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기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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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편지
사랑하는 내 딸 상아에게
내가 그 곳을 자청해서 맡게 되었을 때부터 이런 일들은 정해져 있었는지 모른다. 시간은 처음부터 그 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고, 매일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는 나는 언제나 최선이 아닌 극단의 선택을 원하고 있었다. 약간은 이상한 일이었다. 아주 많이 이상한 일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정말로 내가 느낀 것은 아주 약간의 이상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그 밖으로의 무언가를 생각하고 그 곳의 시간을 찾아갔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내 앞에서 부스러져가는 시간의 흐름을 지켜보며, 죽을 때까지 쫓아다닐 지도 모를 조롱의 일부를 얻은 것이 전부였다.
무서운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절대 저항할 수가 없었다. 저항할 생각이 없었다. 모든 것을 약간씩 예감하면서 오히려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첫 발을 열었던 것이었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을 찾아서.
노인은 그렇게 말했다. 난 네가 원하는 것을 줄 수도 있다. 감당할 수 있겠는가? 짧은 말이었지만 이젠 내가 지고 있던, 그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그 말의 무게를 너에게 넘겨주고자 한다. 모든 것은 이십년이 못되지만 십년은 넘은 과거의 그 날에 돌아가기 시작했다…….
9월 13일
0..
0
“난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네.”
석우를 보내는 학장의 말은 짧았지만 의미는 명확했다. 하지만 석우의 대답도 간단했다.
“전 이해하기 위해서 자청한 것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석우는 멍해있는 학장을 뒤로 하고서 한 걸음씩을 더해 방문을 빠져나갔다. 학장은 한숨만을 내쉬고서는 자리에 주저앉아 앞에 있는 컵의 물을 한 모금 물었다. 석우의 주문은 아주 이상했지만 자신이 아끼는 제자였기 때문에 잡아두고 싶었다. 처음 학교에 부임해 오도록 권유할 때 석우는 완강히 거부했다. 그는 그저 쉬고 싶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아까운 일이었지만 그렇게 자신을 잃고 살도록 놓아둘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자청해서 자신을 찾아와서 학교의 일을 보아달라고 했었다. 그 당시의 표정이 그대로 살아 그의 스승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주 조급한 표정. 아니, 무언가를 갈망하는 표정이었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하나의 이미지로 고정시킨다면 지옥에서 몸부림치며 빠져나가기를 갈망하는 고통 하는 자의 표정이었다.
석우가 자청하여 처음 맡은 일은 그의 전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대학 내에서 공금을 유용하는 가에 대한 조사. 간단히 말하면 그렇게 되겠지만 실제로 조사가 필요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최근 여러 가지 지표들이 ‘거의’ 라는 말에 무게를 더해주고 있었다. 석우는 머릿속에서 좀 전에 받은 자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석우가 향한 곳은 생명과학 실험동이었다. 거대한 건물을 내부공간을 넓게 사용하기 위해 기둥의 수를 최소화한 대신 엄청난 크기의 기둥으로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전형적인 다목적건물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6층 T자형으로 꺾인 복도 끝에 문이 있었다. 문은 잠겨있었다. 몇 번을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았다. 문고리를 세게 치자 갑자기 문이 열렸다. 반동 때문에 석우는 엉겁결에 방 안으로 밀려들 듯이 들어가고 말았다.
문이 열린 곳에는 커다란 서재가 있었다. 구조는 특이했다. 벽에 책장을 세워놓은 구조가 아닌, 중간을 가로질러 가로하나 세로하나 하는 구조로 배열된 책장이었다. 확실히 전체 공간상 이점은 있겠지만 하나의 넓은 공간은 얻지 못하는 구조였다. 책장에 꽂힌 책은 대부분 석우가 조사해야 할 박사의 전공과 관련된 서적이었다. 하지만 그 중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하등동물의 분화 구조에 대한 논문들이었다. 분명 박사의 두번째 전공은 정형의학 이었는데- 하고 석우는 생각했다. 천재라고 불렸던 과거에 비해서 참 이상한 모습이군.
석우가 조사하는 이 박사는 학창시절 석우의 기억 속에는 전설적인 천재로 남아있었다. 엄청난 기억의 소유자이며 수많은 것들을 바로 꿰뚫어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가 한 말은 석우가 전공했던 심리학 부교재의 가장 앞머리에 나와 있었다.
‘사물을 바로 꿰뚫어보는 능력은 복잡한 과정에서 나오지만, 본인에게는 간단한 하나의 길만을 가지고 있다. 모든 이론이나 억측은 직관에서 나온다. 직관은 그래서...’
“결국 여기까지 왔군. 예산문제인가?”
뒤를 돌아본 석우의 눈에 바로 문제의 박사가 들어왔다. 이 환. 아직도 전설로 남아있는 심리학 박사였다. 생각이 닿자마자 바로 그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모든 서적은 생명과학에 관한 것들이었다. 심리학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아... 그런데 왜...”
“심리학박사가 생명과학을 연구하고 있느냐는 질문이었나? 자네 학교에 계속 있던 사람이 아니군.”
간소한 스웨터에 어울리지 않게 큰 명패에 적인 직함은 분명 생명과 주임교수였다.
“예산문제가 불거져 나올 줄은 알았지만 이거 의외인데, 이런 곳으로 그 일을 조사하러 올 사람이 있을 줄이야.”
신기한 듯이 들리는 박사의 말을 귀에 담으면서 석우는 자신의 노트를 보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예산유용. 생명과학에 관련된 연구비의 90%이상을 소모하고 있지만 5년째 성과 없음. 게다가 프로젝트도 불분명함. 스폰서도 불분명함. 박사의 일이 이어졌다.
“자네 이름이 석우였나. 하나만 묻지. 무엇을 찾아 이곳으로 왔나? 솔직하게 말하게.”
석우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이 생각해냈다고 믿기 힘든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눈을 피하며 대답해야했다.
“그저……. 일이기 때문에 왔을 뿐입니다.”
“난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네.”
석우를 보내는 학장의 말은 짧았지만 의미는 명확했다. 하지만 석우의 대답도 간단했다.
“전 이해하기 위해서 자청한 것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석우는 멍해있는 학장을 뒤로 하고서 한 걸음씩을 더해 방문을 빠져나갔다. 학장은 한숨만을 내쉬고서는 자리에 주저앉아 앞에 있는 컵의 물을 한 모금 물었다. 석우의 주문은 아주 이상했지만 자신이 아끼는 제자였기 때문에 잡아두고 싶었다. 처음 학교에 부임해 오도록 권유할 때 석우는 완강히 거부했다. 그는 그저 쉬고 싶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아까운 일이었지만 그렇게 자신을 잃고 살도록 놓아둘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자청해서 자신을 찾아와서 학교의 일을 보아달라고 했었다. 그 당시의 표정이 그대로 살아 그의 스승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주 조급한 표정. 아니, 무언가를 갈망하는 표정이었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하나의 이미지로 고정시킨다면 지옥에서 몸부림치며 빠져나가기를 갈망하는 고통 하는 자의 표정이었다.
석우가 자청하여 처음 맡은 일은 그의 전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대학 내에서 공금을 유용하는 가에 대한 조사. 간단히 말하면 그렇게 되겠지만 실제로 조사가 필요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최근 여러 가지 지표들이 ‘거의’ 라는 말에 무게를 더해주고 있었다. 석우는 머릿속에서 좀 전에 받은 자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석우가 향한 곳은 생명과학 실험동이었다. 거대한 건물을 내부공간을 넓게 사용하기 위해 기둥의 수를 최소화한 대신 엄청난 크기의 기둥으로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전형적인 다목적건물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6층 T자형으로 꺾인 복도 끝에 문이 있었다. 문은 잠겨있었다. 몇 번을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았다. 문고리를 세게 치자 갑자기 문이 열렸다. 반동 때문에 석우는 엉겁결에 방 안으로 밀려들 듯이 들어가고 말았다.
문이 열린 곳에는 커다란 서재가 있었다. 구조는 특이했다. 벽에 책장을 세워놓은 구조가 아닌, 중간을 가로질러 가로하나 세로하나 하는 구조로 배열된 책장이었다. 확실히 전체 공간상 이점은 있겠지만 하나의 넓은 공간은 얻지 못하는 구조였다. 책장에 꽂힌 책은 대부분 석우가 조사해야 할 박사의 전공과 관련된 서적이었다. 하지만 그 중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하등동물의 분화 구조에 대한 논문들이었다. 분명 박사의 두번째 전공은 정형의학 이었는데- 하고 석우는 생각했다. 천재라고 불렸던 과거에 비해서 참 이상한 모습이군.
석우가 조사하는 이 박사는 학창시절 석우의 기억 속에는 전설적인 천재로 남아있었다. 엄청난 기억의 소유자이며 수많은 것들을 바로 꿰뚫어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가 한 말은 석우가 전공했던 심리학 부교재의 가장 앞머리에 나와 있었다.
‘사물을 바로 꿰뚫어보는 능력은 복잡한 과정에서 나오지만, 본인에게는 간단한 하나의 길만을 가지고 있다. 모든 이론이나 억측은 직관에서 나온다. 직관은 그래서...’
“결국 여기까지 왔군. 예산문제인가?”
뒤를 돌아본 석우의 눈에 바로 문제의 박사가 들어왔다. 이 환. 아직도 전설로 남아있는 심리학 박사였다. 생각이 닿자마자 바로 그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모든 서적은 생명과학에 관한 것들이었다. 심리학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아... 그런데 왜...”
“심리학박사가 생명과학을 연구하고 있느냐는 질문이었나? 자네 학교에 계속 있던 사람이 아니군.”
간소한 스웨터에 어울리지 않게 큰 명패에 적인 직함은 분명 생명과 주임교수였다.
“예산문제가 불거져 나올 줄은 알았지만 이거 의외인데, 이런 곳으로 그 일을 조사하러 올 사람이 있을 줄이야.”
신기한 듯이 들리는 박사의 말을 귀에 담으면서 석우는 자신의 노트를 보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예산유용. 생명과학에 관련된 연구비의 90%이상을 소모하고 있지만 5년째 성과 없음. 게다가 프로젝트도 불분명함. 스폰서도 불분명함. 박사의 일이 이어졌다.
“자네 이름이 석우였나. 하나만 묻지. 무엇을 찾아 이곳으로 왔나? 솔직하게 말하게.”
석우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이 생각해냈다고 믿기 힘든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눈을 피하며 대답해야했다.
“그저……. 일이기 때문에 왔을 뿐입니다.”
1..
며칠이 지나자 환은 석우에 관해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석우는 자신의 생각이 읽히고 있다는 것을 예전에 알아챘다. 같은 심리학 전공인 석우에게 환의 천재성은 머리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석우는 매일같이 들러 예산에 대한 점검을 하고 또한 그의 연구에 대한 조사를 해나갔다.
