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주의의 발전과 미래
- 미래 한국 사회의 복잡성 증대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민주주의에 관하여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그 본고장인 유럽에서도, 한국에 민주주의를 전파한 미국에서도 볼 수 없는 특징적인 면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면은 한국 민주주의의 이행 속도와 한국 민주주의를 유도한 주체 양면에서 비롯한다.
수많은 사설들이 있지만 그러한 점들을 과감히 생략하고 결론만을 유도한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애초 민주주의가 바탕한 이론적 가정에 가장 부합하는 실제 모델이다. 따라서 구조의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현재 발생하고 있는 수많은 문제의 본질을 판단하기는 쉽다. 역사 준동의 주체가 누구이냐에 대한 논쟁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만은 그러한 주체가 사회를 구성하는 민중 자체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으며, 그 결과는 민주주의로의 역사적 이행이 시작된 20세기 중반 이후 50여년 만에 실질적 민주주의를 주장할 수 있는 사회 주체와 기존의 사회 주체간의 대등한 갈등 양상을 보이는 정도로까지 발전하였다.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 단계에서 아와 비아를 확연히 구분하는 시대가 지나가고, 그 결과가 기존의 기준과 관념들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한 논쟁은 당연히 발생하게 되는 일이며, 논쟁 자체는 민주주의의 발전에 저해요소가 될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한국 사회에서 그러한 논쟁의 주체들이 자신을 정의하는 방법이 아직까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논쟁의 각 주체들은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검증받을 권리와 의무가 있다. 이러한 과정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및 의무를 쉽게 넘어가기 위해 각 주체들이 자신의 범위를 과대 해석하는 경향이 목격된다. 금년 들어 부쩍 사용 빈도가 높아진 '서민' 이라는 말은 그 자체에 계층적 의미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의견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쉽게 사용된다. 그러한 언어가 지칭하는 대상인 시민들에게는 전혀 사용에 대한 합의를 얻지 못한 채이다.
이는 토론의 주체를 왜곡시켜서 올바른 의견 수렴을 방해한다. 주장의 객체는 따로 있음에 반하여 그 주체가 같음을 내세우는 것은 토론의 성립을 원칙적으로 가로막는다. 서로의 주장의 근거가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각 주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또는 정체성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원래의 정체성을 무시하고 그 부분을 왜곡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자신의 정당성을 대중의 의지에서 찾는 현상은 한국 민주주의의 논점들 위에 서있는 모든 객체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각 객체들에게는 모두 이를 주장하는 정당성이 있다. 최근 유행하는 좌우대립 구도의 경우, 주장하는 바는 전통적인 좌파와 우파의 대립 양상과 유사하나, 두 파 모두 자신들의 주장의 정당성을 민의에서 찾는다. 반대로 말하면 양쪽 모두 자신의 주장 추진의 근거를 '민의' 에서밖에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민주주의 사상이 대의 민주주의로 구현되면서 대의의 주체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대의 민주주의 사상에서 각각의 집단은 민의를 모두 반영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주체는 이익집단이다. 그 이익집단들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설득하기 위하여 다른 구성원들의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한다. 여기에는 각각의 집단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유지하기 위한 사상이 있으며, 그 사상은 이상적이고 이론적이어야 한다는 점이 잇다. 천부인권 사상에 기반한 근대 민주주의를 주장한 루소및 당시의 사상가들의 경우나, 공산주의를 주장한 마르크스의 경우, 각자의 지향점은 자신들의 사상에 있었으며, 그 사상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사회 구성원의 자유권과 평등권을 동시에 보장하기 위한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 민주주의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이상을 구성원에의 설득으로 전파하고 실현하기 보다는 구성원들이 가장 원하는 방향으로 따라가야 한다는 기계적 다수결의 원리로 움직이고 있다. 이른바 객체와 주체의 전도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순수하게 기계적 다수결의 원리로 움직이는 것이라면 초기 민주주의의 방법과 비슷하다는 면에서 장점이라도 찾을 수가 있으나, 현재의 한국 민주주의의 모든 객체들은 기계적 다수결의 원리 논거 아래, 그러한 다수결의 결과를 완전히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는 적용하는 대상이나 자의적 해석의 주체 모두에 걸쳐 범위를 가리지 않고 일어난다. 이것이 현재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이며, 그 본질이다.
본질을 파악하기 쉬운 만큼이나, 그 결과도 쉽게 알 수 있다. 민주주의의 발전 단계를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다원주의를 동시에 이야기하게 된다. 현재 일어나는 위의 문제들은 진정한 다원주의가 도입되는 징후로 볼 수 있다. 자신들의 의견을 지상으로 삼는 것이 갈수록 힘들어지기 때문에 권위를 빌려오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천재지변이나 전쟁과 같은 커다란 문제가 없는 한 한국의 민주주의는 현재의 모든 집단들이 아닌 수없이 더 많은 집단들이 생길 것이며, 이는 현재의 민주주의 주체들이 갖는 문제점 또한 압도적인 복잡함으로 덮어버릴 것이다. 하나의 주장에 대하여 수없이 많은 의견들이 비슷한 무게를 가지고 제시될 것이며, 현재의 정당들, 이익단체들, 노동단체들, 이념단체들은 모두가 그 기득권의 무게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실로 하나의 사상의 태동과 변화를 교과서적으로 보여준 하나의 모델이 될 것이다. 그러한 복잡한 구조의 사회가 바로 앞에 있다. 위의 변화가 적어도 인류라는 기준 아래서 더 나은 방향으로 흐를 수 있는것처럼 보인다는 점 때문에 기대하고 있지만 그 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나 알고 있는 것은, 진정한 주체가 그들이 만든 사회를 움직여 나가는 시대가 오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 아둥바둥하며 자신들을 많게든 적게든 시민의 대표로 참칭하는 모든 단체들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