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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아니었구나.”
하고 아저씨가 조개껍데기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대요.
“아주 예전에 나는 어디선가부터 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새인가 잊어버리고 말았지. 기억나는 것이 조개껍데기를 주웠던 기억뿐인데 이 나라에는 바닷가가 없거든. 그래서 꿈인가보다 했었지."
아저씨는 차를 몰아서 예전에 아이가 힘들게 걸어오던 그 길을 순식간에 지나갔어. 밤중이라 차가 하나도 없는 길을 정말 빠르게 몰아서 가는 중. 아이는 참 신기해했지. 더 오랫동안 있었다면, 아니 조개껍데기가 주머니에서 잡히지 않았으면 자신도 이곳에서 차를 운전하고 있는 늙은 아저씨가 되어버렸을 지도 모르니까. 겁도 나고 그러면서 안심도 되고.
얼마를 달렸는지 모르지만 어느새 길은 끝이 나 있었어. 또 예전처럼 높은 담장에 작은 문이 하나 열려있었지. 아이는 차에서 내렸어.
“아저씨는 같이 안 가실래요?”
하고 물었지만
“이제 기억나는 건 현실인지도 환상인지도 모르는 것뿐이야. 이제 내 삶은 이곳에 있단다.”
하는 말만 들었어.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지만 표정이 너무 슬퍼보여서 아이는 그냥 혼자서 작은 쪽문을 넘어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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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문 밖으로 나오니 작은 샛길이 있었어. 아이는 지긋지긋한 기분을 떨쳐버리려고 얼른 그 길을 따라서 걸어갔어. 갑자기 이렇게 생긴 나무 저렇게 생긴 나무 여러 가지를 보니 매일 똑같은 포플러만 보던 아이는 신이 났지. 정신없이 걷고 있다가 문득 길이 얼마나 될까 하고 눈을 들어서 조금 멀리 보네.
아이가 본 것은 하늘에 닿아있을 정도로 높은 산이었어. 그런데 산이 하나만 달랑 있어도 주위를 돌아가기 힘들 것만 같은데 산이 아니라 산맥이 되어서 눈 끝에서 눈 끝까지 벋어 있는 거야. 마치 꼭 벽처럼 산 위에는 구름도 많이 끼어 있어서 너무나 예쁜데, 과연 저 곳 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아이는 약간 암담해졌지.
생각 없이 며칠을 걸었는지 몰라. 배고프면 물마시고 과일 따먹고 하면서 계속 걸었는데 어느 새부터인가 과일이 드문드문해 지더니 점점 먹을 것이 떨어져 과일들은 완전히 사라졌어. 매일 떠먹던 물이 강에서 냇물로 바뀐 후에야 아이는 또 주위에 신경을 쓰네.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도 좋은 거지. 어느새 큰 산맥에 가까이 와서 걷고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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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올라왔을까. 냇물이 흐르고 주위엔 넓은 풀밭이야. 바람이 물을 안고 있어서 시원하기도 하고 춥기도 했어. 대관령하고도 비슷하고. 늦여름의 스위스를 상상하면 비슷할까? 어디서나 보이는 산봉우리들은 하얀색이지. 풀들은 약간 젖어있지만 그렇다고 후덥지근한 기분은 아닌 그런 곳이었대.
참 예쁜 곳이기는 하지만 아이는 배가 고팠지. 공기는 서늘하고 해서 갑자기 오싹했대. 그런데 멀리에 마을 비슷한 곳이 보였어. 정확히 말하면 집이 너무 드문드문 있으니 마을은 아닌 듯. 아이는 조금 더 힘을 내서 가보기로 했지. 야트막한 언덕을 잠깐 넘어가니 사람들이 어느 집 앞에 줄을 지어 서 있는 것이 보여.
오랜만에 사람을 보아서일까 아이는 지난 나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일단 집을 향해서 뛰어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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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는 것 보다는 큰 집이었어.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는 집이었지. 집에는 큰 간판이 붙어있었어. ‘여행자를 위한 집’ 이라고 쓰여있네.
아이는 커다란 열린 문으로 들어갔어. 왁자지껄 시끄러운 곳이었지. 그러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어떤 사람이 무대에 올라와 말을 하기 시작했어.
“여러분, 여러분은 저 산맥을 넘기 위해 이 곳에 온 것이죠?”
사람들은 네에- 네- 하고 대답했어. 아이도 함께 네- 하고 대답했지.
