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늦게즈음에 일규네 집에 전화를 했다. 누님께서 일규가 백일 휴가를 늦게 나올 것이라고 하셨다. 교육과정이 길대나. 봄 한가운데 즈음이 되어서 나올 듯 하다. 사정때문에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 전화를 끝으로 이번 방학의 끝을 조용히 묶었다.
어제 저녁에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작은 모임이 있었다. 명목이야 여러가지로 가져다 붙일 수 있었지만,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진을 찍고, 저녁도 먹고, 노래도 부르고, 이야기도 많이 했다. 살아가는 것은 많이 아픈거구나 하는 느낌속에서, 한참동안을 헤엄쳐야 했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행복해' 라는 말을 무던히도 많이 했지만, 언젠가부터 그 세마디를 조금씩 하지 않게 되었다. 삶의 느낌이란건. 모두에게 단순한 것은 아니었다. 모두 다른 것이다. 내 말에는 자신이 없어졌다. 말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에도 무게를 가질 수 있다. 내가 싣는 무게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지워질지 생각하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웃어도 행복하고, 울어도 행복한 사람이 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내 경우에 그렇게 만드는 것은 두가지다. 하나는 그 분, 또 하나는 사람들.
그 분은 잘 설명 할 수가 없다. (아니 인격화할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글로 옮기면 먹이 이상해보이고, 말로 옮기면 금방 바람속에 녹아버린다. 어떤 분이 글을 써도, 그리고 그 글이 너무나 마음에 와 닿고 영에 와 닿아도 그것조차 벌써 원래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음을 금방 느낄 수가 있다. 그렇지만 마음이 아닌 무엇으로 이해하는 그런, 역시 설명할 수가 없다. 너무나 간단히 말하면, 캐로더스씨의 말을 빌리면 '나를 사용하기를 원하는 분이 아닌, 내가 그를 쓰기를 원하는 분'.
사람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길 위 수많은 교차로 중에서 한 번이라도 신호등 아래 멈춰서서 서로를 쉬고 믿었던 사람들. 기억의 한자락에서 집어 낼 때 즐거움이나 웃음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BF들, 고등학교 친구들, 대학교 친구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만난 사람들..
책상 바로 위 작은 액자안에 사진이 있다. 통도사 문 앞에 다섯명이 서서 사진 밖을 보고 있다. (...그냥 서 있지는 않지만.) 힛 하고 짓는 웃음 속에 꽤 여러 생각이 난다. 이 사진을 꺼내볼까.
손에 주머니를 찔러넣은 채로 힙합틱하게 옷을 입고 있는 녀석. 이녀석은 맨날 동네 아줌마들한테 친구들을 말고 다닌다고 혼났다. 팝과 락을 듣다가 영어듣기가 네이티브를 능가할 정도로(!) 늘어 학교대표가 되었던 엄청난 아이.포항공대라는 곳이 있더라 하고 알려준 사람도 이 진환군이다.
그 옆에 서 있는 -아마 사진 안에서 제일 뻘쭘한 자세가 아닐까- 검정색 상의에 청바지를 입은 앤 유미다. 한 아파트에서 같은 과로 들어가 삼 년동안 단짝이 되어 지냈다만, 부지런한 이유로 학교버스 안에 앉으면 꾸벅~꾸벅 잘도 졸아서 옆에 있는 난 꽤 심심했다. -그렇다고 안 놀았던 것은 절대 아니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버스 안을 휘젓고 다녔군.
가운데에는 인문계 외길을 걷다가 갑자기 의사가 되는 길에 올라간 혜상이. 어머니의 제자였기 때문에, 단체로 집에 놀러왔을 때 혼자서만 호칭이 이상했었다. ("어머니-" "아줌마-" 사이에 낀 "선생님-" 은 대체...) 날 승환이 형 팬으로 개조시킨 역사적인 인물. 그러고보면 시험공부 하다가 심심하면 새벽에 전화도 꽤 많이 했는데, 당시는 삐삐시절이라 집 전화를 쓰다가 걸린 적도 있었다.
제일 오른쪽엔 지만군. 지만군의 과거는 나에게는 베일이다. 나머지 애들이야 초등학교 중학교 계속 같이 다녔지만, 지만군은 고등학교때 처음 만났다. 가끔 하는 한마디로 주위 사람들을 웃기고 얼리고 하는 재주를 가졌었다. 그러나 알고보니 외모와는 다르게 말을 엄청나게 많이 하는 사람.
가운데 즈음 청자켓을 입고 앉아있는 사람은 나다. 학교버스에서 맨날 총대를 메고 혼났지만, 덕분에 같은 버스 사람들의 폐인화에는 일조를 했다. 빨빨거리고 다니기와 사람들하고 놀기를 좋아했다. 이 사진 안에 있는 사람들과 있을 때는 엄청나게 웃기다가 외부인들을 만나면 무언가 씨니컬해지는, 책을 츄파춥스 빨듯이 보는 그냥 친해지기는 쉽지만 정말 친해지기는 무언가 힘든 사람.
사진의 포즈만 보고 있어도 성격이 그대로 보인다. 다른 사람들이 이 사진을 봐도 성격이 다 보일까? 그건 모르겠다. 이 사진의 인간들은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는 '특수집단' 이었다. (사진에 안나온 사람도 있다. 지금도 술을 푸고 있을지 한국 과학의 미래를 보고 있을지 알 수 없는 광팔이와, 정규의 주인님 행세를 하던 지혜등등.)
떨어지는 즐거움은 깨진다. 엄청나게 밝게 빛난다. 즐거웠던 일들만이 있었던 것은 절대 아니지만, 그 모든 것들마저도 잠시 머물렀던 신호등과 교차로가 되어있더라도
내 메이트들의 소중함.
진환이의 포스터를 걸어놓은 방에서 민군의 책을 보다가 광수 음악을 듣고 혜상이가 준 베게를 베고 자는 지금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