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중학교 시절 부터였던것 같다. 글쓰기는 언젠가부터 스트레스의 해소 수단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일기처럼 규칙적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주 힘들었다. 글쓰기가 스트레스가 아니게 된 것은 아마 처음 흑백 컴퓨터와 한글 2.5, 24핀 도트 프린터를 갖게 된 이후였다.
손으로 쓰지 않으면 글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 생각하는 방식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생각하는 속도에 맞추어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연필로 적어나가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글을 쓴다'는 생각을 할 때 귓가에 다다닥다다닥 소리가 들리는 사람들과, '사각사각' 소리가 들리는 사람들 사이에는 아마 글씨를 대하는 자세에 대한 차이가 존재할 것이다.
글을 쓰지만 보여주지 않는다.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는 혼자 쓰고 보관하는 글이 늘었다. 1학년 여름방학때 겪은 많은 일들이나 여행, 생활이 가져다 준 교훈이었다. 계속 크는 중이고, 몸이 크는 것보다 사고思考가 크는 속도가 더 빨랐고, 사고가 크는 속도보다 세상이 커지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글을 써도, 바로 일주일 후 글을 읽을 독자인 자신을 생각하면 글을 써서 보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자신만을 독자로 하는 글의 특징으로, 글이 엄청나게 어려워 진다. 어차피 독자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복잡한 개념이나 난해한 단어들이 어떠한 해석이나 수식 없이 쓰인다. 단어의 선택 뿐만이 아니라 다루는 개념 자체도 복잡해졌다. 당시에는 홈페이지를 운영했기 때문에, 가끔은 하나의 글을 원래 쓴 글과 쉽게 풀어쓴 글 두가지로 작성하여 후자쪽을 홈페이지에 올려 놓기도 했었다.
글이 일이 된다.
대학을 졸업할 때 즈음이 되어, 글을 쉽게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겼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글이야 말로 내용을 진정 이해하는 사람만이 쓸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여러가지로 다시 쓰였지만,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같다.) 이상한 결벽증에 이어 뭐든지 전력으로 끝장을 내자는 성격에 덧붙여 강박관념이라는 문제도 함께 가지고 있다.
쉽게 쓰는 것은 어렵다. 절대 쉬워질 수 없는 개념들이 있고, 설명을 위해서 기본적인 지식들을 한참 요구하는 단어들도 있다. 글쓰기가 일종의 강박이 되었고, 어떻게 하면 '더 쉽게 풀어서 다들 이해할 수 있게 쓸 수 있을까'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부분들을 배우게 되었다. 개념을 풀어서 생각하는 과정에서, 왜 내 말이 사람들에게 quantum jump를 하는 것 처럼 들리는지를 알게 되었다. 쉽게 말하는 법과 천천히 듣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대신 글 쓰는 것이 재미가 없어졌다. 글 쓰기가 처음 좋아진 이유가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쏟아낼 수 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그러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글을 삶으로 만든다.
역설적이게도, 쉬운 글을 쓰는 과정에서 글쓰기의 다른 점을 배웠다. 자신만을 독자로 하는 글-기록 만을 늘려가다 보면 글이 가질 수 있는 힘에 대한 부분을 잊게 된다. 세상에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무엇인가를 함께 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나누어야 하지만, 사람은 텔레파시를 할 줄 모른다. 복잡한 개념들과 그에 대응하는 단어들은 언어의 불완전함을 메꾸기 위한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어쩌면 정말 전달해야 할 본질은 훨씬 간단하게 적힐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비공개로 돌아가는 글이 더 많고, 어려운 글이 더 많고, 컴퓨터 안에서 거울처럼 남아 신정규의 역사의 그림자가 된 글들이 많지만, 이제 다른 자세로 활자를 대해볼 생각이다. 변화이기도 하고, 도전이기도 하지만 본질은 내가 크는 속도보다 훨씬 빨리 커지는 세상에게 더이상 싱글 CPU로 대항하지 못함을 배우기 때문이 아닐까.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듯이, 그런것이겠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