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nocence : The ghost in the shell 2
Mamoru osii
오시이 마모루 감독은 공각기동대의 두번째 극장판인 '이노센스'를 통하여 다양한 메세지를 전해주고자 하였다. 그러한 메세지의 성격과 전달 방법은 전작과 큰 차이를 보이며, 전달방법의 직접성과 무모함은 많은 관객들에게 호응아닌 비판을 끌어내기가 더 쉬워보인다. 이번 영화를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또 왜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더 직접적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혼란스러워 하는가? 그러한 이야기들을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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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의 문제
시로 마사무네 원작의 '공각기동대' 는 원작을 바탕으로 한 코믹판과, 오시이 마모루가 만든 극장판 영화와 함께, TV용 애니메이션인 S.A.C. 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은 직접적인 스토리상 연관은 없지만, 기본적인 설정은 완벽하게 동일한 것을 차용하고 있다. 코믹판과 S.A.C.의 경우, 원작의 설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만, 오시이 마모루의 극장판의 경우는 기본적인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한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 두번째 극장판에 와서는 더욱 심해져서, 기본적인 인물 구성에 대한 설명마저 깡그리 생략해 버리고 바로 본문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기존의 세계관을 다른 매체를 통하여 접하지 못한 관객들의 경우는 기본적인 영화의 구조조차 이해하기 힘든 채로, 바로 고전에서 차용된 메세지들의 나열만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한정된 시간에 내용과 영상을 담아내기 위한 방법이지만, 다른 면으로는 감독의 간단하지만 불친절한 요구이다. '세계관에 대한 준비가 되지 않았으면 보지 말아라.'
왜 버트 / 토구사 인가
'이노센스'의 경우, 주인공은 첫번째 극장판에서 인형사와 동일체가 된 모토코가 아닌 과거 그의 파트너인 버트이다. 이러한 주인공의 설정은 그의 새로운 파트너가 토구사인 것과 맞물려 처음부터 주제를 끌어오는 역할을 한다.
공각기동대 전체를 통하여 버트는 가장 기계와 가까운 형태를 하면서도 가장 인간과 가까운 사고를 하는 인물이다. 모토코에게 '여자 몸은 능률적이지 못하니 남자 의체로 교환하라'는 충고를 하지만, 동시에 기계일 뿐인 타치코마에게 천연 오일을 주입하며 기계의 개성을 인정하는, (심지어 인간과 같은 '동료'로도 받아들인다) 인물이다. 이는 토구사와 함께 어울려 모순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토구사는 9과의 인물들이 모두 사이보그의 형태인 것에 반해 전뇌를 제외한 온 몸이 생몸이다. 전뇌의 개념이 뇌의 사이에 전극을 꽂아 넣는 것임을 생각해 볼 때, 그는 발달된 네트워크로의 최소한의 접속 수단만을 가진, 말 그대로 '인간'이다. 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토구사만이 유일하게 안정된 가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토구사의 경우 3차, 4차 세계대전을 겪은 특수부대원중 하나가 아니라, 형사이던 시절 모토코가 직접 스카웃하여 9과에 편입된 인물이다. 그는 모토코에 의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정확히 표현하면 '잃어버린') 장점이 있다' 는 점 때문에 9과로 스카웃된다. 이러한 점이 그가 단지 9과의 인물들 중 '인간'의 상징으로만 머물게 하지 않는다. 사이보그뿐인 환경 안에서, 그는 생몸이라는 자신의 한계때문에 고민한다. 뛰어난 동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쓸모있음' 을 고민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는 때로는 인간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오히려 버트보다 더 기계처럼 보인다.
인간의 마음을 가진 인형과, 인형이 되고싶은 인간. 그들은 하나의 팀이 되어 두번째 주제를 향해 접근해간다. '인간과 인형이 차이가 없다면, 그 두가지를 엮는 것은 무엇인가?'
전개
여기서, 오시이 마모루 감독은 이전 극장판과 다른 방법을 통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했던 전작과 다르게, 이번 영화에서는 고전들의 내용을 빌려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고전들이 주는 느낌은 훨씬 더 직접적이지만, 주는 내용은 더욱 간접적이 되었다.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말을 할 때에는 그러한 상황에 대한 해석이 설명의 형태로 녹아 있다. 그러나 인용구만으로 대사를 이어나간다는 것은 단지 말장난, 또는 내용의 빈약함을 어구로 메꾸려는 시도로 보일 수 있다. 게다가, 영화의 도입부에서부터 감독은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한 질문에 이어지는 이후의 인용구들은 연결되어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 도입부의 질문에 대한 형태가 다른 답의 형태로 계속 주어진다.
