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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강, 그 이후

빚어내기/생각하기 | 2008/06/15 21:49 | inureyes

이번 주를 마지막으로 수업이 끝났다.

박사 수료 요건은 지난 학기에 끝냈지만, 미련이 많이 남아서 이번 학기에도 수강신청을 한 것이 시작이었다. 돌아보면 좋은 선택이기도, 안 좋은 선택이기도 하다. 전혀 관심 없던 새로운 분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쌓을 수 있었지만, 반면 학기 초에 계획했던 일들의 상당수는 생각보다 훨씬 컸던 수업의 로드에 밀려 지지부진해졌다. 다음 학기부터는 청강 이외의 수업은 듣지 않고 연구를 시작할 계획이다.

정리하는 겸 오랜만에 povis에 들어가 그동안 어떤 수업을 들었는지 살펴보았다. 수강한 수업을 보러 들어갔을 뿐인데, 제목과 시간과 학점의 행간으로 지난 시간이 저절로 스쳐 지나갔다. 지식들과, 그걸 알기 위해 고생했던 시간들과, 연습들과, 그 사이에서 만난 사람들과 세상과 당시의 생각들과 감정들, 그리고 흘러가는 20대가 있었다.

스스로 서게 된 이후의 인생은 공부와 묶여 있었다. 학사과정부터 박사과정까지 팔년동안 들은 여든 여섯개의 수업들은 수업이 아니라 인생이었다. 대학 일학년 시절 여름 세상의 프레임이 얼마나 거대한지 알게 된 이후로, 그에서 얻은 절망감을 떨쳐 내기 위해서 닥치는대로 들은 수업들이었다. 그렇게 많은 수업을 들어서 무엇에 쓸 생각이었을지. 돌이켜보면 그 때에는 '세상은 절대 작고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었나보다. 처음으로 진지하게 세상을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의 첫 접근은 마치 걸음마를 배우기 전의 아기처럼 그 모든 것들을 배우는 것이었다.

도서관 생활의 기억도 있다. 이학년때 경제학을 공부하고, 삼학년때 역사학을 공부했다. 방학마다 이화여대에서 인문학 과목 계절학기를 수강하면서 이화여대 도서관에서도 한참을 지냈다. (사서분들이 그대로 계신다면 아직 기억하고 계실듯 싶다.) '무엇이 나에게 진리를 보여주는가?' 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다. 심각하게 진로를 인문학으로 바꾸는 것을 고려했었지만 당시 상담했던 교수님의 만류로 접었었다. 충고하시던 말씀들 중 한 마디가 떠오른다. "인생을 놓고 보았을 때 학문에는 때가 있는 학문과 없는 학문이 있다. 네가 하고 싶어하는 학문에는 때가 없지만, 네가 지금 하는 학문은 때를 놓치면 할 수 없는 학문이다."

지난 팔년간의 인생이 공부와 생활의 이중나선만은 아니었다. 인생의 방향이 달라진 것은 2003년 기숙사자치회 회장을 하게 되면서였다. 산업기능요원 후 유학이라는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던 계획을 바꾸게 된 계기는, 세상을 배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발 딛고 서있는 이 공간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인간의 '지성'이나 '철학'에 대해서는 궁금해 하면서도, 정작 인간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배움이 없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설득하고 일해야 하는 위치에서, 사람들과 목표를 공유하고 그걸 구체화시켜 진행시켜 나가는 과정은 세상을 보는 관점에 비가역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표를 보며 돌아보니 기숙사자치회 회장을 하던 기간동안의 GPA이 다시봐도 참으로 이기적이다. 그 기간은 관점에만 비가역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학부 총 GPA에서 그 1년을 제외한 GPA와 포함한 GPA가 거의 0.4점의 차이가 나는 비가역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모든 배움에는 댓가가 따른다고 했던가. 참으로 비타민 C가 풍족해서 감기 걸릴 일이 없던 나날이었다 -_-)

석사과정을 밟기로 결심한 후, 입학하기 직전에 있었던 혁의 사고와 죽음은 근본적인 고민을 안겨 주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객체로서의 삶은 절대 지속될 수 없다. 사람은 관찰자가 아니라 등장 인물로서만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을 이 세상에 던져 놓았을까. 그 이후로 공부는 더이상 생활에 즐거움을 주는 요소가 아니었던 듯 싶다. 발을 땅에 붙이고 살기 위하여 극복해야 할 무엇일 수도 있고, 또는 일말의 답이라도 주기를 바라며 돌아오지 않는 질문을 계속 던지는 과정일 수도 있었다.

그 무렵의 공부는 끝나기를 바라지만 끝이 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치 군대와 비슷했다. 관심사의 폭은 훨씬 넓어지고, 모르는 것을 빨리 알아야 한다는 조바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더이상 공부는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한 수단은 아니었다. 단지 이유를 알기 위한 시간이었다. 종교가 아닌 어떤 것이 허무로 파여진 무저갱을 매우는 질료가 될 수 있는가? 사실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다보니 박사 과정 학생이 되었다. 기나긴 시간동안 서서히 깨달았을 것이다. 알아챔이 느렸지만 얼마전에야 중요한 것 하나를 배웠음을 알게 되었다. 기를 쓰고 알려고 했던 것, 답을 얻으려고 했던 것들은 이 곳에 없다. 물리학에도 없다. 십년도 더 된 고등학교 시절의 어느날에 다이어리에 적어놓은 질문은 근본부터 잘못되었었다. 언어가 본질을 흐릿하게 한다. 추구하고 싶은 '그 것'은 말처럼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고, 존재에 붙이는 이름이 아니라 모든 것들이 가질 수 있는 특질에 붙이는 이름이다. 그 것이 무엇인가? 모른다.

그렇게 학사,석사를 거쳐 박사까지의 수업은 종강했다. 기간으로는 팔년 반이었고, 제도 교육을 받기 시작한지 이십년 반이 걸렸다. 한참을 돌아 와서 이제야 가장 근원적인 곳에 맞닿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 질문을 제대로 던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이제 수업으로 가득차던 학기 대신 연구학기가 시작될 것이고, 정식으로 규격화된 수업을 듣는 일은 없을 것이다. 수업들이 주던 로드는 스스로 받는 로드가 될 것이다. 질문의 방향은 책이나 연구자를 향하는 대신 자신을 향하게 될 것이고, 궁금함과 괴로움을 동시에 본격적으로 마주해야 하는 날이 시작될 것이다. 그 질문들이 물리학의 질문이 될지, 다른 그 무엇이 될 지는 아직 전혀 모르겠다. 지금 확실한 것은 이제부터의 삶은 종강 이후의 삶이고, 질문이 무엇이 되든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 뿐이다.

천 년당 한 명꼴의 천재라는 가우스가 남긴 말 하나가 있다.

It is not knowledge, but the act of learning, not possession but the act of getting there, which grants the greatest enjoyment. When I have clarified and exhausted a subject, then I turn away from it, in order to go into darkness again.

(진리는,) 지식이 아니라 배우는 행위이며,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곳에 도달하기 위한, 최고의 즐거움을 주는 행동이다. 내가 어떤것에 대해 알고 지쳤을 때는 어둠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하여 그로부터 멀어진다.

C.F.Gauss

"그 아래에는 무엇이 있는가?"의 질문을 삼년이 넘도록 잡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그 아래에 무엇이 있기를 바라며 움직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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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5 21:49 2008/06/15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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