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들어오며 컴퓨터 셋을 새로 조립했었다. 모니터로 modis 171A를 선택했는데, 기능에서나 성능에서나 가격면으로 여러 생각을 한 후에 고른 모델이었다. 일년 반을 함께 살아가나 싶더니, 어느 날부터 틱틱 소리를 내며 가끔은 얼굴을 팍 찡그리는 이유없는 투정을 부렸다. 어느날 아침 모니터는 책상 유리 아래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모니터가 죽고 나자 멀티(벌써 7년째가 되어가는 내 컴퓨터의 애칭이다)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니 혼자 뭘 하기는 하는데, 보여주질 않으니 알 수가 없었다. 드르륵드르륵. 딩동~ 딩딩동 ♪♬ ...머리는 안죽었구나. 하고 혼자 생각해 보다가 룸메이트와 함께 죽은 모니터를 옆에 두고 앞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나누고.
인스턴트 시대에 태어난 운명일까. 정신병에 걸려 버림받은 철경군의 컴퓨터에서 모니터를 뚝 떼었다.(무서운 세상이다) 연결했더니 멀티는 언제 그랬냐는듯이 딩동~ 딩딩동 ♪♬(이번에는 화면효과도 함께이다) 하고서는 얼굴을 활짝 내밀었다. ...뭐 당연하지만, 그래서 우리의 모디스는 횡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 종결 명령과 함께 수술도, 사건 원인 규명도 쏟아지는 기말 프로젝트들의 서류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소유는 빌린 것일 뿐이니 겸허하라는 이곡 선생의 말은 틀리지 않는가. 학기가 끝나면서 말도 아니고 소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철경군의 모니터는 제 주인을 찾아 갔다. 멀티는 또다시 입만 살아있는 신세가 되었고, 그 모습 그대로 서울로 실려왔다. 모니터도 함께 실려왔다. 한참을 방치해 두다 어느 순간 사건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여러가지 일이 있었다. 배달 되어온 이승환 시디를 들으러 PC방에 가야 하는 일이나(CD라디오는 어느새 동생 방의 미키마우스와 코알라 사이로 이민가 있었다) 문자가 안보이는 시스템 때문에 써니가 삐지는가 하면 집에 가서 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지인들의 이메일들에 답장을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결국 모니터는 테크노 마트 삼진시스템에서 부검에 들어갔다.
수술이 성공했다고 해서 찾아갔더니, 경과를 보는 도중에 또 죽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VCC의 교체가 문제가 되었는데, 교체와 테스트와 이것저것해서 결국 모니터를 고치는 데에 든 시간은 가득 채운 2주일이 되고 말았다. 소중히 아껴썼던 모니터는 흠집으로 가득했고, 수술을 무리하게 하려다 실수한 자국까지 남았다. ...바닐라 스카이에서의 탐 크루즈 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하지만 탐 크루즈 만큼 수술비가 많이 들었긴 했다.)
어떤 개체도 자체로 완전성을 가진다. 그것이 외부에서 보았을 경우에 불완전성이라고 해도 그렇다. 자체적인 완결성이 있어야 하나의 객체로 취급된다. 여러 부품을 사방에서 구입해서 한 곳에 놓은 후 쌓아놓고 만든 멀티도, 결국엔 그것들이 자체로 완전함을 보이기 때문에 '멀티' 라고 애칭을 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개체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의사소통의 기능을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담론을 구성하는 것은 의사소통 안에서만 가능하다. 외계인이 살고 있는 행성이 있다. 그런데 절대로 그 행성을 관측할 수도, 외계인을 만날 수도 없으면 있든 없든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 점에서 데리다의 선택 - 실제로 의미가 있는 것은 의사소통 그 자체이다 라는 - 은 틀리지 않았다.
성대가 없고 손이 없는 헬렌 켈러를 상상할 수 있을까?
루게릭 병이 심해져 손가락마저 까딱할 수 없게되면 그 후에도 호킹은 과학자인가.
두고두고 생각해 볼 문제이다. 정해진 답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