그 사람은 이야기를 계속했어.
“저 산은 거리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하고 높아서 그냥 넘으려고 하면 힘듭니다. 그래서 제가 도움을 드리러 왔습니다. 저기 중간 산을 넘기 위해서는 제가 지금부터 선전하려는 이 책이 꼭 필요하지요!”
하더니 왼쪽 옆구리 뒤에서 책을 꺼냈어. 언제 그 곳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무겁게 보이고 두툼한 책이었어. 표지엔 큼지막하게 ‘아카데미아’ 라고 쓰여있었지.
“이 책을 보면 중간 산을 넘기 위한 자세한 지침과 설명이 쓰여있습니다. 사실 이 책이 없이 저 산맥을 넘는다는 것은 무리죠. 여러분들을 위하여 특별히! 할인된 가격에 모십니다. 쌉니다 싸.”
사람들은 앞 다투어 그 사람에게로 몰려들었어. 아이는 책을 살 돈도 없고 살 생각도 없고 해서 가만히 있지. 책을 산 사람들은 모두 문을 나가 산맥을 오르기 시작했어. 아이는 우두커니 서 있었지. 어떤 사람 하나가 집을 나가다가 문득 아이를 보더니 자신의 책을 주는거야.
“이 책 네가 보도록 해라.”
하더니 그 사람은 다시 책을 파는 사람에게 가서 책을 한 권 더 사고서는 집을 나갔지. 아이는 그 사람이 주고 간책을 들여다보았어. 그리고 그 책을 들고 산을 넘는 길을 올랐지.
책을 펼쳤어.
‘첫번째 갈림길에서 코끼리 코를 흉내내 잡고 스무바퀴 돌고 올라가시오.’
흐음 이걸 해야 하는걸까. 아이는 고민했어. 갈림길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코끼리 코를 흉내내어 잡고 돌고 있었지. 아이는 고민하다 그냥 가기로 했어.
책은 두께만큼이나 많은 내용을 담고 있었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아이는 내용을 꼼꼼히 들여다보았어. 하지만 아이는 내용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대부분 그냥 넘어가고 말았지. 발목이 부을 것 같으면 신발을 느슨하게 신으라는 말과 현기증이 나면 잠시 쉬어가라는 말을 빼고선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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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쪽 산맥으로 나가는 문을 지나서도 아이는 마지막장을 놓지 않고 계속 보았어. 저렇게 큰 산맥을 넘는데 그냥 넘으면 되지 왜 그런 이상한 행동들을 시킬까. 그런데 문을 넘어서 오는 주위 사람들을 보니 표정이 뚱해. 아이하구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걸 거야. 저쪽 편에 아이가 들고 있는 지침서와 똑같은 책을 팔고 있는 사람이 보였어. 반대쪽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그 책을 팔고 있는데 그걸 본 이쪽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갔지. 아이는 엉겁결에 같이 휩쓸려갔어.
“아니 도대체 안내서를 왜 이 모양으로 만들어서 파는 거요?!"
“당신들 왜 이런 책을 파는 것인지 설명해봐!"
사람들의 아우성속에서도 책을 파는 사람은 태연한 표정으로 서 있었지. 그러더니 약간 소리가 가라앉은 틈 사이로 이야기를 시작했어.
“자자 잘 들어보세요. 저렇게 높은 산을 한 번에 올라가고 내려오고 하려면 몸이 버텨낼 수 있을까요? 외따로 떨어진 길목에서 쥐라도 난다면 허리를 다쳐 다리를 못 쓰게 된다면? 자자 상상해보세요 이 책은 그럴 때를 대비해 차근차근히 준비운동을 해가면서 올라갈 수 있게 만들어진 책입니다."
뒤에 이어진 기다란 말은 사실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어. (코끼리 돌기 하는 이유가 그 고도에서 산소가 적을 수 있어서래나. 그거밖엔 안 들리네.) 사람들은 웅성거리더니 그냥 돌아갔어. 아이만 남았지.
“아저씨 그럼 운동 안하고 명상 안하고 그냥 오면 며칠씩 안 걸리고 바로 올 수 있지 않아요?"
아저씨는 갑자기 어디서 들린 아이의 말을 듣더니 책을 싸서 어디론가 뛰어가 버렸어. 아이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다시 원래 가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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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27 03:49 2003/11/27 0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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