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2월에 쓴 글)
1999년 7월 17일 오후 3시 9분 27초 서울시 종로 길거리에서 김 모씨는 더워지는 날씨를 견딜 수가 없었다.
28℃의 열에 달구어진 6차선의 아스팔트와 데워진 2노트의 바람은 김 모씨를 미치게 했다. 너무 더워서 그는 셔츠를 훌렁 벗었다. 하지만, 더운 것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러닝셔츠까지 벗었지만 그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더위에 몸서리를 쳐야 했다. 길거리에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는 더위를 참을 수 없었다. 그대로 있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바지를 벗었다. 2mm두께의 청바지를 벗었으나 아직도 더웠다. 하늘의 태양은 끊임없이 그에게 빛을 부어주었으며, 오후의 후반부에 접어든 도로는 그야말로 열통이었다. 그는 팬티까지 모두 벗었다. 알몸이 되었어도 더위는 가셔지질 않았다.
그는 그런 모습으로 거리를 이리저리 헤매 다녔다. 종로사거리 근처 30m의 매점에서 그는 면도칼을 구입했다. 김 모씨는 칼날을 시멘트 바닥에 두드려 날만을 빼냈다. 그리고 4초 동안 들고 있더니, 칼날을 배꼽 좌측 2cm부분에 슬며시 찔러 넣었다. 5mm정도 칼날을 집어넣은 후, 김 모씨는 허리선을 따라 좌측으로 길게 칼날을 돌렸다. 옆구리 께를 지나, 등을 둘러서 오른쪽으로 돌아 나왔다. 8초 동안 정확히 한 바퀴를 돌린 그는 칼자국이 배 한바퀴를 두른 것을 확인하고는 양 옆구리를 잡았다. 그리고 아래로 끌어내려 살을 벗었다.
그날 저녁, 9시 뉴스에서는 특집기사로 김 모씨의 행위가 나왔다. 화면에는 온통 경악하고 있는 거리의 모습과 그 가운데를 유유히 걸어가는 그의 모습이 약간의 노이즈를 가진 테이프로 방영되었다. 사거리 5m안의 빌딩 8층에서 U.F.O. 나 외계인이 출현한 줄 알고 비디오카메라를 갖다댄 한 매니아의 결과물이었다. 같은 경악이 그 시간 전국 700만 가정으로 스며들어갔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 소식은 연합통신을 타고 전세계로 전해졌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그 뉴스는 그저 ‘여덟 쌍둥이를 출산했다’ 거나 ‘몸통이 세 개인 샴쌍둥이가 나왔다’는 정도로 취급되며, 신문 구석의 가십란에 'To believe or not' 정도의 타이틀과 함께 소개되었다.
다음날 새벽 1시 24분 경에 최 모씨는 애인의 배반으로 삶을 포기하려 했다. 평범한 방법으로 죽으면 단순 자살사건이 될 것 같고,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겠다는 신념으로, 그는 특별한 자살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전날 뉴스에서 접한 광경을 보고 그는 자신이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평소때 사용하던 면도기에서 날을 빼서 자신의 배에 찔러넣고 왼쪽으로 돌렸다. 접접이 만났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는 눈을 꼭 감고 옆구리를 잡은 다음 힘차게 아래로 내렸다. 약간의 피와 함께 아랫도리 가죽이 쑥 벗겨져 나왔다.
권 모씨는 계속되는 사업실패와 빚으로 부도를 맞았다. 새벽 2시 48분에 그는 할복자결을 결심하고 면도칼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관료사회에서 오랫동안 지내왔던 그로서는 깊이 찌를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날 회사를 정리하러 나간 거리에서 본 사람을 기억하고는, 약간만 찌른 다음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 칼을 그었다. 그런데 피가 나오지 않았다. 칼질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깊이 찌를 수는 없어서 그냥 등 쪽까지 한 바퀴를 돌려 그었다. 칼날의 끝이 정확히 칼질을 시작한 지점에 와 닿았을 때, 그리고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 그는 계속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 후에는 다시 자살할 운명이었지만
그날 새벽, 28명의 사람이 김 모씨와 같은 행동을 하고, 아래 가죽을 벗었다. 그리고 그 중 포함되었던 신문기자 한 명에 의해, 그 소식은 다음날의 뉴스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날 오후 중으로 사건은 공론화 되었다. 자신이 용기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한 번 해보겠다고 나섰고, 그들은 모두 성공했다. 성공 사례를 받는다고 기사를 내보낸 한 신문사에서는 하루종일 전화가 폭주했고, 그 때문에 업무를 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일어났다. 방송국, 잡지사 할 것 없이 취재로 바빴다. 처음 시도하고 방송에 나왔던 김 모씨의 집에는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집 문을 걸어 잠근 채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단순히 장난거리로만 취급하던 세계의 언론들도 이 ‘살바지’사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사건에 가장 먼저 이성적으로 접근한 인간들은 의학자들이었다. 자신들이 경구로 여기던 신념들이 깨진 것에 당혹해하며, 그들은 합당한 이유를 찾으려고 했다. 처음 사건이 일어난 날 뉴스 뒷머리에 “저건 말도 안되는 사기극”이라며 자신의 변을 담았던 한 노의학자는 의학계에서 엄청난 비판을 들은 후 스스로의 발언에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런 사건들 속에서 연구가 계속 진행되었지만 그들은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단지 피하지방과 근육의 부분 이탈에 관한 논문들이 일부 쏟아졌을 뿐이었다. 나머지는 무너지는 패러다임 속에서 그저 하나의 예외적인 현상으로 그 사건을 처리하고 싶어했다.
