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봉,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한길사, 2003.

독서일 20030505~20030507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서평

선물해준 책 잘 읽었습니다. 여러가지 생각의 나비들을 붙잡아놓고 어떤 방법으로 표현을 해야할까 생각하다가, 편지글에 대한 서평으로는 편지글을 쓰는 것이 어떨까 해서 이렇게 글을 적고 있습니다.

이틀동안 마치 장마인것 마냥 그렇게도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하루종일 날이 환합니다. 비가 와도 즐거웠지만 계속 비가 오던 날 중 하루 정도는 날씨가 좋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생각은 아무리 해보아도 뜻대로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날씨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일들이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복잡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어도 마치 날씨처럼 그 주체인 우리들에게는 때로는 맑은 인생으로, 때로는 흐린 인생으로 다가옵니다.

김상봉씨는 책에서 그리스 비극을 '자존으로 대항하는 흐린 인생에의 저항' 으로 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공통 분모인 죽음 앞에서의 군중적 동일을 만나게 됨을 이야기합니다. 즐거운 책입니다. 편지의 문장들은 자신의 영역 안에서 잘 맞물려 있습니다. 작가가 자신의 문장 뒤에 숨지 않고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점이 독자를 행복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책을 읽으며 언제나 편안한 속도를 유지하기 힘들게 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리스 비극은 아주 오래 전부터 비평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저자는 그리스 비극의 위대함을 여러가지 상에 투영합니다. 당시의 민주주의 사회와 자유를 위하는 사상과 호메로스라는 인물의 특이함과 그 예술형식을 받아들이는 시민들 그 모두로 만들어진 상자 안에 그리스 비극을 집어넣습니다. 그리고는 때로는 상자의 이쪽 면에서, 때로는 상자의 저쪽면에서 그리스 비극을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김상봉씨가 그리스 비극을 바라보는 그 '모든 시각'에서 원래 주어질 수 있는 몫의 의미보다 약간씩 앞서 나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예술작품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감상자의 몫으로 남습니다. 그런데 나운규의 '아리랑'을 보고서 어느 이는 나라잃은 슬픔을 민중들과 공유하는 비극으로 말하고, 어느 이는 일본으로 향하는 화살을 교묘히 돌리고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여 민중들을 바보로 만드려는 시도라고 말합니다. 어느 주장이 옳은지는 작품을 감상하는 주체가 판단하게 됩니다. 저자는 예전의 역사학자들과 같이 확실히 그리스 비극을 긍정하는 입장에 서서 그 성채를 지키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집필하면서 그리스 비극의 긍정을 통하여 시대정신을 조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자가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서 싫어하는' TV드라마처럼, 그리스 비극도 조금 떨어져서 보면 당시의 TV드라마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이는 플라톤이 당시의 그리스 비극에 대해서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점을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이상국가의 개념에 시인을 집어넣지 않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눈에는 당시의 비극은 어느 의미에서 당시의 시민들을 우매하게 만드는 도구로 보였던 것입니다. 물론, 플라톤이 모방론적 관점에서 예술을 낮게 보고 있는 철학자이기는 합니다만, 반면에 그가 모방론적 관점뿐만이 아니라 도구론적 관점을 함께 가지고 있는 철학자였음을 생각해 봅니다. 당시의 비극은 도구로서의 예술의 범주에도 쉽게 낄 수 없었던 것이 아닐지, 왜 그런 것일지 떠올려 봅시다.

당시의 시민들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시민들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자유를 추구하는 모습과 함께 그것을 비극을 통하여 경계하였다고 합니다. 수많은 몇몇 역사학자들이 말한대로 그리스는 자유로운 시민 공동체이며 그리스 비극이 그러한 시대정신 속에서 발생해 유지되었던 것일까요? 그리스는 역사에서 그렇게 오랜 기간동안 두각을 나타낸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최초일지는 몰라도, 최장은 아니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중우정치라는 말을 낳았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자유는 집단의 방종이 되어 정의인들과 철학자들을 처단했습니다. 자신의 노동의 댓가로 얻은 자유가 아니라 천부인권으로 주어질수 없는 특권을 이용하여 노동없이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비극을 보면서 자유에의 의지와 합리적인 세계인식을 얻었다고 할 수 있을지요. 당시의 그리스 시민들이 비극에서 얻어낸 것이 요새 40대의 아저씨들이 주말마다 태조왕건과 무인시대에 열광하는 이유와 본질적으로 정말 다른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영웅적 구조, 비극에 휘말리는 주인공들, 죽음 앞에서 반동인물로서의 타자를 동등한 범위로 끌어들여 이해하는 모습들과 운명에 거역하는 인물. 대본만 놓고 보면 그리스 비극의 요소들은 그대로 지금의 마초드라마들의 모습에 이어집니다. 심지어 대사의 비현실성과 그 추상성까지도 말입니다.

