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

빚어내기/생각하기 | 2002/01/17 02:47 | inureyes
아주아주 예전에 처음 '내 컴퓨터'를 가지게 되었을 때를 기억한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바랬었었는지, 그리고 결국 손에 들어온 첫번째 컴퓨터가 얼마나 한심한 컴퓨터였는지도 안다. 그렇지만, 오랜 기다림 속에서 그 컴퓨터가 어떠한 모습이 될 것인지를 그려냈던 시절. 열의가 환경을 이겨낼 수 있었던 기억들이 있다.

이 글 지금 네번째 멀티에서 쓰는 중이다. 처음 내 손에 만져졌던 그 컴퓨터의 1/16의 크기밖에 되지 않는다. 실제로는 비교가 안되게 더 빠르겠지만 단순히 클럭을 비교하면 여든네배가 빠르다. 이녀석 LCD옆에선 세번째 멀티의 기억이 지워지고 있다.

내가 내 컴퓨터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억일까 아니면 기계 자체일까. 몸통을 바꾸면서도 계속 멀티는 멀티다 하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중요한 것이 기억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확실히, 한 번 한 번이 지날 때 마다 내 컴퓨터가 나와 함께 사는 방식은 달라졌기 때문이다. 기억. 이란 것은 단지 정지해 있는 어떤 것에 붙은 이름의 하나.

기억이 그대로 있어도 그 기억을 지배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생각이 같아도 뇌가 다르다면 같은 바탕으로 만드는 결론은 다를것 같다는 생각처럼. 결국 어떤 하나의 컴퓨터가 '멀티'라고 이름붙여져 몇 년씩 함께 살아가는 것은 기억만으로는 아니지 않나 싶다. 1995년에 만들어진 디렉토리가 그대로 있다고 해도, 그것들 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속깊은 유대.

...옆의 컴퓨터에 운영체제 인스톨이 끝났다. 완전히 텅 비어버린 모습으로 날 보고 있다. 이제, 잘 생각해서 다시 다른 모습을 주어야 할텐데. 무생물에 인격을 부여하는 것은 그 주인의 재량이니까. 우리 자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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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17 02:47 2002/01/17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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