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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 이정표

빚어내기/살아가기 | 2006/01/11 15:27 | inureyes
세월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흘러간다는 점이 좋다. 동시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쉬지않고 흘러가기 때문에 싫다. 시간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듯이 보이지만 한 지점을 잡으려고 하면 잡히지 않는다.

이젠 세월이 저절로 흘러가는 것이 싫은 때가 되었다. 어떤 일을 하든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 나이가 되는 것은 즐거운 동시에 무서운 일이다.

*

이번 방학에 하고 있는 일 또는 해야 할 일 정리.

1. 석사논문 관련 proposal 정리. 학기 중 머리를 굳히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다루어 보았던 인류학 관련 이론은 일단 연구 폴더의 어딘가로 잠수시켰다. 지금은 작년동안 해 보고는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던 수많은 생각들을 머리 윗쪽으로 끄집어 내놓고 굴리는 중이다. 이 중에 어떤 것이 최종 후보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는 유력한 것이 하나 올라와 있다.

문제는 그 주제가 너무 포괄적이 될 수도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점과, 수학이 많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계산에 그리 능하지 않은 입장에서는 미적분 주최 A4 협찬의 파티에 그다지 참석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그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이 너무 땡겨서 버리지를 못하고 있다.

다른 후보들도 있으니 일단 많이 생각하자. 어느정도 생각이 정리된 이후에는 공부를 할 것이다. 공부를 한 이후에는 선배들에게 물어볼 것이고, 구체화가 되면 교수님과 면담을 해야겠다. 3월 안으로 되었으면 좋겠지만 역시 저 계산 부분이 맘먹고 덤비지 않으면 안되는 부분이라 애꿎은 네트워크 코드만 잡고 노는 중이다.

2. 여행하기. 여행을 덜하게 된것도 좀 되었다. 연애를 하게 되면 여행을 덜하게 되나보다. 어딘가로 떠나는 것은 자신을 반추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러한 기회가 줄어든 것은 아쉽다. 왜 유람을 덜 다니게 되었을까.

그저께인가 우연하게 전양과 메신저로 여러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꽤 오래전인가부터 나도, 전양도 인도에 가고싶어했다. 전양은 이번 겨울에 인도에 갈 예정이라고 하였다. 말 한마디가 뇌리에 깊이 남았다.

'생각을 바꾸면 전혀 어려운 것이 없다'

여행을 가고 싶다 가고 싶다 하면서도 가지 못했던 그 이유들은 실은 여행이 귀찮거나 가기 싫은 마음에 스스로 만들어낸 이유이다. 그 이야기를 곱씹어보았다. 분명 예전엔 어려운 것이 없었다. 지금도 여러가지 안되는 이유들을 생각하고 있지만 뒤집어보면 그다지 이유는 되지 못한다. 존재하지 않는 벽을 스스로 만들어놓고 가로막히는 것은 가장 싫어하는 일들 중 하나이다. 그런데 어느샌가 스스로 그러고 있었다.

여러 곳을 가고, 보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한 시간이 스스로의 인생의 의미에 하나의 더함이 되도록.

3. 라이브러리 만들기. 물리학과 컴퓨터공학의 경계는 의외로 희미하다. 이전의 사람들이 꿈도 꾸지 못하던 계산들을 지금은 맘편히 컴퓨터에게 넘겨서 결과를 받을 수 있다. 앞으로 개인적으로 (또는 다른 분들과 함께)할 연구도 컴퓨터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한다.

여러가지 언어가 있다. 선호하는 언어는 LISP이지만, 이 언어는 폰 노이만 아키텍처와 상충된다. 폰 노이만 아키텍처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지금의 컴퓨터들에서는 아무리해도 성능이 나오지를 않는다. MATLAB도 좋다. 그런데 자바와 C가 혼합되고, 엄청난 덩치의 라이브러리와 수십개의 쓰레드를 안고 가는 언어라 역시 속도가 안 나온다.

다른 분야와는 달리 물리학에서는 계산 속도가 큰 문제가 된다. 속도가 두 배 차이나면 한 달 걸릴 계산이 두 달 걸린다. 물리학자들이 Fortran을 즐겨쓰는 이유로 Fortran으로 만들어진 과학 라이브러리들이 가장 많은 점을 자주 꼽는다. 하지만 Fortran이 어셈블리어와 1대1 대응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모든 언어중에서 가장 빠른 것도 중요한 이유이다.

