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생각하게 해주는 영화는 많다. 사랑의 아름다움, 생의 소망, 우정 등등, 수작이라고 불리는 많은 작품들이 평소에는 잊기 쉽지만 인간에게 보편적인 어떤 것을 다루고 있다. 반면에, 블록버스터라고 불리는 작품들이 있다. 이름 그대로, 엄청난 돈을 들여 엄청난 돈을 거두는 영화들이고, 그러기 위해 재미를 주로 추구하는 영화이다. 많은 사람들이 블록버스터를 재미있게 본다. 그리고서는 “저런 영화는 역시……” 하면서 마치 자신은 다른 영화를 보고 감동 받는다는 듯한 말투로 자신이 감상한 작품을 폄하한다.
사실, 블록버스터는 많은 연령층과 계층을 대상으로 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주제 또한 보편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권선징악을 주제로 많이 삼고, 사랑 같은 보편적인 감정에 많이 기댄다. 너무 보편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블록버스터를 낮은 차원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조금만 찾아보면 블록버스터이건, 예술영화라고 불리는 영화들이건, 근본적으로는 같은 주제에 대해 같은 말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이기에 가지는 보편적인 생각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전에 친구 한 명과 밤 11시 30분 표를 끊어서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영화를 본 시간보다 더 오랫동안 영화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고질라’. 전형적인 블록버스터이다. 흥행에는 그리 성공하지 못한, 게다가 포스터 슬로건으로 “Size does matter”이라는 유치한 문구를 내세웠었다. 하지만, ‘고질라’ 는 오랫동안 생각해보게 해주는 충분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시작화면은 한 무인도를 비추면서 시작된다. 한 마리의 이구아나. 핵실험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구아나는 나중에 선원의 말을 빌려 “고질라” 란 이름을 갖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 잊어버리기 쉬운 것은, ‘고질라’라고 불리는 거대한 괴물이, 결국 가만히 보면 그냥 커다란 이구아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단순한 크기차이. 구멍가게가 백화점 만해진다고 내용물까지 백화점을 닮아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영화 안의 사람들이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나 그것을 잊어버린다. 흉포한 행동. 또 계속되는 파괴. 그건 단지 인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의 파괴에 불과하다. 영화는 철저하게 인간의 시점에서 모든 것을 촬영한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고질라’라는 이구아나의 행동을 더 잘 보이게 해준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에 대해 착각을 하고 산다. 대부분의 착각들은 모두가 저마다 가지고 있는 관점의 차이에서 나온다. 실제로는 한가지이지만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을 하고, 자신의 해석에 확신을 가진다. 각자의 해석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남의 해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의 관점으로 볼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인간의 시점에서 본 고질라의 모습은 아주 단순하다. 자신들이 사는 곳을 부서뜨리고 위협을 가하는 존재. 자신들이 키우는 애완동물(그 중에는 이구아나도 있을 것이다)은 하나의 인격체로까지 대하면서 막상 큰 이구아나는 자신들의 애완동물과는 하나도 같은 점을 발견할 수 없다는 듯한 태도로 일관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대처하는 방법에서, 은연중에 고질라도 하나의 평범한 생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많은 생선으로 고질라를 유인하기도 하고, 왜 이렇게 먼 곳까지 왔을까 하는 생각을 회귀본능에 맞추어 생각하기도 한다.
무의식가운데서도 자신들이 “괴물”을 생물이라는 관점으로 생각해버리는 사람은 속으로는 자신들과 같은 생물이라고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그 점을 존중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들의 피해를 이유로 고질라에 대한 생존권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살려보내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우선, 먼저 죽여서 피해를 줄이고 나서 다른 것을 생각하자는 태도가 짙게 배어나온다.
하지만 그 안에서 인간의 두려움을 읽을 수 있다. 작품 내에서 인간은 많은 방법으로 고질라를 죽이려고 시도해본다. 그리고 한 과정을 끝낸 다음 약간은 느긋해진 태도를 보이면서 역시- 하는 태도로 자신에게 만족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고질라는 죽지 않고 살아난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공포가 찾아온다. 영화는 생존의 흐름을 타고 진행된다. 죽거나 죽지 않거나 하는, 두 가지 종의 생존 문제로 흐르는 영화. 그리고 고질라는 번식을 시도한다. 천적이 없는 인간에게 엄청난 천적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고질라의 새끼들.(흡사 영화 ‘jurassic park’의 티라노 새끼나 raptor같이 생겼다.) 저항을 위한 무기들도 소용이 없다. 인간이 만들어낸 도구라는 이름의 팔은 고질라에게는 허무하게 보일 뿐이다. 새끼들은 우습게 총알을 피하고, 고질라는 헬기를 이용한 미사일 공격이나 물 속에서의 어뢰공격도 피해낸다. 생존을 위한 본능의 싸움. 여기에 이 작품의 최대의 아이러니가 있다. 인간이 생존까지 걱정해가며 싸우게 되는 종이 인간의 창조물(창조물 보다는 죄의 대가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이라는 점이다. 프랑켄슈타인이나 터미네이터에서의 적은 인간이 어느 정도의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냈고, 그 과정에서 고칠 수도 있었던 실수로 인해 인간이 당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영화 ‘고질라’에서는 종의 변이는 우발적으로 일어난다. 인간이 언제나 해 왔기에 가장 경시하기 쉬운 ‘자연파괴’의 방법에 의해서 말이다. 이런 점을 단순하게 처리하고 중반부 이후 인간의 시점으로 바라본 고질라에 대한 인간의 투쟁으로 그려낸 표현방법이 예술이다.
그러나 감독은 처음부분에서 아름다운 산호초 바위 위의 이구아나를 묘사했다. 고질라의 탄생이유를 인과론으로 단순하게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겠다. 그렇지만 결말부분의 모성애에서 우러나오는 분노 때문에 처참하게 죽는 고질라의 눈이, 처음에 나오는 이구아나의 순진하고 단순한 눈과 비교될 때면 이 영화가 왜 고질라였어야 했는지, “size does matter” 였어야 하는지 금방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size does matter”에서, 인간이라는 종의 거대함에 끝없이 희생될 수 밖에 없었던 자연을, 고질라는 그 몸으로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