예산의 사용내역은 방대했다. 그러나 석우는 그 데이터들을 올바로 조합해 내지 못했다. 연구의 주제가 없는데도 무분별하게 많은 예산을 사용했으며, 예산의 결과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엇을 보고해야 할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에서 석우는 며칠을 헛고생을 하면서 보냈다. 박사는 매일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석우에게는 이상한 경험이었다. 때로는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소일거리로만 일관하고 어쩔 때는 방에 하루 종일 들어오지도 않는 불규칙한 모습. 그리고 가끔 너무나 지친 모습으로 오후 늦게 쯤에야 들어오기도 했다. 그런 날이 석우에게는 가장 이상했는데, 박사의 표정이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즐거워보였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단순한 즐거움으로 보기 힘든 표정이었다.
처음으로 박사가 석우에게 말을 건넨 것은 일주일이 다 되어가는 날이었다.
"자네는 무엇을 찾아왔나?“
갑작스런 물음에 석우는 당황했지만, 금방 자신의 일에 대해서 외운 듯이 말을 했다. 환은 약간의 장난기가 섞인 눈으로 석우의 눈을 마주대했다.
“빨리 하면 하루에 끝날 조사야. 그리고 전공서적들을 구태여 들추어 볼 필요도 없는 조사이고. 계속 있어도 이곳에서는 예산의 불분명함에 대해서는 별다른 답이 나오지 않을 것도 알고 있을 텐데.
“그것들만 가지고 왜 그렇게 무언가를 찾아왔다고 단정하시는 겁니까?”
“찾아온 게 맞기는 맞나 보군. 별다른 부정이 없어. 석우. 나이 스물일곱에 심리학전공이라. 게다가 졸업 후에는 언론사에서 일을 했고, 이 년 후 제약회사로 옮겨 일을 했다. 게다가 이 회사들, 단순한 구멍가게가 아닌데? 이런 직장을 버리고 모교로 돌아와 처음 하는 일이 고작 예산낭비 체크에 관련된 일이냐?”
뒷조사를 했군. 석우는 생각했다. 하지만 ‘기록된’ 사실만 가지고는 무엇도 확정지을 수 없어.
“대답이 없어도 좋아. 자네는 나와 비슷한 길을 걸어왔군. 단지 내가 30년 이상 앞서서 왔다는 사실이 조금 차이 날 뿐이지. 지금 상당히 재미있는 기분이네. 사실 그냥 조사나 하게하고 얼른 보내버리려고 했는데, 흥미가 생기는군. 닮은 형이라. 하지만 어디까지 닮아있을까. 기록상으로는 구분할 수 없지만 말이야. 실제로 당신과 나는 다른 사람이니 다른 식으로의 길을 걸어왔겠지.”
석우는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자신의 말을 했다.
“다릅니다. 기록상의 운명이 교수님과 비슷했을 지라도, 전 지금 여기 이렇게 있지 않습니까? 생명공학에 관련된 일과는 거리가 먼 일이지요.”
환은 재미있어했다. 분리라. 운명의 분리,
이 청년의 운명이 자신의 운명과 비슷하다면 자신의 운명과는 달라지는 것이 좋다. 하지만 지금이 달라지는 시간이라면 이미 약간은 늦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환은 일어서려는 석우에게 몇 단어를 남겼다.
“자네와 만났다고 생각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군. 내일 보세.”
문을 나가는 석우의 손에는 땀이 고여 있었다.
예산의 사용내역은 방대했다. 그러나 석우는 그 데이터들을 올바로 조합해 내지 못했다. 연구의 주제가 없는데도 무분별하게 많은 예산을 사용했으며, 예산의 결과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엇을 보고해야 할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에서 석우는 며칠을 헛고생을 하면서 보냈다. 박사는 매일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석우에게는 이상한 경험이었다. 때로는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소일거리로만 일관하고 어쩔 때는 방에 하루 종일 들어오지도 않는 불규칙한 모습. 그리고 가끔 너무나 지친 모습으로 오후 늦게 쯤에야 들어오기도 했다. 그런 날이 석우에게는 가장 이상했는데, 박사의 표정이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즐거워보였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단순한 즐거움으로 보기 힘든 표정이었다.
처음으로 박사가 석우에게 말을 건넨 것은 일주일이 다 되어가는 날이었다.
"자네는 무엇을 찾아왔나?“
갑작스런 물음에 석우는 당황했지만, 금방 자신의 일에 대해서 외운 듯이 말을 했다. 환은 약간의 장난기가 섞인 눈으로 석우의 눈을 마주대했다.
“빨리 하면 하루에 끝날 조사야. 그리고 전공서적들을 구태여 들추어 볼 필요도 없는 조사이고. 계속 있어도 이곳에서는 예산의 불분명함에 대해서는 별다른 답이 나오지 않을 것도 알고 있을 텐데.
“그것들만 가지고 왜 그렇게 무언가를 찾아왔다고 단정하시는 겁니까?”
“찾아온 게 맞기는 맞나 보군. 별다른 부정이 없어. 석우. 나이 스물일곱에 심리학전공이라. 게다가 졸업 후에는 언론사에서 일을 했고, 이 년 후 제약회사로 옮겨 일을 했다. 게다가 이 회사들, 단순한 구멍가게가 아닌데? 이런 직장을 버리고 모교로 돌아와 처음 하는 일이 고작 예산낭비 체크에 관련된 일이냐?”
뒷조사를 했군. 석우는 생각했다. 하지만 ‘기록된’ 사실만 가지고는 무엇도 확정지을 수 없어.
“대답이 없어도 좋아. 자네는 나와 비슷한 길을 걸어왔군. 단지 내가 30년 이상 앞서서 왔다는 사실이 조금 차이 날 뿐이지. 지금 상당히 재미있는 기분이네. 사실 그냥 조사나 하게하고 얼른 보내버리려고 했는데, 흥미가 생기는군. 닮은 형이라. 하지만 어디까지 닮아있을까. 기록상으로는 구분할 수 없지만 말이야. 실제로 당신과 나는 다른 사람이니 다른 식으로의 길을 걸어왔겠지.”
석우는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자신의 말을 했다.
“다릅니다. 기록상의 운명이 교수님과 비슷했을 지라도, 전 지금 여기 이렇게 있지 않습니까? 생명공학에 관련된 일과는 거리가 먼 일이지요.”
환은 재미있어했다. 분리라. 운명의 분리,
이 청년의 운명이 자신의 운명과 비슷하다면 자신의 운명과는 달라지는 것이 좋다. 하지만 지금이 달라지는 시간이라면 이미 약간은 늦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환은 일어서려는 석우에게 몇 단어를 남겼다.
“자네와 만났다고 생각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군. 내일 보세.”
문을 나가는 석우의 손에는 땀이 고여 있었다.
2..
다음날 교수는 오후 늦게야 나타났다. 얼굴에는 핏기가 없이 창백한 채로 소파에 앉아 이것저것 뒤적이고 있는 석우를 쳐다보았다.
“자네 이름이 뭔가.”
“교수님, 이미 저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조사해 놓았잖습니까? 일부러 그러시지 마세요. 아직 조사 안 끝났어요. 안갈 겁니다.”
환은 입 모양만을 움직여서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석우, 이석우입니다.”
박사는 그제야 문고리를 놓고는 석우의 반대편 소파에 기대앉았다. 숱이 별로 없는 머리사이로 땀이 많이 배어나왔다.
“그렇군. …. 내 이름은 이 환이네. 정식으로 소개를 하지.” 환은 그 후에 말이 없었다. 창백한 표정을 한 채 소파에 앉아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럼 저도 자세히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이어지려는 석우의 말을 환이 막았다.
“그만 두게. 이름을 알았으니 됐네. 이미 이름을 알고 있으니 다 알고 있는 것이지.”
“이름만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더 무엇을 안다고 그러시는 거죠?”
몇 번 숨을 몰아쉬고 나서 환은 말했다.
“이름에는 일종의 대칭성이 있지. 이석우라고 했나. 그 이름은 지금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을 지칭하는 대칭어이지. 이석우는 자네고, 자네가 이석우 아닌가? 그렇다면 이석우라는 이름을 완전히 아는 것으로 자네를 완전히 아는 것이 성립된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
“하지만 그 대칭성은 완전한 일대일 대칭이 아니잖습니까. 이름은 일종의 표식이지 그것이 어떻게 대칭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까?”
환은 약간 비어버린 미소를 지었다.
“일종의 착각이야. 자네는 아직도 자네의 엄청나게 오래된 조상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같은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라네. 아니, 자네의 조상들도 이미 이름의 대칭성을 파악하고 있었지. 자네 말대로 이름은 상징어가 맞지. 하지만 상징어의 대칭성은 상상보다 크다네. 뭐 이런 것 있잖은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행위 등은 고대부터 있어왔지.”
“그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건다, 뭐 이런 것들, 그것은 결국 제 손이, 제 힘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행위에 대한 책임이지 않습니까. 이름은 단지 그 모든 것에 대표할 만한 표식을 제공해줄 뿐입니다.”
“이름이 큰 힘을 지니게 된 것은 자네가 사회생활을 해 왔다는 과정에서도 만들어 질 수 있었던 거야. 잘 생각해보게. 자네가 한 일들, 생활, 학업, 명예, 사랑. 모든 게 이석우라는 이름 아래서 만들어져왔지. 처음에는 자네가 이름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아, 자네의 부모가 선택했겠군― 그 이후에는 이름이 자네를 선택한다네. 타인이 자네의 이름과 그 아래 붙은 수많은 것들을 대신할 수 있다면, 자네의 가치 자체는 무의미해지게 되지. 이해할 수 있나?”
말을 많이 한 환의 표정은 더욱 창백해졌다. 석우는 그 표정을 보면서도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 동의할 수 없습니다. 분명 살아있는 것은 제 자신이고, 제가 살아가는 삶이 저를 구성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이름 세 글자와 동일시 될 수 있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환은 석우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의 모든 행위를 ‘표현’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그 위치는 모두 자네의 이름이 자네 대신 서 있지. 약간 억울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인간은 상징으로서 별개의 객체로 존재하는 이름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지.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표현하는 수단이지만, 반대로 인간의 표현을 제약하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네......”
“그것들은 모두 궤변일 뿐입니다. 언어와 주체를 혼동하는 아주 기본적인 궤변일 뿐이라고요.”
“그래. 모두다 궤변이지. 궤변같이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바라보게나. 이름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름을 붙임으로써 존재가 생명을 얻게 되는 과정들을. 창조 때부터 언어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을 말일세.”
석우는 속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이름을 알고 있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중요한 것은 실제에 있습니다. 어떤 상징적 표현을 쓰더라도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걸 아십니까. 이름만 남은 공허함의 무게를 말입니다.
환은 옆의 책을 한 권 뽑으면서 석우에게 말했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고들 부르지. 실제 마음이 책을 좋아하는 것인지는 상관없이 말이야. 내일은 내가 식사라도 대접하기로 하지.”
“자네 이름이 뭔가.”
