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집에서 물고기들을 키우게 되었다. 어릴적엔 물고기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학급에서도 어항을 담당하면서 지금은 중학교가 되어버린 공터에 가서 장구애비들을 잡곤 했다. 부모님께서 보다 못해서 멋진 어항을 하나 사 오셨다. 깊이가 어느정도 되는 그 어항은 크고 신기했고, 재미있었다.
어항 관리는 상당한 신경을 요하는 일이다. 작지만 그 안에서 생명 순환이 일어나기 때문에 언제 균형이 깨질지 알 수 없다. 물고기 몇 마리와 수초 정도라면 물 갈고 먹이를 주는 것이 대부분의 일이 된다. 하지만 어항에 들어가는 어종 수가 늘고 식물 수가 늘수록 균형은 깨지기 쉬워진다. 물론 재미있는 점도 있는데, 균형을 잘 잡아 놓으면 어느 순간부터 어항 안이 굉장히 차분해진다. 너무 복잡해도 균형이 생겨나는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집에서 키우는 어항은 열대어 어항이었다. 열대어들은 수온에 민감해서 어항 안에 히터를 달아 온도를 유지한다. 어느정도 따뜻해지고 환경이 안정되면 다양한 물고기들을 키울 수 있다. 상성이 안좋은 물고기들이 함께 어항에 들어가 있으면 여러 문제가 생긴다. 우여곡절끝에 어항 안이 안정되면 새끼 물고기들이 태어난다. 가만히 놓아두면 어미들이 새끼를 잡아 먹기 때문에, 산란통을 만들어 배가 볼록한 물고기들을 그 안에 넣어 둔다. 그러면 알이 가라앉아 어미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필터 아래로 들어간다. 그렇게 고기 수가 늘어난다.
고기수가 늘어나고 어항 안이 따뜻해지면 어항 벽에 녹조가 생긴다. 어항 속의 생태계는 한 번 안정화되면 워낙 빠르게 발전한다. 잠시 넋을 놓고 있으면 금방 어항 벽이 새파래진다. 이를 처리하는 여러 방법이 있다 내벽을 닦는 방법이 있고, 약을 쓰는 방법도 있다. 어항 벽에 붙은 녹조를 좋아하는 물고기도 넣을 수 있다. 그런데 녹조를 좋아하는 물고기가 아무리 많은 식사를 해도, 어마어마한 성장 속도를 따라 잡을 수는 없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어항에 다슬기를 넣는 방법이었다. 어항 벽을 타고 다니며 녹조를 먹으며 자라는 다슬기는 효율도 좋을테고, 약이나 청소등의 외부로부터의 간섭이 없는 생태계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을테다. 다슬기를 구해 와서 어항 안에 넣았다. 어항 벽은 금새 깨끗해졌다. 다시금 어항은 안정되었다. 안정된 것 처럼 보였다.
어항 관리 초기에 생태계의 불안정성을 걱정했다면, 이때 즈음에는 생태계의 안정성을 너무 과신했었다.
다슬기는 잘 자란다. 모든 생물이 그렇듯, 다슬기도 번식한다. 상대적으로 엄청난 속도로 번식한다. 다슬기는 어느새 어항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천천히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열대어는 크기가 작기 때문에 다슬기를 공격하거나 알을 잡아먹지 않았다. 천적이 없는 다슬기는 한 순간에 수십배가 불어났다. 어항안의 생태계는 너무도 쉽게 깨졌다. 수초는 죽었고, 여과 장치는 제 역할을 아무리 해도 생태계의 폭주를 감당할 수 없었다. 잠시 지켜보았을 뿐인데, 어항은 아기자기한 생태계 모형에서 순식간에 물고기들의 지옥이 되었다.
아마도 다슬기 개체 수를 강제로 조절했어야 했을 것이다. 다슬기를 들여올 때 기생충이나 세균은 혹 없는지 방역도 했어야 했다. 무엇이 원인이었든, 그 경험은 어린 기억속에 상처와 깨달음을 남기고 끝났다. 이후 어항에 흥미를 잃어버렸고, 곧 어항을 정리하였다. 어항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그 이전처럼 편할 수 없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세계의 영원성에 대하여 끊임없는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은 아마 그 때 부터였을 것이다. 스스로가 어항속의 물고기가 된 듯 하고, 끝없이 답답하였다. 그때의 고민은 유리같은 세상에서 반석같은 규칙을 찾기 원하는 이유의 조각 하나가 되어 여전히 아프게 박혀있다. 인생은 우연하게 그 동력을 얻게 되고, 그 방향은 사건들 속에서 필연적으로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