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의 정도

빚어내기/생각하기 | 2001/01/11 02:27 | inureyes
PENDP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중이다. 식사할 때와 기숙사 생활, 또 여러가지 활동을 하면서 영어만을 사용한다. 여행다닐 때 약간을 빼고는 한글만 사용하면서 살아왔는데, 편하게 살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젠 조금 익숙해져서 할 만은 한데,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 아마, 죽을때까지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할 문제가 될 것이다. 내 생각을 영어로 표현하는 것이 아주 힘들다. 한글로 표현하기도 힘든데, 영어로 하는 것은 더 힘들다. 단순한 회화가 아니라, 조금만 내 생각이 들어가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특기중 하나가 속독이다. 특별히 하는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어느날 보니 그렇게 되어있었다. 우선 읽는 속도가 빠르다. 그런데 차이가 나는 것은, 우선 내용을 머릿속에 전부 넣고, 생각을 몰아서 천천히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옆에서 보기에는 아주 빨리 읽는 것 처럼 보인다. 같은 이유에서, 생각하고 표현하는 방법이 약간은 달라져버렸다. 말이 길어지면, 일단 생각한다. 생각의 정리가 끝나면, 그때 생각을 말로 바꾼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한글로는 그런대로 빨리 말할 수 있지만, 영어로는 아직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이 확실히 차이가 나는 때가 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할 때이다. 나름대로 재미있을 이야기라고 해도 내용이 전달되면 상대방에게는 재미없는 이야기가 된다. 내 머릿속에서 정리되어 있을 때는 처음과 끝에 복선이 있는데, 그것이 말이 되어 나오면 그 사이가 너무 길어져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뭐 그려려니 하고 이젠 그냥 재미없는 사람으로 지내지만, 생각해보면 중학교때까지는 분명 재미있는 사람이었다.(반대로 말하면 머릿속에서의 정리가 그 당시에는 짧았다는 말이 된다.)

그 런데 이 문제는 고칠 수가 없는 것이다. 생각하는 방법의 기초를 바꾸어야 한다는 말과 같은데, 나는 그걸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고치는 것보다 그 점에 대해서 상대방에게 이해시키는 것에 관해 더 열심히 생각하게 되었다. 대화를 하다가 보면 가끔 핀트가 맞지 않을 때가 있다. 누구든지 그런 일을 겪는다. 그런경우 나도 열심히 무언가 설명해보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단순히 언어의 문제에 대해서만 생각을 해보아도 이해는 힘든 일이다. 언어소통이 힘든 이유의 근본적인 원인은 개개인의 생각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방법이나, 내용이나, 환경에 의해서 또 경험에 의해서 다르게 형성될 수 밖에 없다. 태어날 때 부터 노란색을 초록색으로 보고 초록색이 노란색으로 보이는 색맹에 걸린 사람을 떠올려보자. 그 사람은 죽을 때 까지 자신이 보는 초록색이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이 보는 노란색이라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활에는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태어날 때 부터 그렇게 보였다면 누가 그 사실을 알 수 있을까? 본인조차도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 언어소통이나 관념등의 개개인의 문제의 폭이 생각보다 더 넓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사람의 경우, 시지각은 보통 느낌에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그는 노란색과 '밝다'라는 감각, '따스하다' 라는 감각을 함께 습득하게 된다. 보통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실제 언어로 표현가능한 감각은 사회적 약속이다. 실제로 미각의 경우에도, 식사에 따라 느끼는 절대적 미각의 수가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이 색맹의 사람인 경우에도, 직접적 감각인 시지각에 연결된 추상적 감각들이 실제 타인과는 다른 감각에 의해 영향을 받을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총체성의 관점에서 볼 때 절대적 이해를 위한 상대적 지각의 차이가 이해의 정도에 그리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위의 경우는 절대적이라고 가정된 총체성의 경우에 위배되는 하나의 예를 제시해 줄 수 있다.

다 른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우선 '이해'의 척도를 임의로 정할 수가 없고, 이를 위해 '이해'의 정도에 기준선을 그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타인에게 이해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또 타인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도 역시 많이 볼 수 있다. 신의 무게가 예전보다 줄어든 시대에, '너를 이해한다'는 말이 유행어처럼 쓰이고 있다. 이 말의 무게는 무겁다. 확실히, '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 을 타인에게 표현하고, 타인이 그 표현을 수용한다고 해서 이해의 관계가 성립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게다가, 그마저 되지 않는 상태에서 이해에 관한 가벼운 언급을 남발하는 모습은,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암시의 성격이 강하다. 착각에 힘을 싣는 광경일까. 인간은 타인의 행동의 원인을 타인 내부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지식의 한도 내에서 해석해 내고, 그래야만 한다는 관념이 본능적으로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해의 범위에 접근하지 못하면서, 그러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해는 쉬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항상 가능한 것도 아니다. 주변에서 불가능에 도전하고 성공했다고 자위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본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고, 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간단한 것을 생각한다. 이해까지는 힘들더라고 타인을 인정할 수는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또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인정한다'는 것은 나중에라도 이해할 수 있는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때문에 영원히 사고의 가능성을 막아버리는 것 보다는 아주 나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고, 인정하고 이해하기를 바란다. 생각을 듣고 싶은 몇몇 사람들이 있고, 솔직한 생각을 나누어 보고 싶지만, 오늘도 여전히 주어진 지식의 한도 내에서 유추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영원히 끝날 수 없는 하나의 과제가 되지 않을까. 이해에 정도라는 개념을 함께 생각해 보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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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1/11 02:27 2001/01/11 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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