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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사람은 자세히 보니 아이였어. 소녀보다도 나이가 작아 보이는 아이. 그런데 소녀를 보고서는 신나게 웃는 거야. 멀쓱해하는 소녀를 앞에 두고서 아이는 한참 웃다가 갑자기 웃는 것을 멈추었어. 실례라는 것을 깨달았던 거지 하지만 소녀 얼굴을 보면 안 웃기가 힘들지. 그렇지 않아도 안 어울리는 화장은 여름이라 줄줄 흘러내리지. 포항보다 더워서 나와 걷기도 힘든데도 온몸엔 안 어울리게 주렁주렁 무엇인가가 달려있지. 여기까지 소녀를 보면서 함께 오지 않았으면 나라도 아는 척도 안했을 것 같네.
키 큰 사람 -이 사람은 나이가 많은 것 같아- 이 점잖게 소녀에게 말했어.
“저, 그렇게 다니면 힘들지 않습니까? 지금 필요한 것은 화장품과 장신구가 아니라 맑은 물과 간편한 옷차림 같군요."
소녀는 화를 냈지. 처음 보는 사람이라서 인사해주러 왔더니 자신이 신경 좀 쓴 패션을 보고 보는 눈도 없으면서 뭐라고 그러잖아. 발끈해서 뒤도 안 돌아보고 다시 거리 반대편으로 뛰어갔어.
그날 밤 소녀는 잠을 잘 수가 없었지. 호텔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던 소녀는 뒤척이다가 잠을 깼어. 침대에서 일어나 세면대에 가서 세수를 했지. 거울에 비치는 소녀를 보면서 소녀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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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새벽에 소녀가 호텔에서 나오네. 옷은 예전에 이 곳에 도착할 때와 같이 입고 있어. 소녀는 뒤를 돌아보았지. 호텔이 있던 자리에 보이는 것은 그냥 평범한 여관일 뿐이야. 번화했던 거리, 사람으로 가득 차 있던 거리는 새벽의 적막이 내리 덮고 있지.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이상할 정도로 평범해 보였어. 아니 사실 그냥 평범할 뿐이지.
새벽공기의 미지근함을 친구삼아 소녀는 그 거리를 빠져나갔어. 버스정류장이 보였어. 소녀는 망설였지. 걸어서 가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아버렸으니까. 다시 걸을 수 있을까? 소녀는 자신에게 물었지. 하지만 누가 대답해 주겠어? 아무도 없고 우리 둘은 그저 보고 있을 수밖에 없으니.
망설이다 소녀는 주저앉아 버렸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까. 지금까지는 그런 것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이제 아이가 아니라 소녀이니까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사실 얼마 흐르지는 않았지만. 가만히 주저앉은 소녀가 눈물을 한 방울 두 방울 흘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조용히 말했지
“일어서요 추운데.” 하고.
소녀는 뒤를 돌아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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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본 자리엔 어제 보았던 그 사람들이 서 있었지. 이유는 모르지만 다른 곳에서 이 곳에 온 사람들. 소녀는 반가웠어. 하지만 알 수 없는 기분이겠지. 부끄러운 기분과 당황스런 기분이 반 정도씩 섞여 있는 거야. 어제의 일은 금방 잊혀지지 않고 지금의 상황은 자신과 바로 함께 있으니까. 어쨌든 소녀는 일어섰어. 다른 선택이 없었거든.
“어디로 가려고 그러나요?” 키 큰 사람이 물었어.
“어디로 갈 지 몰라요.” 소녀가 이야기 했지.
키 큰 사람은 소녀를 천천히 보았어. 그리고는 “혹시 여행자인가요?” 하고 물었지.
“네, 저는 여행을 하는 중이에요. 하지만 아직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라요.”
키 큰 사람과 키 작은 사람은 소녀를 보던 눈을 돌려 서로를 보았어. 둘은 한참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소녀에게 말했지. “저희는 여행자는 아니에요 탐험가이지요. 하지만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른다면 그 곳을 찾기 위해서 함께 가지 않겠어요?” 하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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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소녀는 그들과 함께 걷기 시작했어. 머리보다 커서 잘 맞지 않아 헐렁거리는 안전모자를 하나 눌러쓰고 말이야. 키 큰 사람 그러니까 ‘아저씨’ 하구 키 작은 사람 ‘아이’ 는 버스를 타지 않았어. 지금까지 소녀가 했던 것처럼 길을 찾지도 않았어.
