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에게.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듣는 사람. 어느 한 쪽이 빠져도 이야기는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텍스트가 존재하기 위한 요건에서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모두 필요합니다. 혼자 쓰고 혼자 읽는 일기일 경우라도, 말하는 이와 듣는 이는 독립되어 존재합니다. 시간대가 다른 두 곳에 하나의 존재가 나뉘어져 있을 뿐입니다.
누군가가 될지 모르는 사람을 위한 이야기는 독백이 됩니다. 생각을 마음대로 펼쳐 나갈 수가 있는 좋은 점이 있지만, 반면에 이야기의 울림이 너무나 넓어지기 때문에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정말 ‘이야기’라는 느낌을 받기는 힘들어집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집중 할 것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메아리가 돌아오는,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 만들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

*
그러니까 정말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거죠.
이야기는 듣는 사람이 꼭 필요하거든요.

당시의 여러 일들 때문에 이 이야기는 시작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자장가로 만든 것이기도 하고, 반창고로 만든 것이기도 해요. 저나 써니가 이걸로 정말 잠들었는지는 이 텍스트의 밖에 있지만, 좋은 반창고는 되었지요. 이 이야기를 듣고 지루하다거나 졸린다고 해도 변명할 말이 없네요. 원래 밤마다 읊던 자장가라니까요.
모니터 날아가고 정신없이 바쁘고 해서 백 일을 훌쩍 넘겨 이야기의 끝을 만났지만 글쎄, 끝을 정해놓고 달리는 이야기에게는 특별한 매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원래 매일 보내던 백통짜리 편지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잡담이 너무 많아요- 그럭저럭 읽을 수는 있게 정리를 해 볼 생각입니다. 그러니 '~습니다'와 '~요'가 왜이렇게 섞여요? 같은 문법에 관련된 질문은 일단은 사절입니다. 이야기의 형식을 빌린 것이 아니라 정말 이야기거든요.

마지막으로 말림비라는 꽤나 괜찮았던 의사소통수단을 선물해 주었던 고재필군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바쁘면 늘어지는 연체와 굳건한 배쨈 압박에도 이야기를 끝까지 만들어준 정민선양에게도 마찬가지로 감사를 드립니다.(이건 감사 차원이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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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22 01:47 2003/09/22 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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