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했다. 다시 수업이 시작되었다. 여전히 숙제는 첫 날부터 나왔고, 두 달만에 받은 숙제의 깝깝함을 아는지 늦여름의 햇살은 대단했다. 이상하지만, 초여름의 햇살과 늦여름의 햇살은 세기에 있어서는 비슷할텐데도 피부에 닿는 느낌이 다르다. 눈에 보이는 풍경이 달라서 그렇겠거니 생각한다. 귀로 듣는다고 생각했던 소리조차도 실은 눈으로 동시에 보고 귀로 들어야 제대로 들린다는 이야기를 케이블TV 어디에서 보았다. 아. 어쩌면 정말로 햇살의 종류가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순식간에 감정의 영역에서 과학의 영역으로 돌아와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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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하나 샀다. Averatec 1000이라는 작은 노트북이다. 예전 노트북을 살 때와 비교하면 노트북 가격이 아주 많이 내렸다. 노트북을 구입하려고 알아보니 100만원도 하지 않는 노트북들이 많았다. 하지만 아직도 작은 노트북은 대개 아주 비싸다. 200만원 미만은 찾기 힘들다. 이번에 산 모델은 10인치의 작은 모델인데도 다른 모델들보다 아주 싸고 가격대 성능비가 좋다고 하여 구입하였다. 만족하고 있다.
예전같았으면 초저전압이나 가벼운 휴대성 보다는 성능을 중시하여 샀을것이다. (140만원 정도이면 성능 좋고 무겁고 커다란 노트북과 일반적인 컴퓨터 한 대를 동시에 살 수 있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연구실에 들어와서 방학을 보내고 난 후 컴퓨터에 대해서는 일종의 무욕 상태가 되어버렸다.
연구실에서 계산용 컴퓨터로 펜티엄4 2.8gb 열 다섯대, 펜티엄D 듀얼코어 열 다섯대하여 도합 서른대를 연결해서 쓴다. (초고급 사양이지만 하드디스크는 클러스터링의 특성상 안 들어있다. 파일용 서버는 따로 있다.) 동역학을 보기 위하여 증권 시계열 데이터를 분석한다고 파일 서버도 추가로 한 대 조립하였다. 레이드로 묶은 1.3테라의 하드디스크와 작업용 공간 600기가하여 용량이 거의 2테라의 하드디스크가 물려있다. 램도 대충 2기가씩 꽂혀 있다. 저런 컴퓨터들 조립하고 연결하다보니 좋은 컴의 의미가 무엇인지 잊어버리게 되더라. '터미널만 잘 돌아가면 대충 좋은 컴이 아닐까?' 컴퓨터를 바라보는 스케일이 달라진 것 같다.
과거에 '물질이 풍족해지면 사람이 너그러워진다'는 말이 있었다. 자본주의가 발달해 온 과정과, 지치지 않는 물욕物慾을 보면 저 말이 틀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받는다. 유학자들이 틀렸던 것인지, 틀렸다면 정말 풍족함을 실제로 경험한 적이 없어서 그런 결론을 내렸던 것인지 궁금하던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컴퓨터에 無念해진 자신을 돌아보며 과거의 성현들도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닐까 하고 한 번 더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