“그럼 어떻게 해요?”
하고 소녀가 물었을 때 아이는 이야기했지.
“탐험가는 길을 따라가지 않아요. 하지만 탐험가가 간 곳은 길이 되지요."
더운 날씨의 열대 지방에서는 밀림속이 오히려 시원해. 아주 큰 나무들밖에 없는 곳에서는 그 아래까지 빛이 닿지도 않아. 소녀는 계속 입고 있던 옷을 입고 갈 수가 없을 정도로 추워했어. 그래서 옷을 바꾸어 입었지. 탐험용 옷은 주머니가 많아서 신기하기도 했지만 따뜻해서 좋았어. 예전에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 길이 있으면 길을 따라가면 되고 그러면 언젠가 여행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그 생각마저도 없을 때도 있었지만.) 그런데 길이 아닌 곳을 가게 되면서 소녀는 무언가 약간 불안해했어. 처음 트라벨라를 떠날 때와는 비슷하지만 다른 느낌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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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는데 이 사람들은 참 잘도 가는구나.’
소녀는 생각했지.
아저씨와 아이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정글 속을 막 헤쳐 나갔어. 소녀는 따라가면서도 불안해했지. 그냥 길을 따라 가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버스를 타고 편안하게- 하지만 요금을 낼 수도 없었으니 그건 힘들었을까? 갈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목적지가 없는데 어디로 갔어야 했을까? 그것조차 모르면서 바보 같아- 그렇게 위로해 가면서 그냥 계속 편하게 생각하려고 하면서 두 사람을 따라 가는 거야.
별의별 일이 다 있었지. 하루는 야영을 하고 깨서 슬리핑백에서 나왔는데, 전에 있던 도시에서 미련이 남아 가지고 온 보석 장신구들이 하나도 없는 거야. 으슬으슬한 아침공기 속에서 보석을 찾아 주위 숲을 돌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지.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숲 속에서 미아가 되어 버릴 뻔만 했어. 아저씨는 아마 반짝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원숭이들이 들고 갔을 거라고 이야기 했어.
“원숭이가 반짝거리는 것을 좋아해요?” “그럼. 원숭이는 보석이나 장신구 같은 것들을 좋아한단다. 이유 없이 좋아하고 때로는 그것 때문에 죽기도 하지.”
“그런데 어떻게 그것 때문에 죽게 되죠?” “사냥꾼들이 보석을 미끼로 원숭이를 잡거든. 잡히는 모습을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보면서도 원숭이들은 쉽게 집착을 버리지 못해.”
“그렇군요.” 하고 소녀는 말을 멈추었어. 그리고 장신구를 찾는 것을 그만두었지.
한번은 바닥이 질퍽거리는 늪을 지나가는데 앞의 아이를 따라 가다가 아래 발판으로 밟히는 돌멩이를 유심히 보아버렸어. 그것이 악어인 줄 알고서 소녀는 까무러칠 뻔 했지 아이는 비명을 지르려는 소녀의 입을 손으로 딱 막아버렸어. 그리고 손을 잡고 빨리 그 곳을 통과해 나왔지. 소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어떻게 그런 곳을 그렇게 지나 올 수 있었냐고 아이에게 따졌어. 아이는 웃었지.
“그 곳 나하고 같이 통과해 왔잖아. 나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그런 것이 무서워?”
“응 난 무서운데.”
“잘 생각해봐 길 위가 무서운지 악어머리 위를 지나가는 것이 무서운지.”
“당연히 길 위가 안 무섭지.”
“덩치만 큰 소녀야. 너 나보다 어리구나. 길 위가 덜 무섭다니.” 아이는 웃었어.
“그냥 가자 다음부터는 내가 미리 말해줄게.”
소녀는 그런 아이가 신기했지만 더 묻지는 않았지. 웃는 표정을 보고 가슴이 턱 막혀서 말을 할 수가 없었어. 웃는 표정이긴 했지만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