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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어내기/이야기하기 | 2015/09/12 00:00 | inureyes

어릴적 테크노마트 가서 잘도 사 보던 짝퉁 비디오CD 들이 문득 떠올랐다.

신세기 사이버포뮬러 사가의 마지막 시리즈였던 사이버포뮬러 SIN은 객관적으로 보면 시리즈의 일관성도, 캐릭터도, 작화도 무너졌던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럼에도 그 애니메이션을 개인적인 인생 애니메이션 3위에 꼽는다. SIN이 발매되던 고등학교 2~3학년이란 시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보던 엄청 긴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계속해서 관통하던 교훈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마무리한 엔딩의 강렬함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어떤 쪽이든 그 희한했던 애니메이션은 인생 애니메이션 중 하나가 되었다.

사이버포뮬러는 인공지능 대화 학습형 자동차와, 우연히 그 자동차의 드라이버가 된 아이가 사이버포뮬러라는 초고속 레이싱의 세계에 들어와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는 과정을 다섯 장편/중편 시리즈로 다룬 애니메이션이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보면 성장물이고, 장치적으로 보면 인간과 컴퓨터(로 대표되는 기술)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시리즈이다. 앞서 나온 네 시리즈는 인간과 컴퓨터의 이상적인 관계로 주인공 버디의 관계인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제안한다. 이 관계에서 컴퓨터는 인간을 보조하면서 성장하고, 인간의 훌륭한 보조자로써 제 역을 해 나아가며 결국 '기계'가 가질 수 없는 불확정성을 획득한다. 그리고 각 시리즈마다 안타고니스트로 등장하는 '환경', '절대적 강자', '인지의 한계', '기계에 의한 완전 제어' 를 극복해나가면서 극적 우위를 확보한다.

마지막 시리즈였던 사이버포뮬러 SIN은 이 관계에 정면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게 최선이었을까?"

사이버포뮬러 SIN의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승리를 통한 트라우마의 극복' 이다. 간단히 소개해본다. SIN은 기존 시리즈의 주인공이던 하야토 대신 주인공의 동료, 선배, 친구이자 경쟁자 포지션에 있던 캐릭터인 카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원래 주인공은 이제 최강의 장벽이 되어 주인공을 가로막는다. 카가는 하야토를 이기기 위해 이 년 만에 사이버포뮬러 계로 돌아왔지만, 팀은 바로 이전 시리즈의 모 사건으로 인해 지원이 끊겼고, 일 년이 멀다 하고 기술이 발전하는 사이버포뮬러 세계에서 구형 머신으로는 공정한 시합이 불가능했다. 그 와중에 전 시리즈의 악역인 나구모로부터 '오거'라는 차를 제공받게 되는데, 이 차는 기존 시리즈의 주인공 차량인 차와 설계는 같으나 기본 철학이 달라 갈라져 나온 역사가 있는 차였다- 라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여차저차한 것은 생략하자. SIN 시리즈의 주인공의 버디가 된 오거에 탑승했던 드라이버들은 자꾸 죽었다. 최적으로 달리기 위해서 머신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동작이 있고, 머신은 인간이 그걸 해 줄 거라는 가정 하에 동작하지만 일반적인 드라이버는 그에 맞춰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철학의 중요한 차이가 이 부분이다. 머신은 더이상 인간을 보조하지 않는다. 기계는 자신이 이기기 위한 전략을 스스로 세운다. 그걸 같이 해 나아갈 '인간' 파트너가 필요한 것이다. 이 부분은 극 중 내내 그렇구나- 정도로 여겨지다가 극의 끝에서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된다.

이런저런 전개 끝에 리그 컵을 놓고 승자를 가리는 마지막 경기에서 모든 차들이 연료를 바닥낸 채로 마지막 코너를 돌 때, 오거는 강제로 자신을 재프로그래밍해서 원래는 불가능한 부스터 카운트를 하나 만든다. 그 결과 카가는 부스트로 레이스에서 승리하고 오거는 오버히트해서 망가진다.

앞에서 머신이 '이기기 위한 전략'를 스스로 세우고 그걸 맞춰줄 인간 파트너가 필요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기기 위한 전략을 세우기 위해서 "인공지능"은 무엇을 가져야 하는가? '호승심' 이다. 이기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게 된 머신과, 그 파트너로서 존재하는 인간이라니, 마지막 편을 보고 나서 며칠 동안 머리를 괴롭힌 충격이 아직 생생하다. 인간을 보조하며 함께 성장해나가는 기계와, 처음부터 완벽하지만 같이할 파트너를 찾을 수 없는 기계. 우위를 가려보자면 어느쪽의 손을 들어 주어야 할까 하던 그 팽팽한 균형이 깨지는 마무리였다.

카가는 어린 시절 레이스에서 잃은 친구에 대한 트라우마를 떠나 보냈다. 나구모는 형이 만든 차를 통해 형의 인공지능에 대한 철학이 옳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속박에서 벗어났다. 오거는, 너무나 이기고 싶어하던 차는 파트너를 만나 드디어 이겼다. 주인공 셋의 트라우마들은 이겨서 극복된 것이 아니라, 이기는 과정에서 아무래도 좋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극복되었다.사이버포뮬러 SIN은 그렇게 인생 애니메이션 3위가 되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dwiI8WuVg0

덧) 인생에 영향을 줄 정도로 임팩트 있었던 애니메이션 1위는 왕립우주군이고, 2위는 아르젠토 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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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2 00:00 2015/09/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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