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arity

빚어내기/생각하기 | 2002/03/26 02:42 | inureyes
언젠가 기차를 탔는데, 다음과 같은 광고를 보았다.

"아날로그는 이제 그만/ 디지털 세상' 배경 그림으로는 증기기관차와 고속철도가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디지털 기술을 채용한 자사의 제품이 더 좋다는 광고였다.

컴퓨터가 널리 쓰이면서, 수많은 것들이 디지털로 만들어진다. 선형적인 저장방식인 아날로그 위에, 디지털은 '더 나은 기술'의 이미지와 함께 많은 것들의 위치를 대체해 나간다. 거무튀튀한 LP가 꽃혀있던 자리는 무지개처럼 빛나는 CD가 대신 차지하고 있고, 투박한 비디오 테이프는 어느새 납작하고 날씬한 DVD에게 자신의 땅을 내어주는 중이다.

아날로그에는 향수가 있다. 등등의 말들이 있다. 알 수는 없지만 아날로그 매체만이 가져다 주는 따스함이라던가 하는. 그런 것들은 논외로 하자. 지금 내가 가지고 가고 싶은 초점은 아날로그의 선형성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차이점은 아주 간단하다. 아날로그가 선형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디지털은 그 선형성을 작고 단순한 원소로 쪼개는 것이다. 단순한 원소 -디지털의 어원은 digit -al, 즉 숫자화이다-, 심지어 0과1 단 두개의 원소로 모든 조합을 표현하는 것이 디지털이다. 저장 정보의 속성이 단순하기 때문에, 손실이 없다. 선형매체로서의 아날로그의 약점을 디지털은 교묘하게 파고 든다.

세상에서 가장 싼 저장매체는 비디오테이프이다. 영상정보를 저장하는 비디오테이프는 디지털로 환산하면 몇백 기가바이트 단위의 정보가 저장된다. 물론 저장되는 정보가 디지털이 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같은 영상정보를 저장하는데, DVD의 8기가바이트의 용량과 비디오테이프의 몇백 기가바이트 단위의 용량의 결과물이 우리 눈에 차이가 나지 않을 수 있을까?

DVD의 데이터에는 선형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모든 디지털 매체의 공통점이다. 아날로그와 선형성으로 대표되는 세상을, 일종의 변환과정을 통해 디지털화 한다. 이 과정에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정보가 손실된다. -물론 우리의 오감으로는 눈치챌 수도 없을 정도로-

유리수의 그물이 있다. 유리수는 아무리 촘촘하게 채워넣어도 언제나 물이 샌다. 수의 개념은 내부에 구분을 담고 있다. 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대부분의 개념은 안에 양자화의 개념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언어는 가청영역에 있는 소리 안에서 일정한 부분만을 잡아 특성화시킨 소리이다.

음악은 언어가 전달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전달할 수 있다. 언어이기 때문에 가질 수 밖에 없는 디지털적인 성격 -절제성-을 넘어 더 넓은 아날로그의 영역에 더 많은 의미를 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룸메이트의 대화명처럼, '음악은 언어가 더 나아갈 수 없는 곳에서 날개를 펴고 날아오른다'

그리고 음악도 인간에 의해 양자화된 개념의 하나이다. 알게모르게, 우리가 아날로그라고 믿고 있는 많은 것들 안의 선형성은 그 안에 개념화를 통한 디지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럴 수 밖에 없다. 인간은 모든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예전 캠핑을 갔을 때 아침 숲속에서 자다가 일어난 눈에 보였던 햇빛과 나무들과 바람들을 떠올리면 꼭 그런것만은 아니지만:) 글로 쓰면 '짹짹' 인 새소리인데, 실제로는 전혀 글로 옮길 수 없다. 인간의 안에서 절제성을 가지지만 세상에 원래부터 그렇게 만들어 진 것은 없는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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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26 02:42 2002/03/26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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