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기는 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가 7월에 열린 태터캠프에서 밖으로 나온 이야기는 '성선설'이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이 쓸 프로그램을 만드는 입장이라거나 서비스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성선설을 믿어야 합니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그 시점에서 TNF와 Needlworks, 텍스트큐브를 만들고 사용하는 사람들, 태터앤 컴퍼니와 다음 커뮤니케이션을 포함해서 모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의 전부였다. 저 한 문장만이라도 족했을 것이다.
성선/성악 어느쪽을 지지나느냐고 질문 받으면 그 어느쪽도 믿지 않는다고 답한다. 성선/성악/성무선악 모두 인간의 다양성과 거리가 있는 '본성'에 대한 물음이다. 선천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욕구를 대 보라면 인정욕과 성욕은 존재한다고 하겠지만, 본성론의 문제가 되면 할 말이 없다. 그래도 꼭 성선악중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 예를 들어 시험 문제에 객관식으로 나왔을 때 뭘 찍을거냐고 하면 그 때는 성악설을 찍을 것이다. 굳이 게임 이론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선천적인 욕구가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그 강도가 크다고 믿을 수록 행동은 악해지게 되어 있다. 올해 상반기에 읽은 책 중 '인간실험' 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책을 덮을 때가 되면, 성악설이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본성에 가까운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게 된다.
그렇지만 성선설을 믿어야 한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스스로의 필요에 더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프로그램을 짜기 시작한지 두 해가 되었다. 여러 사람들과 만났고 그 사람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 시간동안 항상 즐겁지는 않았다. 여러 일이 있었고, 즐거운 일 보다는 신경써야 하고 머리 아픈 일들이 많았다. 그래도 계속 무엇인가 하고 있는 이유는, 이 일에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행동도 목적이 없으면 지속될 수 없다. 그 어떤 단체도 철학이 없으면 지속될 수 없다. 마찬가지이다. TNF는 시작하면서 거창하고 무모한 철학을 내세웠고, 시간과 정열을 연료 삼아 현실로 끌어 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철학과 상충되는 부분들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역사를 보면 유명한 예들이 몇가지 있다. 가장 거창한 예들로는 탄광 파는 도구를 만들었다가 전쟁의 세대를 바꾸어버린 노벨과, 원자력 무기의 힘을 숫자로만 이해하고 있다가 실제 결과를 보고 인생의 후회를 한 아인슈타인이 있다. 거창하게 갈 것 없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
블로그를 만든다. 왜 만드는가?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세상,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접점을 형성하는 축, 소통 비용을 0에 가깝게 줄이기 위한 방법, 데이터의 소유권이 저자에게 있는 사회, 자본과 권력에 의하여 발언권이 제약받지 않는 사회. 그래서 '인생에 도움 하나 될 것 없는 일인데 참으로 생각 없이 열심이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태터툴즈를 만들고 텍스트큐브를 만든다.
역설적이다. 텍스트큐브를 이용해서 만든 수없이 많은 사이트들이 있다. 사이비 종교 사이트,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성인 변태 사이트 홍보 블로그, 스팸 발송 블로그, 사기용 대포 블로그, 원 저작자들의 댓글에 악플로 대응하는 저작물 불법 공유 블로그, 불법 펌로그, 원나잇 섹스 블로그, 보험사기 블로그. 가끔 스팸 필터링 연구를 하면서 사이트들을 찾아 다닌다. 관리 모드로 들어가는 단축키인 q를 누를때면 어김없이 맞아주는 로그인 화면. 그 코드를 스스로 짰다고 생각할 때 마다 한숨이 나온다. 한숨이 쌓이면 후회가 되고, 후회가 쌓이면 절망이 된다.
절망이 될 때쯤 지인에게 이 이야기를 하였다. 지인 왈 "그러면 아래아한글로 쓴 야설 파일이 돌아다니는 걸 보고 이찬진씨가 좌절해야 되냐?"
프로그램이 몇 년을 두고 끊임없이 수정되고 고쳐지는 원동력은 다양하다. 그런데 그 원동력 중의 하나가 스스로의 철학이라면, 이러한 부분은 코드를 공여하는 프로그램을 짜다 보면 언젠가 부딪게 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목표를 잃는 이러한 종류의 절망은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한 단어가 머릿속을 채우고 있다. 성선설을 믿어야 한다. 설령 스스로가 성악설이 더 신빙성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성선설을 믿어야 한다. 자신의 프로그램으로 행복해지는 사람이 더 많기를, 그 프로그램으로 사회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프로그램을 만들어 공유하고, 그걸 이용하는 사람은 그 프로그램을 통해 만나게 된다. 이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사용하는 사람이 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만이 더 행복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게 된다.
가끔 여러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할 기회들이 있다. 입을 열면 묻는다. "성선설을 믿으세요, 성악설을 믿으세요?" 자꾸 사람들에게 묻는 것은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는 방법인 듯도 하다. '성선설을 믿고 싶어요, 성악설을 믿고 싶어요?'
노벨은 생전의 마지막 도박으로 노벨 평화상을 남겼다. 아마도 우리 모두는 어떤 형태로든 선한 본성에 대한 희망을 안고 있다. 본성은 악하다고 믿으면서도 "에이 어떻게 사람이..." 같은 말이 무의식중에 나오는 것이 사람이다. 오늘 새벽에도 코드의 행간에 약간의 희망을 엮어 짜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