의 그들은 이 시대의 예술에 어떠한 판단을 하게 될까. 가령, 이후에 예술품의 '보존 가치'는 어떻게 정의될까? 천 년 후에서 바라보는 지금의 예술 작품은 '동등한' 형태로 존재할 것이다. 그 사람들은 파일의 디지털 마커에서 의미를 찾아낼까? 가령 '이 예술가는 불법 복제 포토샵을 썼음으로 유추할 때 가난했음-또는 회사가 아닌 가정에서 작업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식의 기술을 하지 않을까. 디지털화를 통한 도구 가격의 하락은 작품 활동 기회를 폭발적으로 늘리고 있다. 주류나 학파는 더이상 의미를 찾기 힘들것이다. 미술사에서 안료나 지종(紙種)등의 역사는 와콤이나 에이조의 리비전 번호에 자리를 내 줄까?
캐드로 그린 후 기계로 빚어내는 예술작품의 시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까?
천 년을 상상하기 이전에, 핵전쟁 후 EMP로 모든 디지털 정보가 소실되지 않을 정도로 인류가 현명하다고 믿는 것이 우선이 될 듯 싶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