하나의 사실로 굳어진 ‘살바지’ 사건은 많은 사상자를 낳았다. 윗쪽으로 벗다가 피를 쏟고 사망한 사람, 팔목이나 다리만을 해 보려고 시도하다 병원신세를 지게된 사람들. 심지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이 아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리다 실패한 사람도 있었다. 정확한 조건이 지켜지지 않는 한, 실패의 가능성은 컸다.
지금까지 왜 그런 일이 보고되지 않았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한 사학자가 얻어냈다. 19c 이전까지는 면도날처럼 아주 작고 얇은 칼이 없었다는 동시에, 얕게 칼질을 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또, 할복이 많이 일어난 일본의 경우, 무사들은 거의가 다 오른손잡이이고, 그러므로 할복시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그어댔기 때문에 살아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부가된 이유였다.
이런 대담한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유학자들은 엄청난 반감을 드러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로 대표되는 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이 행위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고, TV에 비친 그들의 시뻘건 근육으로 된 아랫도리는 차라리 ‘인간 말종’으로 그들을 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교황청의 반응은 좀 달랐다. 인간이 육체에 구속받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준 한 예이자, 인간이 야훼의 뜻을 얼마나 많이 알지 못하고 지내 왔냐는 요지의 반응이었다.
일반 대중들은 시도하려고 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무서우니까.
7월 27일 5시, 텔레비전에 비친 한 가수가 대중의 의식을 바꾸어 놓았다. 아래 가죽을 벗은 채 노래를 부르는 인기 절정의 가수 조 모씨는 획기적이라는 반응을 얻어냈다. 아나운서의 ‘실패할 수도 있었는데 겁나거나 무섭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에 ‘자유의 상징을 위해서라면.’이란 대답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팬으로부터 시작된 ‘살바지 벗기 운동’은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10대들에게 급속도로 파급되었다. 학생들은 누구나 자유를 원했고, ‘살바지 벗기’가 그것을 가져다 줄 줄로 믿었다. 한 학급당 아랫가죽이 없는 인원수가 10명을 돌파하자, 교육부에서는 대책마련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다른 방향으로도 전개되고 있었다. 여행 가이드나 피서법을 다룬 책에서는 더위를 피하는 방법으로 ‘바지 벗기’를 제시했다. 바람이 ‘살랑살랑’불면 ‘아주’ 시원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시원했다. 피하지방이나 가죽의 보호가 없는 신경은 직접 바람을 맞을 수 있었으니까. 휴가철을 맞아 거리에서는 쉽게 아래가죽이 없는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전문적으로 시술을 하는 곳도 생겨났다. 실패해서 사망했을 경우, 보험에 가입해서 유가족에게 보상을 해준다는 말과 함께.
갑자기 모피가 잘 팔리기 시작했다. 동불 털가죽으로 만든 바지도 나와 개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바지벗듯’ 팔려나갔다. 심지어 자신의 가죽을 파는 사람들도 나왔다. 예쁜 살가죽을 사다가 입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일부 백화점 매장에서는 특별 코너를 신설해서 인간가죽 판매에 들어갔는데, 비싼 제품은 한 다리당 5억원을 호가했다. 아이들의 전래동화책에는 전에는 별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던 이야기가 꼭 들어가게 되었다. 호랑이 꼬리를 묶어놓고 이마에 칼집을 낸 다음 뒤에서 소리를 질러 호랑이가 알맹이만 빠져나간다는 내용이었다. 일부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집에서 애완동물을 가지고 실험을 하다가 동물을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김 모씨는 그런 생각이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특허권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이미 너무 널리 알려진 ‘바지 벗기’는 더 이상 특허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사업가들은 사람들을 샀다. 그리고 몸의 다른 부분을 벗겨내는 실험을 했다. 주로, 실직자나 소년소녀가장, 무의탁노인들이 그 대상이었다. 48218명의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이론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실험으로 해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얻어 낸 것이 없었다. 그저 발꿈치 끝 20mm는 잘라내도 된다는 것과 귀 끝 4mm룰 위에서 아래로 칼집낼 수 있다는 것 외에는.
유명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은 개성이 아니라는 선도용 방송이 제작되어 방영되었다. 사람들은 곧 추워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겨울바람을 맞기에는 시뻘건 아래는 너무 추워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한가지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한 번 벗은 살가죽은 다시 입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생명력을 잃은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보기 좋고 따뜻한 ‘거죽대용 바지’를 사야했고, 그해 겨울의 히트상품으로 예상되었다. 죄없는 물소나 밍크들은 그렇게 또 한번 죽음의 겨울을 맞이해야 했다.
그런 식으로 조금씩 사라졌다. 마치 6,70년대 단발, 장발머리나 쓸데없이 벌어진 나팔바지처럼. 유행같이.
바로 오늘까지는 말이다. 유행은 반복되는 법이다. 오늘 난 목둘레를 3mm깊이로, 30도 각도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칼집을 내서 얼굴과 머릿가죽을 벗는데 성공했다. 좀전에 기자들 44명이 몰려와 내 사진을 찍고 기사를 쓰러 달려갔다.
말이 되느냐고? 한번 해봐. 발견은 도전하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으니까.
2029년 7월 17일 7시 06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