이러한 인용구들의 진행과는 별도로, 버트와 토구사를 중심으로 한 스토리는 계속 진행이 된다. 버트는 애완견의 먹이를 사기 위해 들린 가게에서 전뇌 해킹을 당한다. 그 일을 계기로 버트는 예전에 가볍게 흘려버린, 자신의 개에게 생음식이 아닌 보존용 음식을 먹이라는 충고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한때는 인간이 많았던 북쪽의 공업 도시에서, 토구사는 은퇴한 해커에 의하여 의식의 무한 루프에 들어가게 된다. 몸 전체를 교체한 사이보그들은 일반적으로 모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심을 하게 되지만, 토구사는 이때서야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의심하게 된다.
인형은 생명을 인형으로 다루어도 되는지를 고민하고,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두가지 방법은 처음에 주어진 질문에 대하여 꾸준히 예전에 존재했던 대답들을 던지는 동시에, 감독이 이야기하고 싶은 결론을 도출하기 위하여 평행선을 그리며 달려간다.
중간자
버트가 찾아간 가이노이드 제작 기업에서, 감독은 결론을 위해 크게 두가지를 보여준다. 그 중 하나는, 원작의 주인공이자 영화판에서는 인형사와 동일화되어 네트워크 안으로 융화되어 버린 모토코를 버트의 동료로 내보여 주는 것이다.
버트는 그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유조선위의 안드로이드 생산 공장에서야 처음으로 모토코를 마주하게 된다. 모토코는 고스트를 가진 인간일까 그렇지 않으면 네트워크 상에 존재하는 정보로서의 프로그램인가? 전편에서 감독은 '고스트' 에 대한 답으로 모토코를 내세웠고, 이번 작품에서는 그러한 모호한 경계를 더욱 강하게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모토코를 보여준다. '네트에 접속하는 때에는 항상 옆에 있다' 는 말은 이미 그가 인간이라기 보다는 네트워크 그 자체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인형사가 '네트워크 안에서 파생된 존재'라는 전작의 개념과 이어진다.) 그리고 버트는 그를 예전과 같은 동료로 맞이하여 난관을 헤쳐나간다. '토구사'와 '모토코'를 동일선상에 놓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호함은 끝에 가서는 더욱 강하게 그려진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에서 그들은 납치한 소녀들을 이용하여 가이노이드들에게 고스트 더빙을 하고 있는 시설을 보게 된다. S.A.C.에서 다루어졌듯이, 고스트 더빙은 인간의 고스트를 복제하여 안드로이드에게 이식하는 공정이다. '고스트 더빙'은 타치코마들의 '데이터들이 엄청나게 모이면 사유를 시작하고, 그러한 가운데에서 고스트가 생겨날 것이다'는 가정을 다른 방향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였다. 영혼도 데이터에 불과하며, 다중 복제를 통하여 여러 개체에게 고스트를 부여할 수 있다는 S.A.C.의 개념을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 다시 끌어와 결론으로 던져 놓는다. 게다가 구출한 소녀가 '자신들이 갇혀 있는 것을 알리기 위해 가이노이드들의 자괴 사건을 일으켰다'며 울먹거리자 버트는 따져묻는다. '인형들이 받을 고통은 생각해보지 않았느냐.' 버트는 고스트의 유무를 넘어 인형과 사람을 동격에 놓기 시작한다.
멍멍이와 인형
버트는 토구사의 집에 맡겨놓은 애견을 찾으러 간다. 토구사의 가족들이 나오고, 개는 뒤를 잠시 돌아보다가 버트에게 달려간다. 토구사의 딸은 개와 함께 나오지만, 곧 그의 손엔 봉제 인형이 들려진다. 고스트에 대한 정의는 이미 주제에서 멀어져있다.
사람들보다 인형이 좋은 개.
개보다 인형이 좋은 아이.
인간은 인형을 만들었지만, 과연 인형으로 대하기 위하여 인형을 창조한 것일까? 자신의 모습을 본떠 창조한 인형은 자신과 구분할 수 있는가?
감독은 단호하게 말한다.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