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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너무 부셔서 소녀는 눈을 바로 뜰 수가 없었어. 팔로 눈을 가리고 조금씩 배 밖으로 나갔지. 그리고 배에 걸터앉아서 눈이 햇빛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어. 두 사람이 옆에서 없어졌는데 소녀는 햇빛이 비치고 있으니 그냥 편하다고 느꼈지. 그냥 그렇게 아침 햇살을 맞으면서 기다렸어. 눈이 빛에 익숙해지고 소녀는 주위를 둘러보았지.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하나도 덥지 않은 것을 발견했어. 눈에 비친 광경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모습이지.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어. 주위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높은 지역인지 구름이 산 가운뎃부분에 낮게 드리워져 있지. 안개가 주위를 하얗게 덮고 있는데 그 모습이 지금까지 헤쳐 온 정글과 너무나 달라서 소녀는 넋을 잃고 말았어. 공기 속에 스며든 물이 소녀의 손에 느껴질 정도였지. 해가 조금씩 높이 뜨면서 약간씩 그런 기분은 사라졌지만 아주 조용했어. 수증기가 자신의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야. 소녀는 배에서 뛰어내렸어.
호수 한가운데라고 해도 소녀는 망설임이 없었지. 호수의 깊이가 발목을 조금 넘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거든. 배가 소녀에 비해서 크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깊이의 물을 떠내려 온 것도 신기해. 물이 찰랑 소리를 냈어. 소녀는 발에 닿는 물을 느낄 수 있었지. 차갑지만 시리지는 않은 물 바닥에는 작은 조약돌이 깔려 있지.
‘아 이 곳이 아저씨와 아이가 찾고 싶어 했던 그 강의 수원이구나......’
하지만 소녀는 울지 않았어. 그냥 잠깐 손을 물에 넣고 차가워 했을 뿐이지.
소녀는 안개사이로 천천히 호수를 걸어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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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는 정말 깨끗했지. 일렁임이 없으면 물이 없다고 착각할 정도였어. 게다가 신기하게도 깊이가 항상 똑같았어. 발목까지 오는 물을 물끄러미 보면서 소녀는 호수 위를 걸어갔지. 호수는 아주 컸어. 하지만 주위의 산이 너무나 높았기 때문에 그 꼭대기에는 얼음도 보였지. 호수는 작아보였어. 저기 아주 멀리 빙하가 내려오는 것도 보이지. 소녀는 계속 걸었지. 찾아야 할 것이 있었으니까.
물이 어디서 오는지 알고 싶었어. 그건 소녀의 목표는 아니었지만 소녀는 꼭 알아야 하겠다고 생각했지. 어쩌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목표가 없던 소녀가 유일하게 공유했던 목표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소녀는 발이 이끄는 대로 걸었어. 발끝에 아주 작지만 어디서인가 물이 와 닿는 것이 느껴졌거든. 잔잔하고 차가워 보여도 속은 움직이고 있으니까. -그것이 호수이든 소녀이든- 아주 작은 소녀이지만 가까이 가면 크게 보이지. 새가 한 마리 날아갔어. 그것 빼고는 소녀 주위에 살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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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에 물이 닿는 것을 느끼면서 소녀는 걸어갔지. 소녀는 물이 와닿는 느낌이 점점더 강해지는 것과 함께 차가워지기도 하는 것을 눈치 챘어. 어디에선가 물이 나오고 있을거야. 소녀는 계속 걸어갔지. 얼마나 걸어갔을까? 물에 발이 너무 오랫동안 담겨있어서 감각이 없어질 만큼 오래 있었어. 차가운 공기가 걸려서 소녀는 모자를 더 꾹 눌러썼지. 얼마나 갔을까. 어두워지고 다시 밝아지기를 세 번 정도 했을 거야. 소녀는 잠을 자지 않았어. 호수 중간이라 잠을 잘 수 없어서 그런 것만은 아냐. 그냥 잠이 오지 않은 거지. 밤이 되어도 어둡지 않아서 소녀는 계속 걸을 수 있었어. 산꼭대기들에 비치는 얼음이 달빛에 빛났거든.
아주 높은 산 속의 아주아주 큰 호수라는 건 말이야 언제나 달과 가까이 있을 수 있거든. 소녀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것을 느꼈지. 앞에 마주한 무게감이 너무나 컸어.
물이 나오는 곳 같은 것 아무 곳에도 없었어. 그냥 커다란 산이 있고 그 언저리는 물과 만나고 있었을 뿐이니까.
소녀는 산을 바라보았어. 눈앞에는 평평하지만 저기 멀리 보이는 어디인가 즈음에는 구름에 가려서 끝이 보이지 않는 산 너무나 큰 산이었고 그 산은 소녀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지. 소녀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어. 그냥 우두커니 서 있었지.
소녀는 손을 뻗었어. 눈앞에 펼쳐진 산의 끝자락을 잡았지. 하얀 산은 정말 차가웠어. 손끝에는 하얀 눈이 하나 가득 잡혔지. 소녀는 그걸 바라만 보고 있었어. 그리고 조금 지나 손 끝의 하얀 마음이 녹아내릴 때 그걸 바라보면서 우는 소녀의 안에서도 무언가가 하나 녹아내렸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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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고 소녀는 말했지.
왜 물은 어디에선가 나온다고 생각했을까 보이지도 않는 산 위에서 수만 년이 넘게 머물고 있다가 내려와서 그 자리에 있지 못하고 녹아버리는 어떤 것 왜 얘는 여기까지 와서 녹았지 하늘과 저렇게 가깝게 있을 수 있었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내려오게 되었을까?
왜 여기까지 내려왔나요? 높은 산에서 편하게 있지는 못했나요? 왜 하얗고 깨끗할 수 있는데 이곳에 내려와서 녹아버리고 물이 되어 다른 것들과 섞이고 더러운 것들과 같이 하나가 되어버리는 거죠?
소녀는 모자를 벗었어. 옆에 물에다가 조용히 놓았대요. 모자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느리게 흘러갔지. 하지만 소녀는 아주 느리지만 모자가 흘러가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어. 느낄 수도 없지만 그래서 잡을 수도 없을 만큼 느린. 소녀는 그제야 분명히 알았지.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말이야. 수많은 곳을 지나 그렇게 벌써 아이가 아닌 소녀로 이 곳에 와 버렸으니까.
소녀는 하얀 눈 위로 올라갔지. 더 이상 올라갈 수는 없지만 더 이상 물 위에 서있을 수도 없으니까. 발이 시렸겠지만 소녀는 상관하지 않았어. 며칠동안 쌓인 잠이 한 번에 몰려왔지. 아주 오랜 시간동안 그 곳에 있었던 눈은 안겨오는 소녀를 다치지 않게 받아 주었어.
그리고 두 번째 이야기는 시린 눈에 안겨 소녀가 잠들면서 끝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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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18 03:55 2004/01/18 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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