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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지났을까? 자고 있던 아가씨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어. 문을 열고 본 밖에는 오래전에 자신을 여기로 안내했던 선원이 있었지. 짐이라고 해도 챙길 것은 별로 없어서 아가씨는 적당히 갈무리 한 다음에 또 그 선원을 따라갔어. 이번에는 내릴 수 있겠구나 하는 작은 기대를 가지고 말야. 그런데 선원은 또 한 층을 내려가는 거야. 배 아래쪽은 수면과 아주 가깝지. 전에는 듣지 못했던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가씨는 조금은 무서웠어. 또 긴 복도가 나오고 선원은 한참을 걷다가 어느 문 앞에서 아가씨에게 새 방이라고 말했지. 2등 선실도 가득 차서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말야.

이번 방은 한 눈에 보기에도 썩 좋은 방은 아니었어. 창문은 얼굴이 다 안 들어갈 정도로 좁았어. 선원은 ‘배 밑과 가까워서 창문을 작게 만들어 사고가 크게 번지지 않도록 했다고 했지. 문과 벽은 한 뼘에 안 들어갈 정도로 두꺼웠어. 역시 배 밑이라 그렇게 만들었대. 선원이 설명을 끝내고 나간 후 아가씨는 정말 암담했지. 사실 돈 하나 안내고 배에 타고 있으면서 그 정도는 감사한 거 아냐?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위에서 잘 지내다 온 아가씨가 그런 생각이 들 리가 없지.

그래도 그럭저럭 그냥 지냈는데 아가씨 성격에 심심해서 잘 살수 있겠어? 사람들은 전부 방에 틀어박혀서 무얼 하는지 알 수도 없고, 식사는 방으로 배달되고, 마치 꼭 감옥 같았어. 무엇보다 싫은 것은 바다에 가까워서 나는 물소리였지. 위에서 들을 때는 그저 물살을 가르는 소리였지만 바로 옆에서 들으니 신경 거슬리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지. 아가씨는 그냥 조용히 노트를 보면서 생각을 하는 날이 많아졌어. 이제는 항구에 들어가도 방파제에 붙은 해초밖에 보이지 않지. 그렇지만 아가씨는 꽤 열중해 있어서 그런 것도 신경을 안 쓰는 듯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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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부터 아가씨는 꽤 바빠졌어. 이리저리 들어왔다 나갔다 하면서 복도 끝 즈음에 침대도 모으고 해서 무언가를 뚝딱뚝딱 묶어서 만드는 거야. 복도에 사는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지 덕분에 아가씨는 편하게 무언가를 만들 수 있었어. 도망가려고 만드는 배 치고는 너무 배 같지가 않고, 그렇다고 심심풀이로 만드는 것 치고는 오랫동안 열중해서 만들고 있네. 다른 사람은 잘 모르지만 우리는 보면 무엇인지 짐작은 할 수 있어. 아주 예전에 만들었던 위아래가 없는 배와 아주 비슷하게 생겼네. 하지만 이 배에 타고 있는 사람 누구도 그걸 알 수는 없겠지.

배 밑에 있을 때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하지? 하고 생각을 잠시 했는데 생각하니까 바로 사고가 나 버리는구나. 그렇다고 빙산하고 부딪쳐 버리거나 한 것은 아니고 그냥 우연찮게 한쪽 모서리가 쾅! 하고 바위와 만나버렸어. 배가 흔들거리고 사람들은 난리도 아니었지.

아가씨가 있는 3등 선실도 예외는 아니어서 모두들 빠져나가려고 복도를 가득 메우고 뛰어 다니네. 아가씨는 뭐가 그렇게 대수로운지 만들어 놓은 그 배를 방 안에 모셔놓고 그냥 가만히 있지. 사람들이 하도 많이 나와서 방문을 닫아 놓았는데, 문 밑으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어. 시끄럽던 밖은 사람들이 빠져나간 후 조용해졌고, 그제야 아가씨는 무릎까지 오는 물을 헤치고 복도를 따라 배를 끌고 나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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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는 배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렇지만 무단으로 배에 들어와서 그냥 나갈 수가 없어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첨벙첨벙 거리면서 계단을 한 층 올라 아가씨는 아주 예전에 눈에 익었던 그 복도를 따라 가서 문을 열었지. 문을 여니 그 곳엔 큰 풀장이 있네. 게다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예전에 자신이 탄 다음에 잠이 들어버린 그 보트까지 함께 있어 왜 이 곳으로 와서 사람들이 탈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가씨는 일단 자신이 만든 배를 끌고 보트로 헤엄쳐 가서 보트 앞의 갑판에 실었어. 그리고 밖을 보았지. 풀장과 풀장이 아닌 곳의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물이 차 있어서 아가씨는 얼른 배에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지.

