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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사람들과 생활하는 것은 즐거웠지. 아가씨가 오랫동안 여행을 해 왔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해 나가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어. 언제나 왁자지껄했지. 배가 한참 가다가 어느 순간이 되어 항구에 설 때면 창 밖으로 밖을 구경하면서 신기해하기도 했지. 내려가 보고도 싶었지만 복도를 벗어날 수가 없으니 아가씨는 그냥 바라보면서 좋아하기만 했어. 별의별 도시가 다 있었지. 아주 많은 지역을 거쳐 왔다고 생각했는데 작은 창을 통해서나마 아가씨 눈에 비친 것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희한한 도시들이었어. 내려보고 싶다고 생각할 때도 가끔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지.
꽤 오랫동안 아가씨는 배 안에 있었어. 언제 배에서 내릴지 감도 잡히지 않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었지. 가끔 배에 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곳 항구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도 보고 정리도 해보고 했어. 그렇게 여러 지방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아가씨는 정말 배에서 내려서 그런 지역들을 가보고 싶어졌지. 그런데 언제 내릴 수 있을지에 대해선 기약이 없잖아? 사실 공짜로 태워주는 것도 좀 신기한데. 하지만 언제 내릴 수 있을까 생각을 하니 복도가 너무 지겨워지기 시작했지. 가끔의 항구 풍경 뒤에 있는 망망대해들을 쳐다보다가 폭발할 때 즈음이 되었을 때, 아가씨는 뜻하지 않은 방문을 받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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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배에 타서 만났던 선원을 따라 아가씨는 대강 짐을 꾸려서 방을 옮겼어. 1등 선실에 새 승객들이 많이 타서 자리가 없다면서 선원은 아가씨를 2등 선실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고 했어. 아가씨는 슬쩍 전에 가장 위에서 본 선실이 생각났지. 그런데 다행일지 몰라도 전의 그 분위기 침울한 선실은 아니었어. 복도를 따라 죽 가다가 계단을 한 층 내려갔지. 그리고 전에 배가 대었던 곳이 아닌 다른 쪽의 복도를 따라 걸어갔어. 한 방문 앞에 선 선원은 문을 열었지. “여기가 새 방입니다.” 하고는 선원은 금방 사라져버렸어.
새 방은 전의 방보다 좀 작았지. 그래도 별 불편한 것은 없었어. 하지만 아가씨가 정말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이 있다면 창문의 크기가 전보다 더 작아졌다는 거였지. 전에는 유리가 없으면 몸이 쏙 들어갈 정도로 창이 컸는데, 이번 방은 그렇게 크지 않았어. 그냥 팔로 원을 그리면 그려질 정도의 크기였어. 방을 바꿔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니라 아가씨는 꾹 참고 짐을 풀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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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풀고 다른 방의 사람들을 만나볼까- 하고 아가씨는 문을 열고 나갔어. 전의 복도는 왁자지껄 했는데, 이번 복도는 그렇게 시끄럽지 않았어. 그냥 조용해서 다른 방을 쳐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특별히 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창을 바라보거나 잠을 자거나 하고 있었지. 표정이 피곤해보여서 아가씨는 ‘이 선실에서는 일을 시키는 걸까?’ 하고 짐작하기 시작했어. 그렇게 생각해도 아가씨에겐 별로 바뀌는 것이 없지. 사실 일을 안 시키길래 공짜 밥 먹는 것이 더 불안했거든.
방으로 돌아가서 잠을 자고 일어나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데 특별히 일을 시키는 것 같지는 않았지. 그저 1등 선실에 있을 때와 별 다르지 않게 식사하고 자고 그러는 거였어. 그런데도 사람들은 피곤해했지. 처음에는 이야기를 붙이기도 힘들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가씨는 한 두 사람들과 조금씩 이야기를 해 나가기 시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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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방에 사는 사람은 나이가 좀 들어보였어. 아가씨에게는 답답할 수도 있었겠지만 2등 선실에 온 이후로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었으니 그 사람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지. 그러다가 아가씨는 재미있는 점을 알게 되었어. 지금까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이 전부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사람의 직업은 아가씨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지. 그 노인네 -사실 늙지는 않았다고. 고생을 했을 뿐이지- 는 모험가였대.
그 다음날부터 아가씨는 그 아저씨 -원래 나이를 알게 된 후로 생각이라도 노인네라고 막 놀릴 수는 없게 되었지- 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매일 들었어. 그 아저씨도 여행이 꽤나 심심했었는지 여러 곳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어. 그렇게 오랫동안 여행을 했지만 아가씨가 아는 내용은 거의 없었지. 그래서 아가씨는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들에 흠뻑 빠졌고 이야기하는 아저씨도 덩달아 신이 나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지.
여러 이야기들이었어. 가끔 배가 항구에 멈출 때 그 곳이 가 보았던 곳이면 아저씨는
‘이 곳은 이렇고 이런 곳이고 저기로 가면 저런 것들이 있고 저 곳 사람들은 저렇게 살고있고...’ 하면서 이야기를 해 주었어. 아가씨는 작은 창으로 바라보면서 이런 저런 상상들을 했지. 정말 내려 보고 싶었는데 내려 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처지가 아니라 그냥 계속 배를 타고 다녀야 하니 답답했어.
그렇게 긴 이야기를 들어가던 아가씨는 아저씨에게 자신이 여행한 이야기를 조금씩 해주기 시작했어. 아저씨도 엄청나게 재미있게 듣고 있지. 그도 그럴것이 그 이야기의 대부분은 아저씨에게는 또 모르는 이야기였거든. 아니 모르고 있는 것인지 너무 오래되어 잊어버린 것인지 그건 분명하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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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아가씨는 문득 재미있는 생각을 했지. 식사시간을 이용해서 지나가는 선원에게 부탁을 해서 작은 노트 한 권과 연필을 얻었어. 방으로 돌아온 아가씨는 생각나는 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지. 또 아저씨에게 듣는 이야기도 하나씩 적기 시작했어. 적으면서 지도를 같이 그렸지. 심심하기도 했고, 또 그렇게 그리다 보면 자신이 어디로 가게 될 지 얼마만큼을 어떻게 여행해 왔는지 알게 될 것 같아서였어. 노트는 하루가 다르게 글씨와 그림들로 빼곡히 메워 졌고 아가씨는 갈수록 글을 쓰다 말고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졌어.
아저씨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지. 듣는 아가씨에게 조금씩 궁금한 것이 생겼어. 아저씨의 이야기대로 지도를 그렸더니 맞지 않는 거야. 하루는 그 이야기를 아저씨에게 했더니 아저씨는 펄쩍 뛰었지. “지금 날 의심하는 거구나!” 하면서 말야.
아저씨의 표정에 놀란 아가씨는 방에 가서 노트를 들고 와서 지도를 보여드렸어. 지도를 보는 아저씨의 눈이 옆으로 쭉 찢어졌지. 그러더니 다시 원래 표정으로 돌아와서는 아가씨를 보면서 피식 웃었어. 노트를 돌려주면서 아저씨는 아가씨에게
“그 지도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틀려있어.”
하고 말했어 어디가 틀렸는데요? 하고 물어보았지만 아저씨는 웃으면서 넘겨버렸지. 표정이 너무 장난기를 담고 있어서 아가씨는 조금 심술도 났어. 하지만 정말 이상하긴 했기 때문에 아가씨는 잠자코 그냥 아저씨의 말을 들었지. 하지만 아저씨의 말은 조금씩 짧아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