“교수님, 이미 저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조사해 놓았잖습니까? 일부러 그러시지 마세요. 아직 조사 안 끝났어요. 안갈 겁니다.”
환은 입 모양만을 움직여서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석우, 이석우입니다.”
박사는 그제야 문고리를 놓고는 석우의 반대편 소파에 기대앉았다. 숱이 별로 없는 머리사이로 땀이 많이 배어나왔다.
“그렇군. …. 내 이름은 이 환이네. 정식으로 소개를 하지.” 환은 그 후에 말이 없었다. 창백한 표정을 한 채 소파에 앉아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럼 저도 자세히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이어지려는 석우의 말을 환이 막았다.
“그만 두게. 이름을 알았으니 됐네. 이미 이름을 알고 있으니 다 알고 있는 것이지.”
“이름만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더 무엇을 안다고 그러시는 거죠?”
몇 번 숨을 몰아쉬고 나서 환은 말했다.
“이름에는 일종의 대칭성이 있지. 이석우라고 했나. 그 이름은 지금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을 지칭하는 대칭어이지. 이석우는 자네고, 자네가 이석우 아닌가? 그렇다면 이석우라는 이름을 완전히 아는 것으로 자네를 완전히 아는 것이 성립된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
“하지만 그 대칭성은 완전한 일대일 대칭이 아니잖습니까. 이름은 일종의 표식이지 그것이 어떻게 대칭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까?”
환은 약간 비어버린 미소를 지었다.
“일종의 착각이야. 자네는 아직도 자네의 엄청나게 오래된 조상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같은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라네. 아니, 자네의 조상들도 이미 이름의 대칭성을 파악하고 있었지. 자네 말대로 이름은 상징어가 맞지. 하지만 상징어의 대칭성은 상상보다 크다네. 뭐 이런 것 있잖은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행위 등은 고대부터 있어왔지.”
“그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건다, 뭐 이런 것들, 그것은 결국 제 손이, 제 힘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행위에 대한 책임이지 않습니까. 이름은 단지 그 모든 것에 대표할 만한 표식을 제공해줄 뿐입니다.”
“이름이 큰 힘을 지니게 된 것은 자네가 사회생활을 해 왔다는 과정에서도 만들어 질 수 있었던 거야. 잘 생각해보게. 자네가 한 일들, 생활, 학업, 명예, 사랑. 모든 게 이석우라는 이름 아래서 만들어져왔지. 처음에는 자네가 이름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아, 자네의 부모가 선택했겠군― 그 이후에는 이름이 자네를 선택한다네. 타인이 자네의 이름과 그 아래 붙은 수많은 것들을 대신할 수 있다면, 자네의 가치 자체는 무의미해지게 되지. 이해할 수 있나?”
말을 많이 한 환의 표정은 더욱 창백해졌다. 석우는 그 표정을 보면서도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 동의할 수 없습니다. 분명 살아있는 것은 제 자신이고, 제가 살아가는 삶이 저를 구성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이름 세 글자와 동일시 될 수 있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환은 석우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의 모든 행위를 ‘표현’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그 위치는 모두 자네의 이름이 자네 대신 서 있지. 약간 억울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인간은 상징으로서 별개의 객체로 존재하는 이름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지.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표현하는 수단이지만, 반대로 인간의 표현을 제약하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네......”
“그것들은 모두 궤변일 뿐입니다. 언어와 주체를 혼동하는 아주 기본적인 궤변일 뿐이라고요.”
“그래. 모두다 궤변이지. 궤변같이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바라보게나. 이름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름을 붙임으로써 존재가 생명을 얻게 되는 과정들을. 창조 때부터 언어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을 말일세.”
석우는 속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이름을 알고 있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중요한 것은 실제에 있습니다. 어떤 상징적 표현을 쓰더라도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걸 아십니까. 이름만 남은 공허함의 무게를 말입니다.
환은 옆의 책을 한 권 뽑으면서 석우에게 말했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고들 부르지. 실제 마음이 책을 좋아하는 것인지는 상관없이 말이야. 내일은 내가 식사라도 대접하기로 하지.”
3..
석우는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로 바로 연구실로 향했다. 갑자기 말이 많아진 환이 이상하기도 하고, 게다가 평소에는 의식조차 하지 않던 자신에게 식사까지 대접하겠다고 스스로 말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약간 긴장되기까지 했다. 가볍게 문을 밀었더니 쉽게 열렸다.
소파와 테이블이 있던 자리는 누가 치웠나 싶게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그 자리에는 크기는 작지만 꽤 현대적인 디너테이블이 하나 놓여져 있었고, 의자 두 개가 놓여져 있었다. 얼핏 보기에 식사와는 아주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었다. 방을 중심을 가로세로로 사등분하는 책장 때문에, 테이블이 위치한 건물 안 방향 왼쪽의 공간은 반은 서재로, 반은 벽으로 되어있었다. 책장사이로 조금 난 길을 따라 박사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 왔군. 자네 혹시 채식주의자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혹 박사님이 채식주의자입니까?”
“하하하……. 난 채식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네. 그럼 잠시 기다리게나.”
환이 다시 나타나기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석우는 잠시 이름에 관한 것들을 생각했다. 어젯밤에 잠을 설치게 만든 간단한 궤변. 정말 아니라고 가슴은 외치고 있었지만, 그렇지만 어디서부터 부정해야 할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오래 기다렸군. 하지만 충분히 기다릴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할 것이네만.”
그들은 식사를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는 별다른 음식은 아니었다. 식사를 시작하는 순간 석우는 놀랐다. 지금까지 그가 먹어보았던 음식 중에서 가장 맛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전에 갔었던 레스토랑에서 주문을 잘못해 피가 줄줄 흐르는 생고기가 나왔을 때 차마 먹을 수가 없어서 다른 것을 시켰던 기억이 있다. 그 때 함께 식사를 하던....... 그렇지만 똑 같아 보이는 스테이크이지만 이번 것은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맛이 있었다. 식사를 안한 기운을 타 허겁지겁 스테이크를 먹는 석우를 보면서 환은 입을 닦고서는 천천히 말했다.
“괜한 걱정을 했구만. 채식주의자면 어떻게 하나 생각을 했는데.”
“아... 정말 맛있군요. 무슨 스테이크지요?”
“그건 간 스테이크라네. 맛이 괜찮은가?”
대답을 하면서 석우는 식탁 위를 훑어보았다. 그러던 중 약간 희한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식물성으로 된 음식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식물성 음식이 하나도 없군요.”
“그렇지. 인간은 기본적으로 육식성이니까, 구태여 식물성 음식에 소스를 묻혀가며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네.”
“인간이 기본적으로 육식성이라고요?”
환은 왼 손으로 입을 가렸다. 눈 끝이 쳐지는 것으로 보아 웃고 있었다.
“그럼, 인간은 육식이라네. 채식은 인간의 나약함을 스스로 가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 아, 그렇게 사람 이상하게 만들지 말고, 침착하게, 그렇게 생각해보자고. 아, 신체적인 구조부터 생각을 해보세. 채식동물은 육식을 할 수 없지만, 육식동물은 채식을 할 수 있네. 호랑이 같은 동물들도 처음부터 채식을 하도록 교육하면 채식을 하면서 살 수 있지. 문제는 기본적으로 육식동물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 본성이 발현된다는 거야. 그런 동물에 비하면 인간은 얼마나 복 받은 존재인가. 자네는 그렇게 생각이 들지 않나?”
“인간이 왜 복 받은 존재가 되는 거죠? 사실 채식만 하는 사람들도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석우는 실제로 채식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그 순간 생각하고 있었다. 우유는 육식에 들어갈까 채식에 들어갈까. 아니, 그 둘 사이의 기준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은 아주 편하게 자신의 식성을 합리화할 수 있지. 채식이건 육식이건, 인간의 식성은 기본적으로는 각 개인의 이성에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지. 동물보다 나은 점이 그것일까. 식물은 그런 점에서 아주 불행한 케이스이지. 움직일 수 없는 개체, 아마 그 상황을 버티는 최선의 방법이, 이성이나 감성 등을 최대한 억제해버리는 것일 거야. 그런 점에서, 진화는 예술이라네.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을 만들어내니 말일세.”
“그렇긴 합니다만....... 좀 전에 하신 말씀 중에 육식동물에 관한 부분이 있었지요? 교수님의 말씀대로라면 분명 인간도 육식동물이니 본성이 발현될 기회가 있지 않겠습니까?”
석우는 언뜻 환의 얼굴이 약간 홍조를 띠는 것 같다고 느꼈다.
“인간은 강하다네. 이성의 힘이 최고조로 발달되어 있는 생물이지. 이성은 장벽인 동시에 방어기제이기도 하지. 그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네. 보통 자극으로 인간의 본성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 같은가? 집단의 힘을 빌리면 가능한 경우가 몇 있지만 그것은 본성이기보다는 사회성에 의지하는 바가 크지.”
석우는 눈치 챘다. 환이 그를 보면서 계속 웃고 있는 것이었다.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생각 한 구석은 계속 다른 곳을 향하고 있군. 그 부분은 현실인가, 기억인가? 식사가 그 트리거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석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환의 눈 속에는 그에게서 얻어낼 답이 이미 들어있다는 것이 비쳤기 때문이다.
소파와 테이블이 있던 자리는 누가 치웠나 싶게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그 자리에는 크기는 작지만 꽤 현대적인 디너테이블이 하나 놓여져 있었고, 의자 두 개가 놓여져 있었다. 얼핏 보기에 식사와는 아주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었다. 방을 중심을 가로세로로 사등분하는 책장 때문에, 테이블이 위치한 건물 안 방향 왼쪽의 공간은 반은 서재로, 반은 벽으로 되어있었다. 책장사이로 조금 난 길을 따라 박사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 왔군. 자네 혹시 채식주의자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혹 박사님이 채식주의자입니까?”
“하하하……. 난 채식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네. 그럼 잠시 기다리게나.”
환이 다시 나타나기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석우는 잠시 이름에 관한 것들을 생각했다. 어젯밤에 잠을 설치게 만든 간단한 궤변. 정말 아니라고 가슴은 외치고 있었지만, 그렇지만 어디서부터 부정해야 할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오래 기다렸군. 하지만 충분히 기다릴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할 것이네만.”
그들은 식사를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는 별다른 음식은 아니었다. 식사를 시작하는 순간 석우는 놀랐다. 지금까지 그가 먹어보았던 음식 중에서 가장 맛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전에 갔었던 레스토랑에서 주문을 잘못해 피가 줄줄 흐르는 생고기가 나왔을 때 차마 먹을 수가 없어서 다른 것을 시켰던 기억이 있다. 그 때 함께 식사를 하던....... 그렇지만 똑 같아 보이는 스테이크이지만 이번 것은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맛이 있었다. 식사를 안한 기운을 타 허겁지겁 스테이크를 먹는 석우를 보면서 환은 입을 닦고서는 천천히 말했다.
“괜한 걱정을 했구만. 채식주의자면 어떻게 하나 생각을 했는데.”
