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이 연속되는 어떠한 현상에 관한 정의라면, 흐름에 의해 각자가 얽매여 있는 시각에도 어떠한 이어짐이 존재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기본적으로 다양한 시각을 가지고자 노력해도, 자신이 속해있는 환경을 초월한 개념정의는 불가능하다.
이 해의 가능을 믿는 부류가 사고하는 방식은 두 가지이다. 근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궁극적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 채, 다른 이해에 도달한 사례를 지식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향유하는 방식이 있다. 자신에 대한 사고와 정의보다는 타인의 정의가 내려주는 단순한 감각적 사실에 대한 감정을 현실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부류는 흐름의 동기화를 꾀하나 실제로는 시도에 얽매이는 경우이다. 이러한 부류는 자신이 창조해 낸 지혜가 아닌 지식에 만족하며 그것을 지식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가 이에 속하며, 공통적으로 다른 흐름들, 타인에 대해 약간의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보통이다.
다른 부류는 가능성의 유무에 대해 해결할 수 없는 미묘한 종류의 정의를 내림으로서 문제에서 빠져 나오고자 하는 형이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시각을 한정함으로써 문제 자체에 대한 도전에서 빠져 나온다. 현실적으로 조금 더 본질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명제가 아닌 것에 대해 명제라고 정의를 내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이 장기간의 사고를 거치지 않고 나온 결과라면 가장 어리석은 사고방식이 될 수 있다.
두 단계의 벽을 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이 장소와 이 나이대의 사람들에겐 힘들지라도. 즐길 수 있는 고독과 해결할 수 없는 답답함을 공유하면서 편할 수 있는. 그 걸 찾아 여기까지 왔는데,
아직은 못 만났다. 그 누구도 그러한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