Fortran은 싫고 속도는 필요하니 손에 가장 익숙한 C를 사용한다. 연구실에 들어와서는 명원이형의 (감탄밖에 안 나오는) 라이브러리를 사용하고 있다. 이 라이브러리를 기반으로 관련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 라이브러리를 만들고 있다. 시간이 되면 현재의 라이브러리에 대한 설명서도 만들고 싶다. 같이 연구를 할 사람들과 언젠가 배포 가능하게 될 날을 대비해야 할테니.

4. 연구참여 지도/ 저널클럽 석사과정이기 때문에 연구실에서 학부 연구참여생들의 지도를 맡고 있다. '고생을 해야 남는게 있다'가 어느새인가 인생의 좌우명 중의 하나가 되었다. 하여 학생들에게 고생을 시키는 중이다. 방학이 '힘들었지만 보람에 찬 시간이었다' 는 느낌을 받게하고 싶고, 받고 싶다.

이번 방학부터 석사 동기들끼리 저널클럽을 만들었다. 서로 다른 연구실에서 다른 연구를 하다가 보면 의사소통의 단절이 생긴다. 겉으로는 물리학이라는 커다란 분야로 묶여 있지만 그 안에서도 엄청나게 많은 세부 학문들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학제간 연구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아직까지는 부정적인 생각이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언급할 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의 생각은 학제간 뿐만 아니라 물리학이라는 학제 내에서도 제대로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석사 신입생들은 모두 연구실에서 이제 연구를 시작하는 단계이다. 덕분에 서로가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연구하고 있는지 설명하고 이해하기가 아직은 수월하다. 이러한 저널클럽이 계속 이어져서 학제 내의 다양한 분야 사이에서도 서로간의 유기적인 연계와 연구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이다.

5. 물리학 알리기. 글 쓰는 것이 취미이다. 작년 한 해동안은 너무나 큰 물리학의 외연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글을 쓸 기회가 없었다. 마음에 드는 책을 읽거나, 머릿속에서 생각이 줄줄 흐르면 일단 onenote에 담아 놓는걸로 만족하고는 했다.

작년 여름부터 참여하게 된 Crossroads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학문에서 느끼는 희열과 감동도 중요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그러한 감동을 알리는 일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리학자에게는 세상을 둘러보면 모든 것이 물리학인데, 물리학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렇지가 않다.

Crossroads는 좋은 웹저널이다. (개인적으로 그 철학과 내용에 대하여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가끔은 아직도 너무 어렵다. '물리학자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경우가 아직 많다. 가끔은 관심의 방향이 물리학자가 아닌 사람들과 다른 쪽으로 향한다.

철학과 물리학은 인간의 존재 이유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사유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형이상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일상 생활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물리학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쉽게(이게 중요하다) 설명해보고 싶다. 아마 주로 대학원에서 배우는 내용들을 요약하는 식이 되지 않을까 싶다. 글은 쓰지만 설명하는 일에는 능하지 않다. 예전에 해 본적이 없는 글쓰기라 하나의 도전이 될 것이다.

6. 여러가지 이야기 하기.
우연히 어떤 분이 블로그 스킨을 만들기 위하여 이 페이지의 소스를 가끔 들여다 본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세상에나. 이 스킨은 예전에 테이블로 만든 것을 대충 validation만 통과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 전혀 semantic하지 않다. 만약 누군가가 그렇게 참고할 줄 알았다면 지금처럼 class의 신병훈련소가 아니라 좀 더 semantic하게 만들어 놓았으리라. 말이 아닌 코드를 통해서, 하려는 의도가 없었던 이야기도 이렇게 다른식으로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IT에서 6개월은 영겁'이라는 빌 게이츠의 말이 아니라도, IT의 발전속도는 무시무시하다. 반면에 반대로 뒤집으면 IT만큼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분야도 드물다.

2000년에 xml에 대하여 스터디를 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6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다시 그 중요성이 알려지고 있다. 2년 전에 css based style과 xmlhttprequest를 이용한 동적 웹 코딩으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지금이 되어서야 semantic이나 Ajax라는 표현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한 경향에 대하여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었다. 당시에는 그럴 필요도, 그럴 방법도 없었다. 지금은 예전의 홈페이지보다는 열린 공간이다. 충분히 개인적이지만, 충분히 개방적이다. IT와 웹에 대해서도 꽤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7. 살아가기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지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앞에서 다가오고 뒤로 흐르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
살아가기 위해서 살아있으며
살아가기 위한 발걸음 때문에 시간이 뒤로 흘러가는 삶이 되도록.
순간순간을 만들어 나가겠다.


일단은 이렇게 이번 방학에 (또는 이번 방학부터) 할 일을 정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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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11 15:27 2006/01/11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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