“아... 정말 맛있군요. 무슨 스테이크지요?”
“그건 간 스테이크라네. 맛이 괜찮은가?”
대답을 하면서 석우는 식탁 위를 훑어보았다. 그러던 중 약간 희한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식물성으로 된 음식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식물성 음식이 하나도 없군요.”
“그렇지. 인간은 기본적으로 육식성이니까, 구태여 식물성 음식에 소스를 묻혀가며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네.”
“인간이 기본적으로 육식성이라고요?”
환은 왼 손으로 입을 가렸다. 눈 끝이 쳐지는 것으로 보아 웃고 있었다.
“그럼, 인간은 육식이라네. 채식은 인간의 나약함을 스스로 가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 아, 그렇게 사람 이상하게 만들지 말고, 침착하게, 그렇게 생각해보자고. 아, 신체적인 구조부터 생각을 해보세. 채식동물은 육식을 할 수 없지만, 육식동물은 채식을 할 수 있네. 호랑이 같은 동물들도 처음부터 채식을 하도록 교육하면 채식을 하면서 살 수 있지. 문제는 기본적으로 육식동물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 본성이 발현된다는 거야. 그런 동물에 비하면 인간은 얼마나 복 받은 존재인가. 자네는 그렇게 생각이 들지 않나?”
“인간이 왜 복 받은 존재가 되는 거죠? 사실 채식만 하는 사람들도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석우는 실제로 채식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그 순간 생각하고 있었다. 우유는 육식에 들어갈까 채식에 들어갈까. 아니, 그 둘 사이의 기준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은 아주 편하게 자신의 식성을 합리화할 수 있지. 채식이건 육식이건, 인간의 식성은 기본적으로는 각 개인의 이성에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지. 동물보다 나은 점이 그것일까. 식물은 그런 점에서 아주 불행한 케이스이지. 움직일 수 없는 개체, 아마 그 상황을 버티는 최선의 방법이, 이성이나 감성 등을 최대한 억제해버리는 것일 거야. 그런 점에서, 진화는 예술이라네.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을 만들어내니 말일세.”
“그렇긴 합니다만....... 좀 전에 하신 말씀 중에 육식동물에 관한 부분이 있었지요? 교수님의 말씀대로라면 분명 인간도 육식동물이니 본성이 발현될 기회가 있지 않겠습니까?”
석우는 언뜻 환의 얼굴이 약간 홍조를 띠는 것 같다고 느꼈다.
“인간은 강하다네. 이성의 힘이 최고조로 발달되어 있는 생물이지. 이성은 장벽인 동시에 방어기제이기도 하지. 그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네. 보통 자극으로 인간의 본성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 같은가? 집단의 힘을 빌리면 가능한 경우가 몇 있지만 그것은 본성이기보다는 사회성에 의지하는 바가 크지.”
석우는 눈치 챘다. 환이 그를 보면서 계속 웃고 있는 것이었다.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생각 한 구석은 계속 다른 곳을 향하고 있군. 그 부분은 현실인가, 기억인가? 식사가 그 트리거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석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환의 눈 속에는 그에게서 얻어낼 답이 이미 들어있다는 것이 비쳤기 때문이다.
4..
다음 날 석우는 학장에게 통보받은 사실을 환에게 전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계속 길어지는 환의 연구에 대한 지원을 그만둘 수밖에 없다는 것과 연구에 대한 상세한 진행보고서를 며칠 안으로 제출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연구실 끝 방을 찾아 들어갔으나 방안에 환은 없었다. 석우는 교수를 찾아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어디에도 교수는 없었다. 천천히 방안을 돌아다니며 책들을 뒤지던 중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방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책장이 만나는 곳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장난삼아 무슨 귀중한 것이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장은 엄청나게 무거웠다. 옮길 수 없어서 그만 포기를 하려던 석우의 눈에 문 쪽으로 난 책장 면에 붙은 메모가 보였다. 들어올 때는 주의를 기울여 보지 않았었는데, 메모는 기다렸다는 듯이 밤색 배경에 노란색으로 크게 붙어있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나를 찾고 싶다면 뒷면을 보지 말게. 하지만 자네가 찾는 것을 찾고 싶다면 뒷면을 봐도 좋네.”
석우는 뒤를 보았다. 지시문이 하나 적혀있었다.
“지금 메모가 붙어있는 책장을 당겨라”
책장은 여전히 무거웠다. 하지만 힘을 약간 주자 그 책장은 이상하게 쉽게 미끄러졌다. 그리고 손으로 간단하게 열고 닫을 수 있는 문이 하나 나왔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문은 쉽게 닫혔다. 문이 닫히자마자 이상한 소리가 났고, 석우는 당황했다. 한참동안 이상한 소리가 났다. 어디론가 내려가는 듯한 기분에 그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역시’ 그 방 만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사실로 다가오자 무엇 때문인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곧 철컹하는 소리가 나고 문이 다시 열렸을 때, 석우의 눈에는 이제 낮이 익어가는 환의 방이 아닌 앞으로 벋어있는 긴 통로가 나타났다.
잠시 멍해있던 석우에게 떠오른 의문들은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었다. 이곳은 어디인가- 와 왜 이곳에 자신이 와 있는가― 라는 것들. 8층인 건물높이를 생각할 때 위로 올라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6층이나 되는 곳에서 어떤 방법을 이용하여 내려갔단 말인가. 뒤의 문이 천천히 닫히자 석우는 문득 정신이 들었다. 실제로 자신이 있는 공간이 내려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부속 건물을 받치는 커다란 기둥들. 지름이 삼 미터가 넘으니 그 안을 이용한다면 이런 식의 기관도 가능하다.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길게 뻗은 줄로만 알았던 통로는 이십 미터가 채 가기 전에 끝나있었다. 어두침침하던 통로의 끝에서 석우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문을 열어젖혔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연구소처럼 보이는 시설이었다. 문의 뒤에는 계속 이어지는 통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점은 통로의 양옆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문이 나 있다는 점이었다. 잠시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하던 그는 우선 왼 쪽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문을 열었다. 문 너머로는 통로가 또 있었고, 그 통로의 중간으로 문들이 또 나있었다. 석우는 일단 그 곳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앞으로 약간 가서 오른 쪽으로 나있는 문을 열었다. 문의 너머에는 또 통로가 있었으며, 그 가운데 또 문들이 나 있었다. 석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문으로 들어갔다. 왼쪽으로 나 있는 문들 중 하나를 골라 또 들어갔다. 그 곳에는 또 통로가 나 있었다.
석우는 당황했다. 일단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로 하고 뒤를 찾아 나갔다. 그런데 원래 길이 나오지 않았다. 원래 틀었던 방향을 기억하지 못하고 어딘가에서 반대방향을 찾아 나갔다고 생각했다. 겁이 난 석우는 되는대로 마구 문을 열며 통로사이를 헤매기 시작했다.
시간감각이 없어진 후에는 지쳐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여기서 계속 길을 잃게 되는 것인가 하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차라리 앉아서 사람들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연구소는 왜 만든 거야! 그런데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무엇인지 분명히 잡히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생각이 어렴풋이 만들어 낸 무언가와 상충되는 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왜 이 곳이 연구소라는 생각이 들었을까.
처음 책장 사이를 들어섰을 때부터 그는 한번도 연구실에 관계된 어떤 것을 보지 못했었다. 꼭 생물학 연구소가 아니더라도, 이곳은 단순히 통로의 나열일 뿐 어디에서도 연구소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었다. 그런데 왜
석우는 생각했다. 나는 이곳을 연구소라고 단정 지었을까.
여러 연구소들을 다니던 기억이나 대학시절 의학 실습을 할 때의 경험에서 나오는 감각. 그런 것이 그렇게 생각했다고 만들기에는 무언가가 약했다.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모순이었다. 그럼 이 곳은 연구소가 아니라 그냥 통로 뿐인건가. 내가 ‘찾고자’ 하는 곳이 연구소이기 때문에 이곳을 연구소라고 단정 지은 걸까.
그는 웃었다. 완벽히 자신의 감정에 놀아났기 때문이겠지만 자신의 생각에 대한 부끄러움 같은 것은 없었다. 석우는 절박했다. 급한 일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 곳을 연구소라고 착각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렇다면, 단순히 통로일 뿐이라면 분명 기하학적으로 가능한 모양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미로처럼 느끼고 있지만 실제로는 미로가 아닐 것이다. 석우는 일어서서 자신이 있는 통로의 끝을 보았다. 그리고 금방 자기가 통과해 온 문을 같이 보았다. 거의 같았지만 약간 달랐다. 자신이 있는 통로의 길이가 약간 짧았다. 자신의 착각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지자 석우는 전에 자신이 왔던 통로를 향해 걸었다. 입구부분이 제일 길고 나머지로 갈수록 점점 말단부에 가까워질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몇 번의 착오 끝에 그는 자신이 처음 통과해온 문의 앞에 설 수가 있었다.
그러나 석우는 올라갈 수가 없었다. 헤매고, 돌아왔지만 아무것도 본 것이 없었다. 물론 계속 감추려고 했던 자신의 초조함을 직접 대면하고 조소까지 할 수 있었지만, 자신은 수많은 말단부중 그 어떤 한 곳도 실제로 보지는 못했지 않은가.
석우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하지만 다른 어떤 옆문도 돌아보지 않았다. 석우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갔고, 결국 길의 정면에 있는 또 다른 문을 보자 석우는 망설임 없이 그 문을 열었다. 문을 열면서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은 길지 않았다. 나무.
문의 너머에는 단정하게 정리된 방이 있었다. 크기만 네 배정도 크다 뿐이지 생김새는 박사의 연구실과 거의 같았다. 중간을 책장이 가로지르고 있었고 그 한 구석에 환이 앉아있었다.
“오는 것을 선택했군.”
“알려고 왔습니다. 교수님이 도대체 무슨 연구를 하는지 말입니다.”
환은 얼굴을 찌푸렸다.
“석우군, 자신에게 조금 더 솔직해지는 것이 어떤가? 자네는 분명 이 모든 곳의 상징적 의미를 명확하게 읽고 있네. 자네가 나와 ‘같은’ 교육을 받았고 나와 같은 길을 걸어왔다면 말이지.”
석우는 확신할 수 없었다. 실제로 자신이 헤매면서 느꼈던 것의 일부라도 맞는다면, 그렇다면 자신이 원했던 대로 이곳이 연구소일 수도 있다는 것일까. 환은 그런 그를 보면서 약간의 자랑이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이곳은 연구소였다네. 수많은 스폰서들이 제각기 다른 목적을 가지고 나에게 투자한 돈으로 건설한 연구소였지. 내 프로젝트가 얼마나 큰 힘을 가졌었는지, 또 얼마나 약했던 연구였는지 깨닫게 된 것은 연구가 끝난 다음이었지만 말일세. 그리고 난 쉽게 알 수 있었네. 자네가 그 연구에 대하여 알고 있다는 것 말이야.”