위의 지적에 이어서, 저자가 현대 예술의 일부에 대하여 비판하는 부분이 타당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와이키키브라더스'를 좋아했다가 자기연민에 다름 아니라 싫어졌다고 하는 저자는 정말로 그 대안이 비극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와이키키브라더스' 가 자신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에 싫어진다면 비극이 사람들에게 작용하는 방법인 작중 인물과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깁니다. 비극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비극은 자신을 주인공에 대입하여 그 고통에 동참하고, 자신이 그 상황이 아니라는 점에서 자기연민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합니다. 이 과정을 찬찬히 생각해 보면, 비극의 주인공에 자신을 대입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결국 비극 또한 자기연민의 수순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철학자들이 세상을 관조하는 방법에 대하여 비판합니다. 저도 별로 좋아하는 철학자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니체씨 죄송합니다.)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철학이 철학자를 구원해야 하는가에 대한 점은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세계관을 자신 안에서 인정하는 철학자는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이해가 세상과의 무조건적인 타협을 불러오지는 않습니다. 니체의 고통에 대한 무한한 긍정은 그의 저서들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는 순간순간의 삶이 끝일 수 없음을 끊임없이 시인합니다. 생존에의 의지를 내세우며 끊임없이 삶과 투쟁해야 함을 주장합니다.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의 비극에 대한 약간의 고찰이 어떻게 니체 철학의 총체와 연결되어서 그 철학자 자체의 사상을 왜곡시키게 되는 것인지, 니체를 좋아하지 않는 저로서도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동경에 바탕을 두고 있는 서사시를 동경에 바탕을 둘 수 없는 비극과 연관 지어 이야기한 것만큼 말입니다.

지난 주에 신파극을 보았습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홍도야 우지 마라- 로 유명한 신파극입니다. 비극적인 사랑~ 이라고 하지만, 비극은 개인의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극을 보는 동안 울어야 할 장면에서 친구와 함께 자꾸 웃었습니다. 대사의 어투와 액센트가 예전에 잠시 유명했던 영화 '다찌마와 리'의 그것을 연상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 비극을 읽었지만 내가 받아들인 비극의 내용이 아주 오래 전의 그리스인들이 받아들인 내용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비단 저 뿐만이 아니라, 현대에서 기표만을 가지고 판단할 수 밖에 없는 모든 사람들은 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15세기 라신느의 '페드르'처럼 그리스 비극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도 있었고, 현대극 '신 오이디푸스'처럼 완전히 뒤집힌 관점에서 비극을 관찰하는 연극인도 있습니다. 어떤 글을 쓸 때, 대상을 어느 상자 안에 넣고 관찰하는지에 대한 것은 관찰자의 의지입니다. 하이젠베르크Heisenberg가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를 이야기하면서 모든 관찰자는 관찰대상과 함께 묶이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비극에 대한 김상봉씨의 편지는 독서인에게 즐거운 모험입니다. 그렇지만 편지 이상으로 받아들일 많은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매력적이면서도 무서울 수 있는 책이 아닐까 합니다. 이 책이 김상봉씨의 철학에 의해 제련된 새로운 칼임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련하기 전의 재료가 숟가락일지 냄비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시대가 원하는 모습으로, 원한다고 생각하는 모습으로 제련해 내는 것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철학자가 해야 할 의무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무를 이렇게 아름답게 빚어낼 수 있었다는 것에 감탄합니다. 그렇지만 그 칼의 광택은 칼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원래부터 그 칼만이 존재했던 것처럼 생각하게 합니다. 저자도 그 점을 생각했던 듯 합니다. 처음 들어가는 글에서 저자는 이 책이 자신의 철학에 의해 재구성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깊이 이해한다면, 이 책을 읽는 시간은 정말 즐거운 대화의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점심때 즈음 지하철 안에서 적기 시작했는데,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 보니 벌써 늦은 밤이 되었습니다. 마음이 급해도 언제나 느긋하게 관조할 수 있게 해달라고 바래보지만, 역시 그렇게까지는 무리겠죠?

그럼 행복하시길^^.

오월 어버이날
대학생 네 번째 해에 정규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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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5/09 03:20 2003/05/09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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