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빚어내기/살아가기 | 2013/07/04 10:54 | inureyes

졸업 논문에 한국어버전 감사의 글을 쓰지 않으려다가 주위의 권고에 짤막하게 적었다. 너무도 빚을 진 사람이 많아 하나하나 적기는 어렵겠다 싶어 잠시 고민하다, 학문의 길에 정말 큰 영향을 주신 세 분과 두 친구, 가족 정도를 적었다.

지난주 금요일에 잠시 정리를 하기 위하여 시간을 비웠다. 스스로에게는 중요한 날이었다. 합동 과제 워크샵이 있는 날이었지만 마침 논문 심사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발표 차례를 빼 주어 다행이었다.

살다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여러 영향을 받는다. 길게, 짧게, 강하게, 약하게. 어쩐지 졸업논문의 주제같다. 많은 관계들이 모두 의미 있고 의미 '있었다.' 지난주 금요일은 의미 '있었던' 사람들과의 날이었다. 더 만나고 싶지만 만날 수 없는 그런 사람들, 이제는 화석화 되어 버려 일방적으로 받기만 할 수 밖에 없게 되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영향력의 일방통행이란 살아있기 때문에 받는 불이익 같은 것이다.

중간에 공부를 그만하고 싶을 때가 꽤 있었다. 좋아하는 것과 잘 하는 것이 일치하면 가장 좋은 경우라고들 하지만, 내 경우 좋아하는 것도, 잘 하는 것도 모두 그다지 세상에서 말하는 '쓸모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가끔 세상과 자신 사이에서 자괴감에 빠져 있으면 떠오른다. '처음 생각을 잊지 마라.' '무엇이 되고 싶은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선택해라.' '남들이 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건 맞는 답이 아니다.' 이미 시간 속에서 고정되어버린 대화들이다. 그렇게 꾸역꾸역 왔다.

많은 정리를 한 지난주 금요일이었다. 오후 느지막하게 돌아와 예상치 못했던 졸업 서류 제출 관계로 급했던 것이 우습기도 하고 선물 같기도 한 하루였다. 살아 있기에 딱히 빚진것 같다거나 하는 마음은 없다. 하루 앞을 모르는 것이 삶이다. 그래도 순간의 소중함을 항상 잊지 않게 해 주어서 고마웠다. 해야하는 일을 하려고, 이제는 무를 수 없어진 말들에 책임을 지려고 참 노력 많이 한 시간이었다.

잘가라. 고맙다.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놈 중에 가장 똑똑한 놈과 가장 후배같았던 놈아.

학위 공부를 되돌아보며 한 마디로 요약해보니 재미있었다.

*

감사의 글

이 공부를 해야 갈증이 풀리겠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결정한지 8년이 흘렀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입니다. 이 시간동안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고, 논쟁하였던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길 위에서 너무 훌륭하신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한 분 한 분 다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 드리기가 어려워 감사의 마음으로 대신합니다.

공부하며 항상 놓지 않으려 했던 화두가 있습니다. 여러 화두들이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어째서 이 불안정하고 복잡한 세상은 쉽게 망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이 되어 있습니다. 이 질문을 시작할 때에 질문이 헛되지 않다고 격려해주시고 끊임없는 토론을 해 주신 소흥렬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인식론과 기호학의 공부를 거쳐 결국 물리학의 길을 선택하도록 조언을 주신것도 감사드립니다. 고등 학위 과정을 위해 물리학을 선택한 이유는 물리학이 다른 학문들과 달리 인과율에 따른 답을 제시하는 대신 인과율을 지배하는 구조에 관한 학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학자가 무엇인지, 공부하는 사람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사 년에 걸쳐 지도해주셨던 이성익 교수님께도 감사드립니다. 학문을 한다는 의미가 공부를 한다는 의미와 어떻게 다른지 위트있게 알려주시던 모습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가르침을 주신 자세로 살아가려 항상 노력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학문이 극에 이르면 학문적 결과가 아닌 과정을 통한 깨달음을 이해할 때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알 것도 모를것도 같습니다. 강산이 변했는데, 그 발치까지 따라가기엔 남은 거리가 더 멀어져만 갑니다.

여러 분야의 경계인으로 살아온 제게 언제나 끊임없는 조언과 믿음을 주신 김승환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학부 시절 수강했던 물성물리특강 과목을 통해 처음으로 물리학을 통한 깨달음의 의미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 인연이 사제 관계로 이어져 이렇게 지속되고 있는 것이 어떻게 보면 초기조건의 민감성이 있는 복잡계의 가장 좋은 예가 될 것도 같습니다. 끝없는 열정과 지치지 않는 추진력에서 항상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인생이 관성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자세를 끊임없이 새기겠습니다.

다른 길을 가 보면 어떨까 고민할 때마다 때로는 짐이, 때로는 의욕이 되어준 이 혁과 오병찬에게 그리움을 보냅니다. 풀 수 없는 문제를 어떻게든 풀 수 있는 문제로 만들려는 발버둥 속에서 아주 약간씩이라도 더 나아갈 수 있었던 듯 합니다.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 어떤 길을 걷고 있더라도 어디를 향해 무엇을 위해 걷고 있는지 잊지 않게 해 주는 닻으로 기억하겠습니다. 이제야, 오랫동안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은 듯 합니다.

스스로 선택하는 길에 언제나 끝없는 사랑과 성원을 보내주시는 신용점, 원지선 두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형제로서 저와는 다른 방향의 재미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신규빈에게도 감사와 응원을 함께 보냅니다. 마지막으로, 이성과 감성의 폭풍우를 안온하게 잠재워준 황은진에게 감사드립니다. 모든것을 뚜렷하고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어 항상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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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4 10:54 2013/07/04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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