석우는 침을 삼켰다. 어두웠던 그 날 밤의 기억이 그에게 현실이 되어 다가오는 중이었다. 컴퓨터 억세스중에 우연히 보게 된 투자관련 자료.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던 한 연구의 타이틀과 그 안으로 얽혀 들어갔던 자신의 생각.
“네........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근무하던 제약 회사에서도 이곳에 투자하고 있었으니까요.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교수님의 연구는 끝났습니까?”
환은 먼저 물었다.
“자네는 자신의 의지로 이곳에 온 것이네. 만일 기업체에서 의뢰를 받고 오게 되었다면 그런 식으로 쉽게 흥분하거나 내 별 볼일 없는 잡담들에 신경 쓰지 않지.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나. 아니, 이곳까지 오면서 무엇을 얼마나 알게 되었는지 말해보게나.”
석우는 천천히 입을 뗐다.
“연구........ 끝났군요. 일반적인 상징대로 저 통로가 나무의 모양이라면 생명의 나무가 되겠지요. 이곳은 꼭대기이니 그 정점이 되겠군요. 성공하신 겁니까? 불사에 관한 연구가 말입니다.”
환은 힘없이 웃었다. 이어지는 환의 말은 석우에게는 희망이 될 수도, 절망이 될 수도 있는 말이었다.
“생명의 나무라....... 여러 실험을 동시에 하고자 그렇게 만든것이지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네. 그러고 보면 흔히들 그렇게 말했지. 선악과가 자라는 나무일 수도 있지. 꼭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고 말일세.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자네 생각을 따르자면 이곳은 정점이 아닐세. 가장 밑이 되는 루트의 부분이지.”
안타까움이 섞여 흥분하기 시작한 석우에게는 그 말이 중요하지 않았다.
“불사에 관한 연구가 성공하신 겁니까?!”
환의 대답은 그와 환의 생각을 완벽하게 구별해 내는 데에 성공했다.
“내 연구는 불사에 관한 연구가 아니네. 하지만 창조와는 관계 있을 수도 있겠지.”
연구실 끝 방을 찾아 들어갔으나 방안에 환은 없었다. 석우는 교수를 찾아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어디에도 교수는 없었다. 천천히 방안을 돌아다니며 책들을 뒤지던 중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방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책장이 만나는 곳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장난삼아 무슨 귀중한 것이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장은 엄청나게 무거웠다. 옮길 수 없어서 그만 포기를 하려던 석우의 눈에 문 쪽으로 난 책장 면에 붙은 메모가 보였다. 들어올 때는 주의를 기울여 보지 않았었는데, 메모는 기다렸다는 듯이 밤색 배경에 노란색으로 크게 붙어있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나를 찾고 싶다면 뒷면을 보지 말게. 하지만 자네가 찾는 것을 찾고 싶다면 뒷면을 봐도 좋네.”
석우는 뒤를 보았다. 지시문이 하나 적혀있었다.
“지금 메모가 붙어있는 책장을 당겨라”
책장은 여전히 무거웠다. 하지만 힘을 약간 주자 그 책장은 이상하게 쉽게 미끄러졌다. 그리고 손으로 간단하게 열고 닫을 수 있는 문이 하나 나왔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문은 쉽게 닫혔다. 문이 닫히자마자 이상한 소리가 났고, 석우는 당황했다. 한참동안 이상한 소리가 났다. 어디론가 내려가는 듯한 기분에 그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역시’ 그 방 만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사실로 다가오자 무엇 때문인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곧 철컹하는 소리가 나고 문이 다시 열렸을 때, 석우의 눈에는 이제 낮이 익어가는 환의 방이 아닌 앞으로 벋어있는 긴 통로가 나타났다.
잠시 멍해있던 석우에게 떠오른 의문들은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었다. 이곳은 어디인가- 와 왜 이곳에 자신이 와 있는가― 라는 것들. 8층인 건물높이를 생각할 때 위로 올라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6층이나 되는 곳에서 어떤 방법을 이용하여 내려갔단 말인가. 뒤의 문이 천천히 닫히자 석우는 문득 정신이 들었다. 실제로 자신이 있는 공간이 내려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부속 건물을 받치는 커다란 기둥들. 지름이 삼 미터가 넘으니 그 안을 이용한다면 이런 식의 기관도 가능하다.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길게 뻗은 줄로만 알았던 통로는 이십 미터가 채 가기 전에 끝나있었다. 어두침침하던 통로의 끝에서 석우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문을 열어젖혔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연구소처럼 보이는 시설이었다. 문의 뒤에는 계속 이어지는 통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점은 통로의 양옆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문이 나 있다는 점이었다. 잠시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하던 그는 우선 왼 쪽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문을 열었다. 문 너머로는 통로가 또 있었고, 그 통로의 중간으로 문들이 또 나있었다. 석우는 일단 그 곳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앞으로 약간 가서 오른 쪽으로 나있는 문을 열었다. 문의 너머에는 또 통로가 있었으며, 그 가운데 또 문들이 나 있었다. 석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문으로 들어갔다. 왼쪽으로 나 있는 문들 중 하나를 골라 또 들어갔다. 그 곳에는 또 통로가 나 있었다.
석우는 당황했다. 일단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로 하고 뒤를 찾아 나갔다. 그런데 원래 길이 나오지 않았다. 원래 틀었던 방향을 기억하지 못하고 어딘가에서 반대방향을 찾아 나갔다고 생각했다. 겁이 난 석우는 되는대로 마구 문을 열며 통로사이를 헤매기 시작했다.
시간감각이 없어진 후에는 지쳐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여기서 계속 길을 잃게 되는 것인가 하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차라리 앉아서 사람들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연구소는 왜 만든 거야! 그런데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무엇인지 분명히 잡히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생각이 어렴풋이 만들어 낸 무언가와 상충되는 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왜 이 곳이 연구소라는 생각이 들었을까.
처음 책장 사이를 들어섰을 때부터 그는 한번도 연구실에 관계된 어떤 것을 보지 못했었다. 꼭 생물학 연구소가 아니더라도, 이곳은 단순히 통로의 나열일 뿐 어디에서도 연구소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었다. 그런데 왜
석우는 생각했다. 나는 이곳을 연구소라고 단정 지었을까.
여러 연구소들을 다니던 기억이나 대학시절 의학 실습을 할 때의 경험에서 나오는 감각. 그런 것이 그렇게 생각했다고 만들기에는 무언가가 약했다.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모순이었다. 그럼 이 곳은 연구소가 아니라 그냥 통로 뿐인건가. 내가 ‘찾고자’ 하는 곳이 연구소이기 때문에 이곳을 연구소라고 단정 지은 걸까.
그는 웃었다. 완벽히 자신의 감정에 놀아났기 때문이겠지만 자신의 생각에 대한 부끄러움 같은 것은 없었다. 석우는 절박했다. 급한 일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 곳을 연구소라고 착각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렇다면, 단순히 통로일 뿐이라면 분명 기하학적으로 가능한 모양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미로처럼 느끼고 있지만 실제로는 미로가 아닐 것이다. 석우는 일어서서 자신이 있는 통로의 끝을 보았다. 그리고 금방 자기가 통과해 온 문을 같이 보았다. 거의 같았지만 약간 달랐다. 자신이 있는 통로의 길이가 약간 짧았다. 자신의 착각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지자 석우는 전에 자신이 왔던 통로를 향해 걸었다. 입구부분이 제일 길고 나머지로 갈수록 점점 말단부에 가까워질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몇 번의 착오 끝에 그는 자신이 처음 통과해온 문의 앞에 설 수가 있었다.
그러나 석우는 올라갈 수가 없었다. 헤매고, 돌아왔지만 아무것도 본 것이 없었다. 물론 계속 감추려고 했던 자신의 초조함을 직접 대면하고 조소까지 할 수 있었지만, 자신은 수많은 말단부중 그 어떤 한 곳도 실제로 보지는 못했지 않은가.
석우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하지만 다른 어떤 옆문도 돌아보지 않았다. 석우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갔고, 결국 길의 정면에 있는 또 다른 문을 보자 석우는 망설임 없이 그 문을 열었다. 문을 열면서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은 길지 않았다. 나무.
문의 너머에는 단정하게 정리된 방이 있었다. 크기만 네 배정도 크다 뿐이지 생김새는 박사의 연구실과 거의 같았다. 중간을 책장이 가로지르고 있었고 그 한 구석에 환이 앉아있었다.
“오는 것을 선택했군.”
“알려고 왔습니다. 교수님이 도대체 무슨 연구를 하는지 말입니다.”
환은 얼굴을 찌푸렸다.
“석우군, 자신에게 조금 더 솔직해지는 것이 어떤가? 자네는 분명 이 모든 곳의 상징적 의미를 명확하게 읽고 있네. 자네가 나와 ‘같은’ 교육을 받았고 나와 같은 길을 걸어왔다면 말이지.”
석우는 확신할 수 없었다. 실제로 자신이 헤매면서 느꼈던 것의 일부라도 맞는다면, 그렇다면 자신이 원했던 대로 이곳이 연구소일 수도 있다는 것일까. 환은 그런 그를 보면서 약간의 자랑이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이곳은 연구소였다네. 수많은 스폰서들이 제각기 다른 목적을 가지고 나에게 투자한 돈으로 건설한 연구소였지. 내 프로젝트가 얼마나 큰 힘을 가졌었는지, 또 얼마나 약했던 연구였는지 깨닫게 된 것은 연구가 끝난 다음이었지만 말일세. 그리고 난 쉽게 알 수 있었네. 자네가 그 연구에 대하여 알고 있다는 것 말이야.”
석우는 침을 삼켰다. 어두웠던 그 날 밤의 기억이 그에게 현실이 되어 다가오는 중이었다. 컴퓨터 억세스중에 우연히 보게 된 투자관련 자료.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던 한 연구의 타이틀과 그 안으로 얽혀 들어갔던 자신의 생각.
“네........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근무하던 제약 회사에서도 이곳에 투자하고 있었으니까요.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교수님의 연구는 끝났습니까?”
환은 먼저 물었다.
“자네는 자신의 의지로 이곳에 온 것이네. 만일 기업체에서 의뢰를 받고 오게 되었다면 그런 식으로 쉽게 흥분하거나 내 별 볼일 없는 잡담들에 신경 쓰지 않지.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나. 아니, 이곳까지 오면서 무엇을 얼마나 알게 되었는지 말해보게나.”
석우는 천천히 입을 뗐다.
“연구........ 끝났군요. 일반적인 상징대로 저 통로가 나무의 모양이라면 생명의 나무가 되겠지요. 이곳은 꼭대기이니 그 정점이 되겠군요. 성공하신 겁니까? 불사에 관한 연구가 말입니다.”
환은 힘없이 웃었다. 이어지는 환의 말은 석우에게는 희망이 될 수도, 절망이 될 수도 있는 말이었다.