보트를 운전해서 나가려고 핸들을 잡고서야 아가씨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눈치 챘지. 풀 밖으로 나가는 문이 잠겨 있는 거야. 아가씨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지만 어쩌겠어? 자신이 걸어온 복도는 벌써 물에 잠겨있거든. 일단 보트를 몰아 문에 박치기를 해서 어떻게 해 볼까 하고는 있지만 그렇게 쉽게는 되지 않을 것 같이 문은 단단하게만 보였어. 아가씨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크랭크를 잡아 당겼지. 어쨌든 이대로 있으면 배와 함께 가라앉을 것만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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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는 크르렁 소리를 내면서 속도를 내기 시작했지. 그런데 너무 갑자기 속도를 내기 시작해서 그만 보트가 조금 기울었어. 갑판에 얹어놓은 아가씨의 배가 기우뚱 하더니 주루루룩 미끄러지기 시작하네. 아가씨는 놀라서 키 핸들을 놓고 갑판 앞으로 뛰어가서 배를 잡았어. 아무도 잡는 사람이 없는 키는 유압장치도 되어있지 않은지 배의 균형에 따라 이리저리 돌아가기 시작했지. 간신히 떨어지려는 배를 잡아 갑판에 매었지만 아가씨는 시동이 끝까지 걸린 채로 방향 없이 이리저리 마구 달리는 보트 위에 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야 했어.

얼른 달려가서 키를 잡았지만 눈을 든 아가씨에게 보인 건 방향을 틀수도 없을 만큼 가까이 다가온 배의 벽이구나. 키를 꼭 잡고 눈을 딱 감자마자 보트가 풀장 벽면과 부딪는 쾅! 소리를 들었지. 정신이 든 아가씨는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발돋움을 하며 두리번거렸어. 벽을 따라 콕 찌그러진 보트 앞부분과 거기에 약간 휩쓸려간 자신의 찌그러진 배가 보였지. 아가씨는 한숨을 폭 쉬었어. 얼른 보트를 뒤로 뺀 다음 잠시 생각에 잠겼지.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는데 저 멀리 문 쪽을 보니 웬걸? 문이 열려 있는 거야. 아가씨는 반가워서 보트를 그 쪽으로 몰아갔어. 문을 넘어가면서 아가씨는 문 옆에 있는 자그마한 사다리 위에 한 사람이 서서 열심히 수동으로 문을 여는 손잡이를 돌리는 모습을 보았어. 이유는 모르지만 아가씨는 그 사람이 선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 그리고 배를 빠져 나오면서 아가씨는 너무나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지. 하지만 이미 배를 빠져 나온 아가씨에게 안쪽에서 손잡이를 돌리던 사람은 다시 보이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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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서 계속 멀어지면서 아가씨는 배를 바라보면서 돌아가서 확인하고 싶은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고개를 휘휘 저었지. 문으로 나오면서 언뜻 본 선장의 얼굴이 아주 예전에 헤어졌던 어떤 사람과 너무나 닮아 있었거든. 고개를 휘젓는 사이에 어느새 배는 저 멀리에서 자그마한 장난감처럼 보였어. 물 속으로 가라앉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가라앉던 배는 어느 정도에서 멈추더니 아주 느리지만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어. ‘응급처치를 하고 물을 빼기 시작하나보다’ 하고 아가씨는 생각했지 하지만 복도보다 물이 하는 속도가 더 빨랐을 테니까, 또 3등 선실 사람들의 게으름을 생각해 보았을 때 그 안에서 그대로 물에 잠겼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아가씨는 조금 우울해졌어.

그런데 아가씨가 저렇게 우울해 할 때가 아니지. 멀쩡한 보트이면 몰라도 앞부분이 많이 망가져서 물이 새고 있잖아. 핸들이 있는 뒤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겠지만 조금씩 보트는 속도가 느려지면서 가라앉고 있지. 아가씨는 약간 이상함을 느끼면서 품속에 안고 왔던 노트를 꺼냈어. 지금쯤 있을 위치를 보고 이야기로 들었던 곳들 중 가장 가까운 곳을 찾고 있지 그러다가 아가씨는 놀라버렸어 하필 그 위치가 아주 넓은 바다 한 가운데인거야 꼭 태평양 가운데의 하와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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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3 22:45 2004/10/23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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