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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아가씨가 본 것은 기다란 복도였어. 멀리 앞쪽으로는 계단이 보이고 옆으로는 이곳저곳으로 통로가 뻗어있지. 아가씨는 우선 복도를 따라 걸어갔어. 계단을 오르면서 아가씨는 자신이 지금 있는 곳이 커다란 배 안인걸 알았지. 창문이 전부 둥그렇게 생겼거든. 계단을 올라가자 또 긴 복도들이 있었지만 아가씨는 무시하고 계속 계단을 올랐어. 한 4층 정도를 올랐나봐. 밖이 보이는 문이 있었지.
아가씨는 문 밖으로 나갔어. 너무나 넓은 배 갑판 위였지. 하지만 이 곳에서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어. 대신 아가씨는 다른 걸 볼 수 있었대요. 배가 정박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바닷가를 떠나서 한참을 나가 있는 거야. 놀랐겠지? 이미 아가씨는 될 대로 되리라는 마음이었기 때문에 당황은 했지만 크게 놀라지는 않았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잖아.
바닷가 가까이어서 볼 수 있었던 갈매기도 조금씩 사라지고 배는 큰 바다로 나가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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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큰 배가 움직이는 데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을 했지. 휑하니 빈 갑판을 보고서는 다시 안으로 들어왔어. 좀 전에 그냥 지나쳐 온 복도들을 훑어볼 생각을 한거야. 아주 길고 방도 많아 보였으니까. 한 층을 내려와서 아가씨는 복도를 걸어가며 방 안을 들여다보았지.
첫 번째 방을 들여다보았는데, 역시 방 안에는 승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어. 반가워서 문을 열고 객실로 들어갈까 했지만 창문 너머로 보이는 승객이 너무나 피곤해 보여서 아가씨는 그만 문고리를 잡던 손을 놓았지. ‘그래 사람은 많을 테니.’ 하고 그 다음 방으로 종종걸음 쳐 걸어갔어. 그 방에도 승객이 있었지. 그런데 이 방의 승객은 자고 있었어. 자는 사람을 방해할 수 없으니까 아가씨는 그냥 지나쳐서 다음 방으로 걸어갔어.

그 층의 수많은 방들에 승객이 모두 타고 있는데 하나같이 할 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 없는 거야. 식사를 하고 있는 승객, 운동을 하고 있는 승객, 책을 보고 있는 승객, 자는 승객, 피곤해 보이는 승객, 우울해 보이는 승객. 모두 다 문을 열고 들어가 이것저것 물어보기에는 부담스러운 모습들이었어. 아가씨는 한참을 망설이다 복도를 돌아 계단으로 돌아갔지. 그리고는 다시 한 층을 내려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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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층을 내려간 그 곳에도 복도가 끝없이 뻗어 있었지. 아가씨는 복도를 둘러보기 시작했어. 방들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역시나 지친 사람들의 모습이 다가가기에는 부담스러워서 아가씨는 그냥 그 복도를 지나쳐 왔대요. 한 층을 더 내려가니 처음에는 지나치면서 알 수 없었지만 약간은 옹알옹알 거리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왁자지껄한 분위기도 드는 듯해서 그 복도로 발을 들여 놓았어.
위 층의 승객들하고는 다르게 아래층의 승객들은 문에 달린 창을 통해서만 보아도 꽤나 즐거워 보였지. 위에서 본 장면들 때문에 기운이 없이 축 처져있던 아가씨도 그런 모습을 보면서 조금은 즐거워졌어. 그렇게 복도를 돌아다니고 있을 때 복도 저쪽 끝에서 다른 사람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지. 아가씨는 순간 움찔했어. 멀리서 보아도 그 사람의 복장은 딱 경찰이 연상되는 그런 복장이었거든.
아가씨는 복도에 딱 붙박여서 서 있었지. 그 사람은 조금씩 다가왔어. 어느 정도 보일 만 할 때 그 사람은 아가씨를 보면서 인사를 했지. 꽤 딱딱한 투였어.
“승객이십니까 아가씨?”
아가씨는 우물쭈물하다 “아닌데요.” 하고 대답해버렸지. 그 사람은 별로 놀라는 모습도 보이지 않으면서 “그럼 불법으로 탑승하셨군요.” 우물우물 하더니 아가씨를 보면서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지. 아가씨는 죄를 지은 듯한 기분으로 그 사람의 뒤를 따라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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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의 뒤를 따라간 곳은 승무원 실이었지. 배가 아주아주 컸기 때문일까? 복도 끝에 붙은 승무원 실도 아주 컸어. 흰색 검정색 제복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자신의 일들을 하고 있었대요. 아가씨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을 정도로 바쁘게 보였어. 그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아가씨가 따라가던 제복을 입은 사람은 벌써 이 사람들의 무리에 섞이어서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가 없었지.
조금 지난 후에 흰 옷을 입은 선원이 아가씨에게 다가왔어 그러더니 아가씨를 데리고 들어왔던 복도로 도로 데리고 나갔지.
“불법으로 승선하셨으니 다음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 이 방에서 생활하세요.”
하면서 아가씨를 데리고 간 곳은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느껴지던 복도의 어느 한 방이었어. 아가씨를 그 방에 데려다 주고 선원은 나갔지.
선원이 나가자마자 아가씨는 먼저 문이 잠겼는지부터 확인했어. 도망 못 가게 잡아 놓기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문은 잠겨있지 않았지. 약간은 안도한 아가씨는 침대에 걸터앉았어. 그리고 걸터앉기가 무섭게 바로 옆으로 쓰려져서 잠들어 버리고 말았대요. 침대에서 잠을 자 본지 셀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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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부터 시작된 아가씨의 선내 생활은 별로 고된 것이 없었어. 무슨 잡일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식사할 때 되면 식사하고 그랬지. 제한이 하나 있다면 복도를 벗어날 수는 없는 정도였어. 하지만 아가씨는 금방 같은 복도에서 사는 사람들을 잘 알게 되었지. 그 복도에 있는 사람들은 아가씨처럼 할 일이 특별히 없는 사람들이었거든.
아가씨는 많은 이야기를 하며 사람들에 대해서 조금씩 알게 되었어. 모두들 배를 타게 된 이유가 달랐지. 그냥 처음부터 승객으로 탄 사람이 있었고, 또 아가씨처럼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어. 그러니 모두들 탄 곳도 달랐지. 도착하는 곳도 달랐어. 아가씨는 ‘이 항구 저 항구를 돌아가면서 사람들을 태우고 내려 주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어. 하나 신기하게 생각한 것은 세상이 팔각형으로 생겨 있는데 이 배는 지역에 관계없이 온갖 지역의 사람들을 다 태우고 다니고 있는 거야. 모서리를 통과할 때 그 폭포지대를 어떻게 통과했는지 궁금했지만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아가씨는 금방 잊어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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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3 22:43 2004/10/23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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