“생명의 나무라....... 여러 실험을 동시에 하고자 그렇게 만든것이지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네. 그러고 보면 흔히들 그렇게 말했지. 선악과가 자라는 나무일 수도 있지. 꼭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고 말일세.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자네 생각을 따르자면 이곳은 정점이 아닐세. 가장 밑이 되는 루트의 부분이지.”
안타까움이 섞여 흥분하기 시작한 석우에게는 그 말이 중요하지 않았다.
“불사에 관한 연구가 성공하신 겁니까?!”
환의 대답은 그와 환의 생각을 완벽하게 구별해 내는 데에 성공했다.
“내 연구는 불사에 관한 연구가 아니네. 하지만 창조와는 관계 있을 수도 있겠지.”
5..
“이 곳에서의 연구는 끝났네. 엄청나게 쓰였던 수많은 기자재들이나 실험도구들은 전혀 찾아볼 수 없지. 하지만 결과는 없어. 아마 그건 전적으로 바보 같았던 나 때문이지.”
석우는 지금까지 잡고 있던 끈을 놓아버린 듯 멍한 상태였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환의 넋두리에 대응해서 말할 뿐이었다.
“무슨 연구였기에 그런 겁니까........”
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있는 것이라고는 서재뿐인데도 그는 다른 것을 보는 듯 했다. 실제로 다른 것이 원래는 그 자리에 있었었다. 두 번 째 전공인 정형의학의 정점에 도달하기 위해 생명공학의 힘을 빌리고자 했던 흔적들. 하지만 진정한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순간에는 오직 환만이 그 사실을 알고 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수많은 동물들이 죽어갔지....... 자네도 알다시피 내 전공은 심리학이네. 내가 두 번째 전공으로 정형학을 택해서 몰두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지. 물질계에서의 심리학의 위치에 정형학이 있었기 때문이었지. 망가진 부분을 고친다. 심리학도 기본적인 입장에서는 똑같지. 어떻게 보면 정형학과 심리학은 같은 모습을 가진 학문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어. 하지만 심리학은 정형학보다 넓었지.
어느 순간 그것을 알게 되었네. 정형학의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보철수준의 것들이 아니라 생명공학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일세. 당시 내 흥미를 끌던 것은 게코류등의 도마뱀붙이나 도마뱀들이었네. 그들은 자기복원이라는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인간을 치료하는 의학으로서의 정형학이 추구해야 할 마지막 목표가 아닐까 생각했다네.
석우는 되물었다.
“그럼 연구가 끝났다고 했으니 결과는 어디에 있습니까.......”
환의 얼굴이 순간 질리는 것 같다고 석우는 생각했다.
“연구는 실패였네. 완전히 실패였어. 분명 나는 내가 원하던 결과 이상을 얻었네. 문제는 여러 곳에서 났지. 그 상상이상의 결과는 어떤 의미에서의 불사로도 불릴 수 있는 것이었네.”
이야기를 듣던 그의 눈동자가 갑자기 모아지기 시작했다.
“어떤 종류의 불사란 말입니까? 영원히 사는 것 같은 불사를 말하는 겁니까? 제대로 말을 해보세요!”
석우의 안광을 바라보던 환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래. ‘자네가 바라는’ 류의 불사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다. 세포의 분화를 경이로울 정도로 빠르게 진행시킬 수 있었지. 모든 세포에는 완전한 하나의 개체를 이룰 수 있는 DNA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네. 보통 분화함에 따라 특정DNA가 강조되어 나머지 부분의 판독이 어려워지기도 하지. 하지만 내 실험의 결과는 부위에 관계없이 하나의 세포 안에 들어있는 DNA만을 가지고도 완벽하게 전체개체를 재생해 낼 수 있었네. 그 작용은 완전한 회복을 위해서는 어떻게 보면 필수불가결한 부분이었다네.”
석우는 그의 말에서 강렬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모든 말이, 과거형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아니, 연구의 결과가 실패라고 했으니 연구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게 나의 최선의 선택이었네. 그 부작용을 생각해보게. 그리고 나에게 자금을 대주며 내 연구결과를 체크하던 기관들에서 나온 연구원들은 무시무시한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했지. 실제로 이루어 질 수 있었네. 그건 지금까지도 나를 사로잡고 있다네. 악몽이면서도 책임 때문에 잊어버릴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기억이지.”
환은 왼손으로 책장들의 자리를 가리켰다.
“저기를 보게. 수많은 종류의 실험동물 들이 번성했던 자리네. 대부분의 동물들은 우리의 연구결과로 인공적으로 합성된 동물들이었지. 그리고 그들을 보면서 난 내 연구가 성공했다는 착각을 자주 하고는 했네. 자네가 무엇을 바라는지 확실히 알고 있네. 하지만 포기하게. 우리는 인간이네. 우리를 이렇게 만든 신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지. 왜 선악과와 불사가 바꾸어졌는지 생각해보았나?”
“선악과. 지혜를 얻고 불사를 잃는다. 지혜의 크기가 불사만큼 컸기 때문일까요.......”
환은 웃음 지었다. 그를 본 후에 본 적이 없었던 활달한 웃음이었지만, 그만큼 쓸쓸한 웃음도 본 기억이 없었다.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네. 그것은.......”
말을 하려던 환은 갑자기 석우에게 다른 말을 했다.
“자네가 이곳에 들어온 지 이틀이 지났네. 실종신고가 접수되기 전에 나가는 것이 좋겠네.”
말과 동시에 석우는 방 밖으로 나가야 했다. 환을 방 안에 남겨둔 채 문이 닫혔고, 석우는 계속 문을 세게 쳤지만 안에서는 어떠한 반응도 들려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석우는 되돌아 가야했다. 자동으로 작동되는 통로를 따라 다시 방으로 돌아오자, 갑자기 배가 엄청나게 고파지기 시작했다. 방에 걸린 시계의 날짜와 시간은 이미 다음날 저녁을 가리키고 있었다. 주머니를 만져보았다. 지갑이 없었다. 석우는 급히 은행 문 닫을 시간이 되었는지 시계를 바라보았다. 배가 고픈 만큼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석우는 지금까지 잡고 있던 끈을 놓아버린 듯 멍한 상태였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환의 넋두리에 대응해서 말할 뿐이었다.
“무슨 연구였기에 그런 겁니까........”
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있는 것이라고는 서재뿐인데도 그는 다른 것을 보는 듯 했다. 실제로 다른 것이 원래는 그 자리에 있었었다. 두 번 째 전공인 정형의학의 정점에 도달하기 위해 생명공학의 힘을 빌리고자 했던 흔적들. 하지만 진정한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순간에는 오직 환만이 그 사실을 알고 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수많은 동물들이 죽어갔지....... 자네도 알다시피 내 전공은 심리학이네. 내가 두 번째 전공으로 정형학을 택해서 몰두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지. 물질계에서의 심리학의 위치에 정형학이 있었기 때문이었지. 망가진 부분을 고친다. 심리학도 기본적인 입장에서는 똑같지. 어떻게 보면 정형학과 심리학은 같은 모습을 가진 학문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어. 하지만 심리학은 정형학보다 넓었지.
어느 순간 그것을 알게 되었네. 정형학의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보철수준의 것들이 아니라 생명공학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일세. 당시 내 흥미를 끌던 것은 게코류등의 도마뱀붙이나 도마뱀들이었네. 그들은 자기복원이라는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인간을 치료하는 의학으로서의 정형학이 추구해야 할 마지막 목표가 아닐까 생각했다네.
석우는 되물었다.
“그럼 연구가 끝났다고 했으니 결과는 어디에 있습니까.......”
환의 얼굴이 순간 질리는 것 같다고 석우는 생각했다.
“연구는 실패였네. 완전히 실패였어. 분명 나는 내가 원하던 결과 이상을 얻었네. 문제는 여러 곳에서 났지. 그 상상이상의 결과는 어떤 의미에서의 불사로도 불릴 수 있는 것이었네.”
이야기를 듣던 그의 눈동자가 갑자기 모아지기 시작했다.
“어떤 종류의 불사란 말입니까? 영원히 사는 것 같은 불사를 말하는 겁니까? 제대로 말을 해보세요!”
석우의 안광을 바라보던 환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래. ‘자네가 바라는’ 류의 불사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다. 세포의 분화를 경이로울 정도로 빠르게 진행시킬 수 있었지. 모든 세포에는 완전한 하나의 개체를 이룰 수 있는 DNA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네. 보통 분화함에 따라 특정DNA가 강조되어 나머지 부분의 판독이 어려워지기도 하지. 하지만 내 실험의 결과는 부위에 관계없이 하나의 세포 안에 들어있는 DNA만을 가지고도 완벽하게 전체개체를 재생해 낼 수 있었네. 그 작용은 완전한 회복을 위해서는 어떻게 보면 필수불가결한 부분이었다네.”
석우는 그의 말에서 강렬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모든 말이, 과거형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아니, 연구의 결과가 실패라고 했으니 연구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게 나의 최선의 선택이었네. 그 부작용을 생각해보게. 그리고 나에게 자금을 대주며 내 연구결과를 체크하던 기관들에서 나온 연구원들은 무시무시한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했지. 실제로 이루어 질 수 있었네. 그건 지금까지도 나를 사로잡고 있다네. 악몽이면서도 책임 때문에 잊어버릴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기억이지.”
환은 왼손으로 책장들의 자리를 가리켰다.
“저기를 보게. 수많은 종류의 실험동물 들이 번성했던 자리네. 대부분의 동물들은 우리의 연구결과로 인공적으로 합성된 동물들이었지. 그리고 그들을 보면서 난 내 연구가 성공했다는 착각을 자주 하고는 했네. 자네가 무엇을 바라는지 확실히 알고 있네. 하지만 포기하게. 우리는 인간이네. 우리를 이렇게 만든 신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지. 왜 선악과와 불사가 바꾸어졌는지 생각해보았나?”
“선악과. 지혜를 얻고 불사를 잃는다. 지혜의 크기가 불사만큼 컸기 때문일까요.......”
환은 웃음 지었다. 그를 본 후에 본 적이 없었던 활달한 웃음이었지만, 그만큼 쓸쓸한 웃음도 본 기억이 없었다.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네. 그것은.......”
말을 하려던 환은 갑자기 석우에게 다른 말을 했다.
“자네가 이곳에 들어온 지 이틀이 지났네. 실종신고가 접수되기 전에 나가는 것이 좋겠네.”
말과 동시에 석우는 방 밖으로 나가야 했다. 환을 방 안에 남겨둔 채 문이 닫혔고, 석우는 계속 문을 세게 쳤지만 안에서는 어떠한 반응도 들려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석우는 되돌아 가야했다. 자동으로 작동되는 통로를 따라 다시 방으로 돌아오자, 갑자기 배가 엄청나게 고파지기 시작했다. 방에 걸린 시계의 날짜와 시간은 이미 다음날 저녁을 가리키고 있었다. 주머니를 만져보았다. 지갑이 없었다. 석우는 급히 은행 문 닫을 시간이 되었는지 시계를 바라보았다. 배가 고픈 만큼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6..
