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컴퓨터세계의 이야기.
불구대천의 원수로 지내던 애플과 인텔과 손을 잡았다. PPC를 CPU로 사용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던 많은 맥유저들이 그 일로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텔의 P4 CPU가 '엉터리 클럭'이라고 말하며 아키텍처의 우수함을 내세웠지만, 크기와 발열량에 무신경한 IBM의 CPU 라인업은 스티브 잡스가 애플로 돌아온 이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휴대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애플로서는 견디기 힘들었을게다.
아무리 컴퓨터 세계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미국의 일을 먼 나라에서 지켜보는 입장으로서는 전혀 충격이 되지 못하였다.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이지만 한반도에서 그 정도는 충격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우리 나라에서 살다 보면 다리가 끊어지거나 백화점이 무너지는 초현실적인 장면들도 많이 보게 되고 반석마냥 튼튼해 보이던 멀쩡하던 대기업이 수숫대 꺾이듯 사라지는 일도 흔하게 보게 된다. 웬만한 일에는 저항력이 생긴것이다.
그런데 애플의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는 이유가 단순히 놀라운 일에 대한 저항력이 강하기 때문이었을까? 그렇다기보다는 역사가 반복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회전속도가 빠른 컴퓨터 업계에서 일찌감치 보아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MS가 공적마냥 되어있지만 내가 컴퓨터를 처음 배우던 당시에는 애플이 그러한 악당역을 하고 있었다. 비공개된 마스킹 롬이나 이유없이 비쌌던 주변장치 등, 제대로 된 MS 윈도우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래픽 환경을 쓰기 위해서는 울며 겨자먹기로 매킨토시를 써야 했다. IBM은? 지금은 공룡같아 보이는 인텔이 젊은 기업이던 시절 IBM 호환 CPU를 만들기 전 까지는 IBM은 16비트 컴퓨터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와 함께 독선적인 기업 운영으로 수많은 기업들의 원성을 사야했었다.
MS가 한 일 덕분에 우리는 저렴한 가격에 그래픽 환경의 운영체제가 돌아가는 컴퓨터를 가지게 되었다. 인텔 덕분에 IBM 주도의 비싸고 느린 CPU 발전 속도를 뒤로 할 수 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은인이던 MS는 만인의 적이 되어있고 인텔은 AMD보다 언제나 한 발씩 늦은 기술진보를 선보인다. 애플이 IBM과 손을 잡은 것은 큰 사건이었다. 하지만 애플이 인텔과 손을 잡는 것이 예전에 완전히 극과 극이었던 IBM과 손을 잡은 것보다 충격적인지는 모르겠다.
컴퓨터 업계가 그렇더라.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어제의 혁명군이 오늘의 악이 된다. 구글을 쓰면서 항상 걱정하는 것은, 그들이 기업을 공개하면서 말했던 '악이 되지 말자' 는 말을 과연 언제까지 지켜나갈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애플과 인텔의 CEO가 포옹하는 세상이다. 가능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