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을 의심할 수 없는 절대 명제로 삼고, 그 뒤의 생각들을 정리해 나갔다.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는 ‘존재’에 의미를 두고 있다. 크게 보면 철학자체가 존재에 대해 끊임없는 물음을 던지는 과정이다. 많은 관점들과 사상이 만들어졌다. 지금까지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계속 새로운 물음을 만들어내며 조금씩 답에 접근하려고 한다. 나는 가장 근본적인 부분인 존재에 대해 말을 하고자 한다. 17세기 이후의 철학에서의 존재라는 것은 공간 안에서 정의된다. 하이데거나 칸트처럼 존재의 위치를 공간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들의 관점도 근본적으로는 현실계 안에서 정의된다. 그리고 존재가 있는 현실계는 3차원공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의 방법이 전적으로 옳다고 볼 수는 없다. 인간은 현상계 안에 존재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현상계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가 꼭 존재라는 결정체만을 유도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의식체계는 기본적으로 3차원 안에서 정의되어있다. 감각기관은 3차원만을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은 3차원의 결정공간이 아닌 4차원의 위상공간이다. 한 축을 가정해보자. 지금 우리는 xyz축에 공간만을 대입해왔다. 그리고 시간 축은 보이지 않는 축으로 가정하고 있다. 생각을 약간 바꾸어보자. x축 자리에 시간을 대입하면, 위상공간에 대한 정의가 달라질 수 있다. 기본적으로 흐름이라고 가정하는 것들은 공간 축을 중심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시간축은 공간상에 느낄 수 있는 흐름을 만들어낸다. 냇가에 가보면, 우리가 흐름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냇가의 흐름에서 우리가 x축이라고 느끼는 부분을 시간 축으로 치환해보자. 그러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흐름의 모습과 비슷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상대성이론을 생각해보자.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는 모두 다른 시간대를 흘러간다. 신체의 구성요소인 전자들은 우리가 살아가며 느끼는 생활보다 세배정도 느린 시간대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전자들로 구성된 원자는 우리의 생활보다 두 배정도 느린 시간대안에 있다. 근본적으로 다른 시간대를 흐르는 구성요소들이 우리의 가시세계를 이룬다. 3차원으로 정의된 현실계의 관점으로 보면 각 구성요소는 같은 흐름 속에 있다. 시간을 중심으로 한 위상계의 시점에서는, 같은 흐름을 흐르는 요소는 하나도 없다.
우리가 ‘개인’이라고 인지하는 존재가 있다. 그러나 그 존재는 과연 개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개체화된 존재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수 있다. 단지 한 개체라고 느낀다고 해서, 인간을 개체로 인식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의 많은 관점들은 각기 다른 흐름들의 집합을 한 흐름으로 가정하고 그 위에 세워졌다. 그 가정을 일단 ‘경향성’으로 부르기로 하자. 여기서의 경향성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tendency보다는 inclination 에 가깝다.
내가 나라고 느끼는 것은 내 자신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을 흐르는 나의 구성요소들의 일정한 패턴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신정규’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매일 식사를 하고, 자라난다. 이미 있던 부분도 새롭게 대체된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도 나는 ‘나’ 이다. 그렇지만 나를 구성하는 분자는 전과는 완전히 바뀌어져있다.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보통 의심하지 않는다. 구성요소가 바뀌어도 나라는 전체가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어떠한 경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분자단위에서조차 바뀌는 것이 한 개체이고 개인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렵다. 심지어 숨쉬는 가운데에도 내 몸의 구성요소는 외부(라는 표현이 어울리지는 않지만)와 치환된다.
시간 축을 중심으로 보면 공간상에서 활동하고 어떠한 경향을 가진 모든 것들을 흐름(stream)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내가 움직이면,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그냥 활동이지만 시간 축을 중심으로 하면 공간상을 흐르는 어떠한 경향성이 된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면 위에서의 위상계의 개체에 대한 정의는 매우 포괄적이 된다. 정의자체는 '고정된 공간계 안을 흐르는, 구분이 힘든 흐름들의 집합'이 된다. 일단 인간계에 적용하기 위해 범위를 좁혀보자. 사실 비 생명체의 경우에는 당장 어떠한 패턴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시간 축을 중심으로 보아도 구성요소 자체가 다양하게 바뀌지는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명과 비 생명의 차이는 능동형-수동형의 관계라는 정의를 내릴 수도 있다.)
위상공간에서의 인간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경향성을 구성하는 패턴이 다른 흐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이는 인간이라고 부르는 경향성이 그 안에 넓게 불러서 ‘이성’이라고 말하는 복잡한 패턴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라는 개체도 하나의 흐름으로 간주할 수 있지만, 이성이라는 활동도 또한 하나의 흐름으로 떼어서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학문의 경우, 분명 인간이라는 경향성들 안의 이성이라는 패턴들이 모여 이루어 낸 결과물이다. 이 경우, 학문 자체도 시간의 범주에서 보았을 때는 하나의 흐름을 이룰 수 있다.) 보통의 생명에게서는 이러한 경우를 찾아볼 수가 없다.
윤리도 더 큰 인간이라는 흐름의 행동을 통제하는 일종의 흐름이다. 패턴을 끊임없이 재창조해나가는. 분명히 방향은 있다. 그러나 그 방향을 표현할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우리들이 우리들을 인간이라는 범주에 넣고 동일하게 서로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인간으로서의 일정한 경향성을 서로에게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향성에 영향을 주는 큰 요인중의 하나가 윤리이다. 본성론, 덕성론, 원리론, 연결론. 그런 이론들은 전부 인간의 경향성을 이루는 한가지 흐름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수가 없다. 인간이 흐르는 원리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런 흐름들의 조합을 윤리라는 형태로 구체화시켜 생각하는 것이지 윤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고정된 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