다음날 석우는 다시 환의 방으로 찾아갔다. 이제 그만 오겠다는 말을 하려는 참이었다. 왼쪽 팔에는 둘러대기에 적당한 이유가 적힌 보고서가 끼어있었다.
그저께와 같이 오랜 시간을 기다렸는데, 박사는 오지 않았다. 혹여나 해서 메모지가 또 붙어있는지 확인을 해 보았지만, 메모지는 붙어있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에 어제의 그 통로를 이용해 내려가볼까 생각을 해보았지만, 쉽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박사는 쉽게 오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제 그만 끝내야 되겠다는 생각에 석우는 아래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약간은 익숙한 통로를 따라 내려갔다. 통로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환이라고 석우는 확신했다. 일부러 이 곳으로 나를 끌고 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두 가지 생각이 그의 속에서 속삭였다. 구태여 그 기분 나쁜 곳으로 되돌아 갈 필요는 없다는 이성과 아직 놓지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끝을 내고 싶은 감정이 있었다. 석우는 감정의 판단에 몸을 내맡겼다.
석우는 바로 루트를 향해 갔다. 첫번째 문을 열고 옆의 수많은 가지들이 내뻗는 손을 뒤로 하고서 그는 두번째 문 앞에 다다랐다. 어떻게 할까. 석우는 망설이지 않은 것처럼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진동하는 비린내가 코를 막게 했다. 석우는 겨우 눈을 뜨고서 방을 보았다. 책장의 배치가 달라져 있었다. 가로세로로 방을 가리고 있는,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십자형으로 방을 가르고 있었던 책장이 각각의 벽을 찾아서 밀려있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석우의 눈에 언뜻 편안하게 보이는 침식의자가 있었다. 그 위로 환의 머리가 약간 빼곡히 나와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석우는 천천히 그 곳으로 향했다. 그러다 오른쪽으로 늘어진 환의 손에 들린 무엇을 보자 석우의 걸음이 빨라졌다.
환은 얇은 이불을 덮은 채로 웃고 있었다. 예의 창백한 얼굴로 환은 석우에게 물었다.
“지갑을 놓고 갔더군…”
“그 사진을 보셨군요. 왜 그걸 꺼내서 들고 계시죠?!”
“내 머릿속에서 모든 고리가 다 이어졌거든. 나는 탐정은 아니지만 그 정도의 추리를 할 만큼은 능숙하다네.”
석우는 유명했던 그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사물을 바로 꿰뚫어보는 능력은 복잡한 과정에서 나오지만, 본인에게는 간단한 하나의 길만을 가지고 있다. 모든 이론이나 억측은 직관에서 나온다. 직관은 그래서… 위험한 동시에 때로는 정확하다.’
“네……. 그 사람의 이름은 상아라고 합니다. 제가 정말로…”
“됐다네. 아픈 상처는 영원히 치료할 수는 없어도 묻어둠으로써 편안해 질 수는 있지. 사랑했던 사람을 잃었다는 것… 실례가 될 수 있겠지만…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가? 아.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말게나. 학자적 호기심은 어쩔 수 없어서 말일세. 미안하네.”
“사고였습니다. 그저 아주 약간 큰 교통사고 였습니다. 저에게 오는 길이었지요. 나중에 현장에 달려가니 시신은 뭉개져 보여줄 수 없다면서 머리카락만 한 줌 주더군요.”
환은 담담한 석우를 보면서 미소지었다. 석우는 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짧았지만 행복했습니다. 정말 사랑했었으니까요… 박사님. 전 이제 떠나야 할 때입니다. 정말 이상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박사님과 함께 있을 때에 편안했습니다. 그 순간만은 살아있는 것 같았거든요.”
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석우는 그를 보았다. 그의 눈은 풀려있었다. 짧은 비명을 지르며 석우는 환을 잡았다. 그 때문에 눌린 흰 천 이불에 피가 진하게 배어나왔다. 떨리는 손으로 그는 천을 끌어냈다.
환의 가슴과 배 부분은 거의 파여져 있었다. 빈 곳에서는 피가 마구 배어나왔다. 심장이 있었어야 할 자리에는 빈 공간만이 있었다. 천을 벗긴 후에 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진한 피냄새가 배어나왔다. 석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의학실습 때에나 배운 응급처치도 심장이 없을 때의 경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득 석우는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의 눈이 심장에서 흐르는 피를 따라 환의 팔을 타고 내려왔다. 이미 축 늘어져버린 환의 팔 끝에 넓은 응접실이나 서재 같은 그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피펫과 함께 작은 통이 있었다. 피는 안에 고이고 있었다. 통의 옆에는 푸른빛을 띠는 작은 병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물이 안들어갈 정도로 잘 봉해진 봉투가 하나 있었다. 석우는 그 쪽으로 가 봉투를 잡았다. 봉투에는 아주 짧은 글이 적혀있었다.
[난 네가 원하는 것을 줄 수도 있다. 자네… 감당할 수 있겠나…]
석우는 정신없이 그 봉투를 뜯었다. 내용을 따라 읽어 내려가는 눈빛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봉투와 환과 병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그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피가 흘러내리는 환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귀에다가 대고 조용히 말했다.
“아직…. 답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답을 내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석우는 조용히 일어났다. 눈 앞에 전에 실험실로 쓰여 수많은 동물들이 살고 죽어갔던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은 서재의 모습이 되어 있는 그 곳을 석우는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그는 앞으로 걸어가서 서재의 한쪽 끝을 잡고 조용히 밀었다. 서재는 원래 없었던 것 처럼 한쪽으로 밀려났다. 그 문을 잡고 석우는 잠시 망설인 후 들어갔다. 한 손에는 사진과 지갑이, 한 손에는 푸른색 약병이 있었고 사진 뒤에는 약간 긴듯한 머리카락이 정성스레 붙어 있었다.
몇 시간동안 그는 나오지 않았다. 중간에 잠깐 나와 환의 피가 고인 통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다가 그것을 들고 들어간 것이 전부였다.
그저께와 같이 오랜 시간을 기다렸는데, 박사는 오지 않았다. 혹여나 해서 메모지가 또 붙어있는지 확인을 해 보았지만, 메모지는 붙어있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에 어제의 그 통로를 이용해 내려가볼까 생각을 해보았지만, 쉽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박사는 쉽게 오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제 그만 끝내야 되겠다는 생각에 석우는 아래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약간은 익숙한 통로를 따라 내려갔다. 통로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환이라고 석우는 확신했다. 일부러 이 곳으로 나를 끌고 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두 가지 생각이 그의 속에서 속삭였다. 구태여 그 기분 나쁜 곳으로 되돌아 갈 필요는 없다는 이성과 아직 놓지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끝을 내고 싶은 감정이 있었다. 석우는 감정의 판단에 몸을 내맡겼다.
석우는 바로 루트를 향해 갔다. 첫번째 문을 열고 옆의 수많은 가지들이 내뻗는 손을 뒤로 하고서 그는 두번째 문 앞에 다다랐다. 어떻게 할까. 석우는 망설이지 않은 것처럼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진동하는 비린내가 코를 막게 했다. 석우는 겨우 눈을 뜨고서 방을 보았다. 책장의 배치가 달라져 있었다. 가로세로로 방을 가리고 있는,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십자형으로 방을 가르고 있었던 책장이 각각의 벽을 찾아서 밀려있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석우의 눈에 언뜻 편안하게 보이는 침식의자가 있었다. 그 위로 환의 머리가 약간 빼곡히 나와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석우는 천천히 그 곳으로 향했다. 그러다 오른쪽으로 늘어진 환의 손에 들린 무엇을 보자 석우의 걸음이 빨라졌다.
환은 얇은 이불을 덮은 채로 웃고 있었다. 예의 창백한 얼굴로 환은 석우에게 물었다.
“지갑을 놓고 갔더군…”
“그 사진을 보셨군요. 왜 그걸 꺼내서 들고 계시죠?!”
“내 머릿속에서 모든 고리가 다 이어졌거든. 나는 탐정은 아니지만 그 정도의 추리를 할 만큼은 능숙하다네.”
석우는 유명했던 그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사물을 바로 꿰뚫어보는 능력은 복잡한 과정에서 나오지만, 본인에게는 간단한 하나의 길만을 가지고 있다. 모든 이론이나 억측은 직관에서 나온다. 직관은 그래서… 위험한 동시에 때로는 정확하다.’
“네……. 그 사람의 이름은 상아라고 합니다. 제가 정말로…”
“됐다네. 아픈 상처는 영원히 치료할 수는 없어도 묻어둠으로써 편안해 질 수는 있지. 사랑했던 사람을 잃었다는 것… 실례가 될 수 있겠지만…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가? 아.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말게나. 학자적 호기심은 어쩔 수 없어서 말일세. 미안하네.”
“사고였습니다. 그저 아주 약간 큰 교통사고 였습니다. 저에게 오는 길이었지요. 나중에 현장에 달려가니 시신은 뭉개져 보여줄 수 없다면서 머리카락만 한 줌 주더군요.”
환은 담담한 석우를 보면서 미소지었다. 석우는 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짧았지만 행복했습니다. 정말 사랑했었으니까요… 박사님. 전 이제 떠나야 할 때입니다. 정말 이상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박사님과 함께 있을 때에 편안했습니다. 그 순간만은 살아있는 것 같았거든요.”
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석우는 그를 보았다. 그의 눈은 풀려있었다. 짧은 비명을 지르며 석우는 환을 잡았다. 그 때문에 눌린 흰 천 이불에 피가 진하게 배어나왔다. 떨리는 손으로 그는 천을 끌어냈다.
환의 가슴과 배 부분은 거의 파여져 있었다. 빈 곳에서는 피가 마구 배어나왔다. 심장이 있었어야 할 자리에는 빈 공간만이 있었다. 천을 벗긴 후에 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진한 피냄새가 배어나왔다. 석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의학실습 때에나 배운 응급처치도 심장이 없을 때의 경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득 석우는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의 눈이 심장에서 흐르는 피를 따라 환의 팔을 타고 내려왔다. 이미 축 늘어져버린 환의 팔 끝에 넓은 응접실이나 서재 같은 그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피펫과 함께 작은 통이 있었다. 피는 안에 고이고 있었다. 통의 옆에는 푸른빛을 띠는 작은 병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물이 안들어갈 정도로 잘 봉해진 봉투가 하나 있었다. 석우는 그 쪽으로 가 봉투를 잡았다. 봉투에는 아주 짧은 글이 적혀있었다.
[난 네가 원하는 것을 줄 수도 있다. 자네… 감당할 수 있겠나…]
석우는 정신없이 그 봉투를 뜯었다. 내용을 따라 읽어 내려가는 눈빛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봉투와 환과 병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그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피가 흘러내리는 환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귀에다가 대고 조용히 말했다.
