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 즈음부터 한국의 영화 바람을 설명하기 위하여 영화 잡지에는 '웰메이드(well-made)'라는 표현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말은 유행처럼 번졌다. "아, 박찬욱씨의'올드보이'가 이번에 굉장했다지?" "그런 웰메이드 영화가 많이 나와야 할텐데 말이야." 이런 사적인 대화부터, "말죽거리 잔혹사는 잘 만들어진 웰메이드 영화" 라는 말까지, 어느새 웰메이드는 영어 철자 그대로 해석되어 "잘만든" 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되었다.

그러나 "well-made"는 결코 칭찬의 말이 아니다. 오히려 작품성에 대하여 비꼴때 쓰는 표현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만드는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던 19세기 유럽에서는 그 위치에 연극이 있었다. 수많은 극단들이 있었고, 다양한 작품들을 상연하였다. 그런데 극을 해보니, 어떤 연극은 인기 폭발이고, 어떤 극은 사람들이 외면하더라는 것이다. 어떻게 되었을까? 21세기 한국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당시에도 그대로 일어났다.

예를 들기 위하여 21세기 초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좋아할만한 드라마를 하나 만들어보자. '이공계 위기'라는데 사기 진작을 위해서 배경은 포항공대로 해 보자. 사람들은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니 줄거리는 일단 사랑 이야기. 그러면 대강 각이 잡힌다. "학문만 할 것 같은 포항공대에서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 극의 긴장감을 위해서는? 당연히 삼각관계 추가하고, 공대니까 남학생 둘에 여학생 하나. 같은 계열 학생이니 카이스트 여학생까지 추가해서 2:2 구도 만들어보자. 분위기 내려면 어려운 말이 잔뜩 들어간 수업씬도 몇장면 있어야겠지?

드라마가 완성되었다. "러브스토리 앳 포항공대" 사랑이야기가 아닌 러브스토리인 이유는 사람들이 예전 한문을 좋아했던 것 만큼 -'있는척'의 상징이었다지?- 요새는 영어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만들면서 생각하자. 유명 배우 캐스팅하면 자동으로 줄거리는 생각이 난다. 정 어려우면 주인공들 사이에 대립각을 세우거나 빈부격차를 좀 두거나 복잡한 과거 이야기를 집어넣으면 ok.


19세기의 프랑스 연극계는 그야말로 저런식의 만들어진 연극들로 가득차버렸고, 그 유행은 연극계 스타들과 뻔한 스토리로 대표되어 유럽 전체에 들불같이 번졌다. 그러다가 스타시스템에 대한 반성과 함께 흥행보다는 극의 완성도에 집중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시대는 백여년 이상 흘렀는데 위의 구태는 반복된다. 저것이 'well-made play'의 정의이다. 우리말로 하면 "대중의 취향에 맞춘 통속극" 이 비슷한 해석 되겠다. 그러면 "올드보이"가 웰메이드 영화인가? 아무리 봐도 그렇게 깎아내리긴 힘들다. 만약 2000년 여름에 '연극의 이해' 과목을 수강하지 않았다면? 나또한 "좋은 영화네" 대신 "웰메이드 영화군" 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아니 꽤 오래전부터 우리들에게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세종대왕님때에는 그렇게 한문이 멋지다고 우리글은 촌스럽다고 쌍놈글이라고 단체로 상소를 올리더니, 이제는 영어가 들어가야 단어가 멋지지 한문은 절대 안되고 한글은 별로인양 말한다. 길거리에 나가면 영어간판이 가득이다. 멀리 안가도 블로그들을 돌아보면 본문 내용에는 영어가 없는데도 외국인을 위한 블로그인양 사방이 영어이다.

영어가 만연하는 풍조야 강대국의 문화 영향을 강하게 받는 약소국의 일반적인 경향이니까 특별히 비판적으로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well-made'와 같이 생각없이 왜곡되어 들어오는 단어들은 영어도 아니고, 한국어도 아니다. 아마도 가장 천박하게 우리 사이에 들어오게 되는 말들일게다. 막일꾼들 금에 손대지 말라고 "no touch" 라 소리 질렀다고 백년후의 후손들도 "노다지"를 찾아 헤메게 된 사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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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02 02:58 2004/12/02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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