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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2/25 inureyes 인크레더블, 언브레이커블 그리고 슈퍼영웅 5
어제 픽사의 인크레더블을 보았다. 기술력이라든지 하는 이야기들은 이미 이야기를 해봐야 손이 아픈 지경이 되었으니 넘어간다. 내용이 재미있는데, 슈퍼영웅들끼리 결혼을 해서 가정을 차리면 애들은 어떻게 될까, 슈퍼영웅때문에 비뚤어진 아이는 생기지 않을까, 슈퍼영웅들이 부순 것들에 대한 피해는 누가 보상하나- 등등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보았을 내용들을 가지고 즐거운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놓았다.

이렇게 재미있게 보았던 슈퍼영웅 영화가 얼마전에 있었다.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하고 나이트 샤말란이 만든 '언브레이커블'이었다. 영화의 플롯 및 설정이 코믹스를 완벽하게 따르는가 하면, 그 안에서 보통 사람이 슈퍼영웅이 되는 과정또한 멋지게 그려놓았다. 게다가 마지막의 1분간 3연속 반전- 알고보니 x가 x 였더라. 그래서 제목이 저렇게 붙고 대칭이 저렇게 되는거더라 + 악역과 선역의 우정과 배신이라는 코드가 그대로 녹아들었더라 + 그런데 마지막의 자막 형식하고 말투를 보아하니 이것 통째로가 애니메이션이었더라 - 은 당시에 유행붐이 일기 시작한 슈퍼영웅 영화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충격을 주었다.

슈퍼영웅은 미국의 문화중 하나이다. 초인적인 능력을 묘사할 때, 가까운 일본은 로보트나 신을 중심으로 한 표현및 묘사를 한다. 중국은 일단 사람이 수련만하면 휭휭 날아다닌다. 우리나라에선 현실에 바탕을 둔 강한 유교사상때문에 그러한 개념이 쉽게 환영받지 못한다. 그래서 위에 말한 문화들이 그 영향력의 차이에 따라 혼재되어 존재한다.

이러한 문화의 영향력은 논리를 신봉하는 성인들보다는 청소년이나 유소년층을 중심으로 쉽게 전파된다. 그러한 아이들이 크고 다시 문화코드를 재창조한다. 인크레더블이나 언브레이커블은 그러한 피드백의 결과들이다. 대중 문화를 창조하는 과정이 선순환적이라는 점은 일방적으로 수입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부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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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크레더블이나 언브레이커블은 예전의 슈퍼영웅 코믹스 작품들의 기조에 깔려있었지만 그들이 다루지 못했던 부분을 보여준다.

슈퍼영웅은 인간을 돕는 존재이다. 코믹스나 영화, 드라마 속에서 그들은 인류를 위해 수많은 일들을 한다. 하지만 하고 싶다고 해서 모두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며 그들이 그렇게 하는 기본적인 이유 또한 하나이다. "The great power comes with the great responsibility."

사람들은 슈퍼영웅에 열광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사람들의 가슴 깊은 곳에 있는 숨겨진 의식을 건드린다. 아래에 잠자고 있는 열등의식. 슈퍼영웅은 관객들과의 동질화를 통하여 사람들의 열등의식의 대변자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반면 관객들의 열등의식또한 자극한다.

그러한 '부작용'을 막아보고자 제작자들은 고민하는 영웅들을 만들어냈다. "사실은 이들도 인간이다. 자신의 어떤 점들을 포기하며 살아가야 하는, 능력만을 빼면 똑같은 인간이다." 최근에 상영한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2' 에서는 그러한 점을 너무나 확실히 보여준다. (Gasiorowicz의 양자책 2판을 들고 여자친구에게 힘없이 전화를 거는 물리학도 스파이더맨이라니 ㅠ_ㅠ) 또한 다른 방법도 있다. "이들은 너무 뛰어난 능력때문에 사회로부터 버림받았다." X-men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그렇게되면 이들의 싸움은 현실과의 괴리가 생기게 된다. 그러한 단점들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그러한 고민의 대답은 아직 쉽게 나오지 않는듯 하다. 과도기에서, 슈퍼영웅들은 더이상 슈퍼가 아니라 액션영웅들이 되고 있다.

그러한 점을 인크레더블과 언브레이커블은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보여준다. 인크레더블에서는 아예 슈퍼영웅들은 퇴출당해 버렸다. 언브레이커블에서는 슈퍼영웅이 할 수 있는 일은 수건을 둘러쓰고 들어가 도둑을 사투끝에 목조르는 일이었다. 전자는 말그대로 슈퍼영웅들이 괄시당하는 시대를 그렸으며, 후자는 슈퍼영웅이 얼마나 '슈퍼'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미국에서는 왜 슈퍼영웅이 생겼고 대중은 그들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superman'은 플라톤이 만든 말이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 2000여년 전의 플라톤의 바람처럼 인간은 이루지 못한 꿈을 그들에게 투영하는 동시에 그 존재에 기대고 싶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현실에서도 슈퍼영웅을 찾는다. 정부는 위기를 탈출하기 위하여 슈퍼영웅을 만들고, 시장은 일관된 움직임을 위하여 슈퍼영웅을 찾는다. 시민은 답답한 세상을 해결해줄 슈퍼영웅을 찾는다. 그렇지만 조지 부시가, 그린스펀이 슈퍼영웅인가? 그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의 어이없음을 알기에 초능력을 가진 슈퍼영웅은 계속해서 태어나고 사라지며 대중의 가슴속에 각인된다.

언제나 슈퍼영웅들이 남기는 말은 못들은 척 가슴속에서 지워가며 말이다.
"영웅은 네 안에 있어."
아마 코믹스를 덮은 후나 영화관에서 나온 후에 그 말이 반시간만에 현실의 공기속으로 증발해버리지 않고 가슴속에 오래 남아있도록 해주는 (마치 비아그라 같은) 약이 나온다면 현실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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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5 17:26 2004/12/25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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