“아직…. 답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답을 내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석우는 조용히 일어났다. 눈 앞에 전에 실험실로 쓰여 수많은 동물들이 살고 죽어갔던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은 서재의 모습이 되어 있는 그 곳을 석우는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그는 앞으로 걸어가서 서재의 한쪽 끝을 잡고 조용히 밀었다. 서재는 원래 없었던 것 처럼 한쪽으로 밀려났다. 그 문을 잡고 석우는 잠시 망설인 후 들어갔다. 한 손에는 사진과 지갑이, 한 손에는 푸른색 약병이 있었고 사진 뒤에는 약간 긴듯한 머리카락이 정성스레 붙어 있었다.
몇 시간동안 그는 나오지 않았다. 중간에 잠깐 나와 환의 피가 고인 통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다가 그것을 들고 들어간 것이 전부였다.
7..
“죄송합니다. 다시 학교를 떠나야겠습니다.”
학장은 당황했다.
“왜 갑자기 떠난다는 건가? 전에 자청해서 맡은 일이 지겹기라도 한 건가? 그럴 줄 알았지. 자네는 다른 할 일이 많아. 잠깐만 기다리게. 지금 인사부를 호출…”
“아닙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난 후에 받아주신다면 돌아오겠습니다. 조사결과는 예산부에 보고해놓았습니다. 제 일은 끝났습니다… 이제 쉬어야 할 때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물을 마시며 학장은 석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를 보내주기로 결정했다. 석우의 표정은 정말 편안해보였다. 이대로 보내주어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알았네. 그럼 조심하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러고보니 이환군은 어떻게 되었나?”
석우는 그냥 약간 쓸쓸하게 웃었을 뿐이었다. 뒤돌아 나가는 석우에게 학장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애기가 참 예쁘군. 누구의 아이인가?”
“제…. 딸입니다.”
학장은 당황했다.
“왜 갑자기 떠난다는 건가? 전에 자청해서 맡은 일이 지겹기라도 한 건가? 그럴 줄 알았지. 자네는 다른 할 일이 많아. 잠깐만 기다리게. 지금 인사부를 호출…”
“아닙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난 후에 받아주신다면 돌아오겠습니다. 조사결과는 예산부에 보고해놓았습니다. 제 일은 끝났습니다… 이제 쉬어야 할 때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물을 마시며 학장은 석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를 보내주기로 결정했다. 석우의 표정은 정말 편안해보였다. 이대로 보내주어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알았네. 그럼 조심하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러고보니 이환군은 어떻게 되었나?”
석우는 그냥 약간 쓸쓸하게 웃었을 뿐이었다. 뒤돌아 나가는 석우에게 학장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애기가 참 예쁘군. 누구의 아이인가?”
“제…. 딸입니다.”
편지..
친애하는 석우군에게
아, 자네라면 여기까지 와서 이걸 읽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은 하지만, 확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아는 나로선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네. 확신이 만들어낸 엄청난 실수들과 어리석음 끝에 떠오른 헛된 진리에 몸을 떨면서 괴로워하면서도 또한 과학자이기에 멈출 수가 없었던 기억들이 언제까지 나를 괴롭힐지는 알 수 없네.
처음 계획된 프로젝트는 간단했지. 일시적으로 자체복구능력을 향상시켜 손상된 부분을 재생한다는 것이 기획의 모티브였네. 획기적인 연구가 없는 한 현재에는 불가능한 방법이었기에 여러 의학관련 기업들에서는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식으로 비용을 감당하면서도 실제 연구에 관해서는 많은 관여를 하지 않았지. 결과가 나오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안되었고 하고 간단하게 생각해버린 듯 하네.
이 편지는 자네가 정말 찾고자 하는 대답에 관한 내용이 아닐지도 모르네. 단지 내 과오가 무엇이었고 왜 연구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가를 자네에게 알림으로써 조금이라도 짐을 덜어보고 싶은 욕망에서였는지도 모르겠네. 지금 내 모습을 보게. 죽어있을지 살아있을지 알 수 없네만, 아마 죽어있을 것이라고 짐작해보네. 아니, 일부러 죽기를 바라고 있다네. 자네가 보는 내 모습이 내가 도달한 결론이네.
수많은 생명공학적 접근 끝에 도달한 곳은 의외로 간단했네. 발전정도가 낮은 동물일수록 자기복구능력이 강하지. 히드라를 떠올리게. 수없이 칼질을 해서 진흙처럼 만든 다음에 두개로 따로 떼어 뭉쳐놓아도 두 덩이가 또 새로운 개체로서 분화하지. 구조가 간단해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약간 다른 각도에서 접근을 했다네. 자기복구능력을 말 그대로 하나의 능력이라고 보고 고등생물에 부여할 수는 없을까. 그래서 찾아낸 것이 자네가 보는 그 물질이지.
DNA의 분석을 통한 완벽한 자기복구능력을 가진 효소물질. 실제로는 효소가 아니지만 편의상 우리는 효소라고 생각해왔네. 결과는 대성공이었지. 몸이 삼분의 일 가까이 토막 난 흰쥐까지도 완벽하게 재생해 냈다네. 놀라운 일이지. 단지 우리가 몰랐던 한 가지 무서운 사실이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일세.
생각해보게. 만일 능력으로서의 자기복구가 가능하다면 왜 고등 동물들에게는 그 능력이 허여되지 않았는가. 우리는 그 문제에 관해 생각을 해 보지 않았었지. 아예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가볍게 치부하고 넘어갔다네. 연구팀중 한 명이 무서운 생각을 해냈고, 우리는 끝나지 않는 죄값을 받아야 했지.
우리는 인간에게 실험을 할 수가 없었지. 이 사실이 밖에 알려지기 전에 완벽하게 부작용에 대한 연구가 끝나야 했기 때문이었다네. 하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일이었고, 때문에 우리는 참을 수 없어서 우리 자신에게 일종의 실험을 했다네. 그 물질을 투여해서 자신들에게 능력을 부여했지. 메스로 손가락을 도려내고 그 손가락이 다시 나는 것을 보면서 행복해 했던 이상한 시절이지. 손가락을 보던 한 연구원이 유행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생각해 냈었다네. 자네도 알걸세.
세계 어디에 가도 공통적으로 있는 이야기중의 하나로 인육섭취가 있지. 우리나라에도 몇가지 이야기가 있지. 어린아이의 골을 먹으면 건강에 좋다든지, 문둥병에 생간이나 뇌가 특효가 된다든지 하는 류의 이야기가 대중적이지. 그 연구원이 생각해 냈던 것은 우스갯소리로 유명했던 만두집 이야기였다네. 시체의 손가락을 잘라 만두에 넣으면 맛이 좋아진다는 이야기이지. 실제로 그 연구원은 호기심에 자신의 손가락을 먹어보았고, 그것이 실험의 종말의 시작이 되었다네.
자네는 알 수 있겠나. 사람고기가 얼마나 맛있는지 말일세. 보통 사람들은 알 수가 없네. 하지만 한 번 맛을 본 사람은 그 맛을 결코 잊지 못한다고 하지. 그 간단한 시도는 연구원들 사이에 빠르게 퍼졌다네. 너도나도 자신의 신체를 잘라 섭취하고서는 말로 하기 힘든 맛에 도취되고 말았지. 자신의 몸이 자신의 신체구조와 가장 비슷하기 때문일까. 인육은 기본적으로 맛있지만 자신의 신체는 중독을 일으킬 만큼이나 인상에 남지. 하나 둘씩 무리해서 죽어가면서야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네. 하지만 유혹을 뿌리치기에는 너무 약했지.
자네는 이해할 수 있겠나? 나는 자네에게 내 간을 대접한 적이 있었지. 자네는 아주 맛있게 먹더군. 당연한 것이지만, 인간이 강하다고 말하던 그 때 나는 아주 슬펐다네. 그러면서도 자네의 모습에 위안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 누구라도 어쩔 수 없었다는 면죄부의 느낌일까.
인간에게, 아니 왜 고등동물에게 완벽한 자기복구능력이 주어지지 않았는가. 기관의 분화가 심해져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하등동물은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본능이 자기복구능력에서 오는 욕망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강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너무나 약하다. 지혜의 크기가 불사보다 큰가? 그런 것이 아니라네. 지혜가 있으면 불사를 가질 수 없는 것은, 지혜가 자신의 불사에 탐닉하여 결국 불사를 포기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담을 보게. 지혜는 본능에 약함을 부여하지. 그걸 몰랐던 거야.
일부의 연구원이 자신의 소속회사에 그 사실을 알리고, 일부 제약회사에서는 심지어 인육을 식품으로 제조하자는 프로젝트까지 추진하기 시작했다네. 실제로 노동자들을-의미는 다르겠지만- 고용해서 그들의 신체를 잘라내고 복원하는 조건으로 월급을 주는 그런 계획이었지. 인간은 한없이 잔인하고, 그러면서도 정당한 자기만족의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 나는 그들에게 너무나 완벽한 조건을 제시한 것이었네. 내 실수였다.
대부분의 연구원들이 죽고 나서, 나는 연구가 실패했다고 비공식적으로 발표하기로 했다네. 그때까지 살아있는 연구원들은 모두들 지각이 있었지. 우린 자신들을 끝없이 저주하면서 모든 것을 묻어두기로 했네. 모든 연구결과는 정리되고, 모든 약품은 폐기되었네. 하지만 난 과학자네. 연구를 차마 버릴 수 없었던 마지막 결과가 지금 자네 눈에 보이는 파란색 약품이지. 우리는 인류의 지식에 대한 다른 하나의 해석을 비유해서 로제타-마나라고 이름 붙였다네.
그것이 자네에게 내가 하는 마지막 치료가 될 지도 모르겠네. 누가 이런 식으로 내 연구가 치료심리학의 다른 궁극에 이르게 될 줄 알았겠는가… 자네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망가져 있더군. 왜인지 알아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나름대로 치료방법도 세워 놓았다네. 집착을 버리라고 우선 말해야겠지만 앞의 로제타-마나를 보면서 내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겠나.
하나만 묻세. 그게 정말 중요한 사랑이 될 수 있는가? 몸은 되살릴 수 있겠지만 추억과 마음까지는 되살릴 수 없을걸세. 자네의 선택은 정신인가 육신인가? 자네가 그를 되살린다면 과연 그는 자네가 사랑하던 그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자네가 얻게 될 결과가 자네가 사랑하던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이 아니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겠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가 ‘보시기에 심히 좋아서’ 라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이것이 자네에게 주는 나의 어설픈 면죄부라네.
난 이미 결정했네. 아직 먹어보지 못한 심장을 먹어보기로 말일세. 육체의 유혹에 넘어가 있지만 지금 순간에는 알 수가 없다네. 과연 내가 정말 심장을 먹어보고 싶은 것인지, 그만 모든 책임을 버리고 다른 세상으로 떠나버리고 싶은 것인지 말일세.
자신의 답을 내게나.
환
p.s.:만일 원료가 모자라게 된다면, 내 피를 연구소 안의 원심분리기로 처리해서 뒤에 첨부한 방법대로 처리하게.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